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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 경흥군에서 감행된 일본군성노예범죄의 진상/조선일본군성노예 및 강제련행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 조사보고서

2018년 08월 15일 07:09 공화국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우리 나라가 일제의 군사적강점하에서 해방된 때로부터 73년이 되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였지만 수십년세월이 지난 오늘까지 지워지지도 잊혀지지도 않는것이 바로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저지른 범죄적만행의 흔적이다.

더우기 20만명에 달하는 조선녀성들을 성노예로 끌어가 저지른 반인륜적악행에 대한 원한은 피해자들은 물론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최근 조선일본군성노예 및 강제련행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에서는 해방전 우리 나라에서 출생하여 살다가 패망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간 나까무라 스미에(일본사람 92살)라는 녀성이 함경북도 경흥군 경흥면(당시)에서 일본군《위안소》를 직접 목격하였다고 한 증언을 입수하였다.

이에 기초하여 위원회는 지난해부터 라선시 선봉지구에서 현지조사를 진행하고 그곳에서 감행된 일본군의 성노예범죄를 확증한데 따라 그 진상을 온 세상에 까밝힌다.

1. 해방전 경흥군의 일본군주둔상황

1882년 임오군인폭동을 구실로 조선반도에 침략무력을 주둔시키기 시작한 일제는 로일전쟁직후 《한국주차군》이라는 이름으로 2개 사단의 무력을 조선반도에 배치하였다.

바로 그 2개 사단중 19사단이 라남에 본부를 두었다.

라남제19사단은 회령, 라남, 함흥에 보병련대와 공병련대, 기병련대를 주둔시켰으며 중국, 로씨야와 국경을 접한 지역들에는 국경수비대를 배치하였다.

1937년에는 라진에 라진요새사령부를 두는 등 북부국경의 좁은 지역에 방대한 무력을 집중시켰다.

1920년대 당시 인구가 6,000여명에 불과하였던 자그마한 산골군인 경흥군은 중국, 로씨야 두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있는것으로 하여 국경경비의 요충지로 중시되였다.

일제는 반일 및 항일투쟁을 진압하고 이전 쏘련으로부터의 사회주의사상의 류입을 방지하기 위해 여기에 국경수비대를 배치하고 그를 라남제19사단 76련대에 소속시키였으며 수비대인원을 계속 증강하였다.

1937년 라남제19사단 76련대 국경수비대는 《국경수비대편제개정요강》에 의해 새롭게 개편되였으며 경흥군에 그 본부를 두고 각곳에 소부대를 배치하였다.

일제는 1910년대부터 경흥군에 헌병대를 주둔시켰다.

경흥군을 포함한 조선반도 북부지구의 헌병대들은 국경경비와 함께 대쏘작전, 첩보활동을 중요임무로 하였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수비대와 함께 국경을 넘어가 군사행동도 하였다.

특히 조선인민혁명군을 비롯하여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하고있는 항일력량이 조선국내에 들어오는것을 막기 위해 두만강이 얼어있는 겨울에는 강안에서 24시간체제로 엄중경계를 폈다.

이와 같은 현실은 경흥군에 일본군《위안소》가 일찍부터 출현할수 있은 충분한 조건으로 되였다.

2. 원정동에 설치운영되였던 일본군《위안소》

나까무라 스미에의 증언에 기초하여 라선시 선봉지구 원정동에서 현지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 여기에 설치되였던 일본군《위안소》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1930년대 중엽 또는 후반기에 세워졌다고 보아지는 《위안소》건물은 높은 담장을 둘러친 1층짜리 벽돌집으로서 마을 한복판의 둔덕진 곳에 있었다.

건물안에 들어서면 한쪽방향으로 여러개의 개별방들이 있고 매 방의 출입문에는 녀성들의 사진이 걸려있어 장교들은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드는 녀성을 선택할수 있었다.

보통날과 저녁에는 장교들이 리용하고 일반병사들은 일요일에 리용하였다.

《위안소》에는 17살-20살정도의 남쪽지방 처녀들이 끌려와있었으며 그들은 거의 감금상태에 있었다.

이에 대하여 현지주민들인 김자명(남자 72살), 최창남(남자 73살)은 《어머니가 말하기를 해방전 여기에 일본군병사들이 많이 와있었는데 그들은 대낮에도 건물앞에 바지춤을 쥐고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들어가군 하였다고 한다.》, 《당시 건물에는 보통날에도 일본군인들이 출입하였으며 특히 일요일에는 일본군병사들이 줄을 지어 순번을 기다리며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라고 증언하였다.

또한 김영숙(녀자 92살)은 《그때 우리 집이 그 건물뒤에 있다나니 때때로 그 안을 들여다볼수 있었다. 그곳 주인은 주민들을 몹시 경계하면서 사람들이 녀자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이들이 그 앞에 와서 놀거나 들여다보지도 못하게 하였으므로 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것은 생각도 못하였다. 녀자들도 밖에 나올수 없었으며 기껏해서 담장을 친 마당안에서 거니는것이 고작이였다.

녀자들은 모두 어린 처녀애들이였는데 머리는 덥수룩하고 옷차림이 매우 람루하였다. 그들중에는 임신한 녀자도 있었는데 여윈 몸에 크게 부른 배를 안고 힘들게 앉아있는 모양이 몹시 불쌍해보였다. 그들이 남쪽지방의 말씨를 쓰는것을 보아 다른 곳에서 데려온 처녀들 같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나까무라 스미에도 같은 내용의 증언을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히로시마현출신으로서 당시 웅기전기주식회사 전기기사로 근무하고있었는데 1938년 4월에 경흥군으로 옮겨가 살게 되였다.

나까무라 스미에는 어느날 판자로 높이 둘러막아 안을 들여다볼수 없게 만든 어느 한 건물앞에서 병사들이 줄지어 서있는것을 보았는데 병사들은 모두 각반을 풀어헤치고 서있었다, 이에 대해 어머니에게 물으니 음란한짓을 하는 곳이라고 대답하였다고 말하였다.

나까무라 스미에는 이곳 녀성들에 대한 성병검사를 위해 일본군 군의가 오군 하였다는데 대하여서도 증언하였다.

그는 이전부터 안면이 있는 일본군 군의가 집에 들린적이 있었는데 그는 성병검사를 하러 마을에 왔다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현지조사결과 나까무라 스미에가 기억하고있는 건물과 현지주민들이 말하고있는 건물이 하나의 《위안소》였다는것이 확증되였다.

3. 원정동《위안소》는 라남제19사단소속 일본군전용《위안소》

원정동《위안소》는 당시 경흥군에 주둔하고있던 라남제19사단소속 경흥국경수비대와 헌병대의 전용《위안소》로 세워져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하는 항일유격대에 대한 《토벌》에 동원되던 일본군 그리고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이곳을 통과하는 일본군에 복무한 군전용의 《위안소》였다.

그것은 우선 원정동《위안소》의 설치시기를 두고 말할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1937년 《국경수비대편제개정요강》에 의해 라남제19사단 76련대 국경수비대도 새롭게 개편되여 경흥군으로 그 본부를 옮기였다.

현지주민들도 《위안소》가 1937년이나 1938년경부터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일제의 중국대륙침략책동이 강화됨에 따라 수많은 일본군이 경흥군에 대기하거나 그곳을 통과하여 중국으로 들어갔으며 1938년에 있은 하싼호사건때에도 수천명의 일본군인들이 바로 이곳에 대기하고있다가 쏘련으로 나갔다.

원정동의 《위안소》가 군전용이였다는것은 이곳 주민구성을 두고서도 알수 있다.

《위안소》가 자리잡고있던 원정동은 당시 수십호의 농가밖에 없는 자그마한 농촌마을이였다.

이곳의 대다수는 경제적토대가 미약한 소작농이였고 그밖에 헌병대와 수비대가 주둔해있었을뿐이다.

경흥군인민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가에 대해서는 당시 발행된 《중앙일보》에 두만강연안 농민들의 생활상은 이루 말할수 없는 형편이다, 그중에서도 제일 혹심한 곳인 경흥군 로서면 증산동의 1,000여세대 주민들은 당장 먹을것이 없어 굶주리고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린것을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원정동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세끼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농민들을 상대로 상업적매춘을 목적으로 하는 유곽이 설치되였다고는 도저히 생각할수 없는것이다.

현지주민들도 한결같이 《위안소》에는 민간인들이 드나드는 일은 없고 일본군장교들과 병사들만 다녔다고 증언하였다.

다음으로 《위안소》의 내부형편과 녀성들의 처지를 보고서도 알수 있다.

《위안소》는 외부와 철저히 차단되여있었으며 녀성들은 거의 감금상태에 있었다.

아이들마저 접근시키지 않았다든가 녀성들이 람루한 옷을 걸치고있었고 마당을 벗어날수 없었던 상황은 그들이 다름아닌 일본군의 성노예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위안소》에 둘러친 높은 담장도 일본군인들이 드나드는것을 민간인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으며 이곳 녀성들이 남쪽말씨를 유지할수 있은것도 결국 일본군인들만 상대하면서 《위안소》에 갇혀있었기때문이다.

원정동《위안소》를 일본군전용《위안소》로 볼수 있는 가장 큰 근거는 일본군 군의의 정상적인 《검진》을 받았다는것이다.

군인들속에서 성병이 만연하는것을 막기 위하여 군의가 직접 녀성들에 대한 성병검사를 하는것은 오직 일본군《위안소》에서만 볼수 있는 일이였다.

이밖에도 라남제19사단소속 부대들이 주둔해있던 함경북도 청진시를 비롯한 각지에서 이미 일본군전용《위안소》들이 발견되고 피해자들이 나온 사실로부터 원정동《위안소》도 라남제19사단소속의 일본군전용《위안소》의 하나였다고 말할수 있다.

*     *

세월의 흐름속에 원정동의 《위안소》도 이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였다.

그러나 조선인민에게 저지른 일제의 만고죄악은 절대로 가리울수 없다.

일본반동들이 과거범죄를 흑막속에 영원히 묻어버리려고 온갖 비렬한 책동을 다하고있지만 력사는 조선녀성들을 강제련행, 랍치, 유괴하여 성노리개로 유린하다가 무참히 학살한 일제의 반인륜적범죄를 만천하에 낱낱이 폭로하고있다.

우리 인민은 일본의 과거청산에 관한 책임을 끝까지 따질것이며 조선민족이 일본에 의해 당한 모진 불행과 고통, 수치와 피해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천백배로 받아내고야말것이다.

주체107(2018)년 8월 14일

평 양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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