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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어머니대회 토론중에서〉《자식부자는 가장 큰 부자》

2012년 11월 22일 13:07 공화국

9남매를 낳아 키우는 박금옥녀성

평안북도 천마군 서고리에 사는 박금옥녀성(42살)은 제4차 전국어머니대회에 아들딸들을 많이 낳아 훌륭히 키우고있는 녀성의 한사람으로 참가하였다.

현재 아들 6명, 딸 3명 모두 9남매를 키우는 박금옥녀성은 이번에 공민의 최고영예인 로력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15일 대회연단에서 한 그의 토론은 자식들을 많이 낳아 키우는 어머니들의 절절한 심정을 대변한것으로서 장내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고향인 황해남도 장연군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박금옥녀성은 락연광산에서 로동자로 일했다.

1989년 12월 평안북도 천마군원천동원사업소에서 일하는 로동자와 결혼하여 남편의 고향인 천마군 서고리에 시집을 왔다.

이듬해에 그는 소원대로 예쁜 딸을 낳았다.

원래 박금옥녀성은 아들딸 2명을 낳아 곱게 키우리라 마음먹었다고 한다.

첫자식이 3살 잡히던 1994년에 그는 둘째아이를 임신하게 되였다.

그해 7월 김일성주석님의 서거라는 민족의 대국상을 당한 그는 오누이형제만을 키우려던 초기의 생각을 고쳐하게 되였다.

애도기간 김정일장군님께서 온 나라가 피눈물속에 잠겨있는 속에서도 분계연선마을의 세쌍둥이와 산모를 위해 사랑의 직승기까지 띄우도록 하신 소식은 박금옥녀성을 크게 감동시켰었다.

그는 《김정일장군님의 숭고한 후대사랑의 뜻을 받들어 아이를 많이 낳아 나라의 기둥감으로 키워 내세우기로 결심했다. 남편도 적극 지지해주었다.》고 다산의 동기를 말한다.

조선에서는 아이를 많이 낳는것을 장려하고 또 어린애를 많이 낳아 훌륭히 키운 녀성들을 사회적으로 적극 내세워주고있다.

더우기 사회주의보건제도의 혜택하에서 아이들을 많이 낳고 키우는것은 문제로 되지 않았다.

박금옥녀성은 세번째로 오누이쌍둥이를 낳게 되였다.

그의 남편도 자기 어머니처럼 자식을 아홉 또는 열은 꼭 낳아야 한다고 신심과 고무를 주면서 집안일과 자식키우기를 열성껏 도와주었다고 한다.

남편의 믿음직한 방조속에 그후 그는 아들 넷에 딸 하나를 더 낳아 아홉남매의 어머니가 되였다.

자식 하나 키우는데 오만자루의 품이 든다고 나이도, 성격도, 취미도 지어 식성도 각이한 오롱조롱한 아홉자식들을 키운다는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고 한다.

큰 아이가 새 신발을 신겠다고 떼질할 때 둘째는 책가방을 새로 사달라고 투정질했고 쌍둥이오누이가 간식을 달라고 성화를 먹일 땐 갓난 애기가 젖을 달라고 보채군 하여 정신차릴사이가 없었다는 박금옥녀성이다.

그는 《젖먹이애기로부터 암죽을 먹어야 하는 아이, 밥먹는 큰애들에게 하루 세끼 음식을 만들어주자고 해도 힘들었다. 애들이 다 자는 저녁에 장난세찬 아이들의 빨래까지 하고나면 새날이 밝군 하였다.》고 힘들었던 지난 시기의 나날들을 떠올린다.

박금옥녀성에게 있어서 가장 힘들고 괴로웠던 때는 지난 1990년대 고난의 행군시기였다.

그가 오누이쌍둥이를 낳던 때는 고난의 행군에 들어선 첫해인 1995년이였다.

가장 큰 고생은 식량난이였다.

나라가 어려움을 겪는지라 누구에게 손을 내밀 형편도 못되였다.

남편과 합심하여 자력갱생으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나갔다.

집주변과 야산의 비경지를 일쿠어 콩을 심어 식량을 자체로 조금씩 해결해나갔다.

한편 집에서 돼지, 염소, 토끼를 비롯한 집짐승들도 길러 생활에 보탬하였다.

어려운 속에서도 자녀교양과 교육문제만은 소흘히 하지 않고 자식들을 매일 학교에 보내였으며 학습정형을 수시로 알아보군 하였다.

《학교가는 애들에게 점심밥을 못싸줄 때도 있었다. 그땐 정말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팠다. 예나지금이나 자식들이 학교와 마을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때가 제일 기쁘다.》고 박금옥녀성은 말한다.

박금옥녀성의 맏딸 강선희의 나이는 22살이고 9번째 막내아들인 강성의 나이는 아직 2살이 안되였다.

사회생활을 하거나 군대에 나간 자식도 있지만 중학교, 소학교, 유치원, 탁아소생에 이르기까지 아직 철부지 유년시절의 자식들이 더 많은 형편이다.

9남매자식의 운명과 생활의 보호자는 비단 박금옥녀성과 남편만이 아니다.

박금옥녀성은 《식량이 부족할세라 아이들의 옷과 신발이 해질세라 군과 리의 책임일군들과 녀맹원들, 주변과 이웃에서 모성애에 비할바없이 웅심깊고 뜨거운 사랑으로 살뜰히 돌봐주고있다. 병이 생겨도 리당일군들과 의사선생들이 제일 먼저 달려온다.》고 나라와 제도의 고마움을 눈물속에 강조한다.

명절때에는 낯모를 많은 사람들도 찾아와 가정생활과 어린이들의 학습에 필요되는 물건들과 식료품들을 한가득 안고와 축하해준다고 한다.

그런 진정을 대할 때마다 박금옥녀성은 자신과 자식들에 대한 요구성을 더욱 높인다.

자식들을 더 많이 낳을뿐만아니라 모두 민족의 대, 선군조선의 대를 훌륭히 이어나갈 믿음직한 인재로 키우는것이 박금옥녀성의 목표이고 포부이다.

이번 대회에 참가하여 토론까지 하고난 그는 대회를 계기로 자식을 이제 하나 더 낳아 10명의 자식모두를 조국보위초소에 내세우기로 남편과 토론하였다고 한다.

박금옥녀성은 《힘이 들어도 아이는 낳을수록 더 곱고 정말 자식부자만큼 큰 부자가 없다. 자식모두를 훌륭히 키워 김정은원수님의 사랑과 배려에 꼭 보답하겠다.》고 결의한다.

(평양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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