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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투지를 시위한 민족교육사수투쟁/오규상

 4.24교육투쟁 70돐에 즈음하여

오늘 우리는 김정은원수님의 탁월한 령도로 북남관계와 국제관계발전에서 획기적전환이 일어나고있는 벅찬 환경속에서 재일동포들의 민족교육을 사수하기 위한 투쟁에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4.24교육투쟁 70돐을 뜻깊게 맞이하고있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본반동정부는 미제의 사촉밑에 몇달전에 〈조선인학교페쇄령〉을 하달하고 조선인학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있습니다. 재일조선인학교들을 강제로 페쇄하려는것은 재일조선동포들의 애국활동을 억누르며 그들의 초보적인 민주주의적 자유와 권리를 란폭하게 유린하는 부당한 탄압행위입니다. 재일조선동포들은 일본반동정부와 미제의 조선인학교탄압행위에 견결히 맞서 용감히 투쟁하였으며 이 투쟁을 통하여 자기들의 높은 민족적기개와 불굴의 투지를 시위하였습니다. 조국인민들은 재일조선동포들의 열렬한 애국정신과 용감한 투쟁에 숭고한 경의를 표하고있습니다.》(《재일조선인운동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제1권, 7∼8페지)

주석님의 이 교시는 1948년 12월 23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재일조선인경축단에 주신 교시의 한 구절이다. 교시는 4.24투쟁이 벌어진 해 말에 주신것으로서 4.24교육투쟁의 원인, 재일동포들의 투쟁과 그 평가, 조국인민들의 심정까지 담겨진것으로 하여 4.24교육투쟁을 고찰하는데서 의거해야 할 확고한 지침으로 된다.

4.24교육투쟁이란

4.24교육투쟁이란 48년 1월부터 그해 5월경까지 재일동포들이 해방후로부터 시작한 초창기의 민족교육을 미일당국이 탄압하려고 책동한데 대하여 당시의 조련일군들과 동포, 학부모, 학생들이 벌린 민족교육을 사수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말할수 있다.

여기서 48년 1월부터라고 한것은 4.24교육투쟁의 직접적계기가 된 일본문부성학교교육국장의 《조선인설립학교의 취급에 대하여》라는 통첩(통달)이 나온 시기가 1월이기때문이다.

1948년 4월 24일 兵庫県庁주변에 수많은 동포들이 모여들었다.(《4.24교육투쟁 민족교육을 지킨 사람들의 기록》 61페지에서, 편저자 4.24를 기록하는 회)

이 투쟁이 언제까지인가 하는것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을수 있다. 4.24이후에 부당하게 체포되여 감옥살이를 한 사람들이 석방될 때까지를 념두에 둘수 있고 또 《제2차페쇄령》이라 하는 1949년 10월 19일의 조선인학교페쇄령집행까지를 포함하는 견해도 있을수 있다.

그런데 4.24교육투쟁이라고 할 때는 그해 5월 5일의 조선인교육대책위원회와 문부성과의 《각서》교환을 하나의 구획점으로 보는것이 좋을것이다. 49년 4월에는 4.24교육투쟁 1주년기념(중앙)대회를 4만 5,000명의 참가밑에 兵庫県湊川公園에서 개최한것을 보아도 5월경까지로 보는것이 타당할것이다.

4.24교육투쟁을 《한신(阪神)교육투쟁》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효고, 오사까지방에서 치렬하게 벌어진것과도 관련하여 그렇게 부르고있는것이고 틀린것은 아니다. 그러나 4.24교육투쟁이 이외의 지방들에서도 전개된것과도 관련하여 《4.24교육투쟁》이라고 명명하는것이 좋을것이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55년 9월 29일에 조국해방 10돐경축 재일조선인축하단과 하신 담화속에서 《4.24교육투쟁》이라고 하시면서 당시의 투쟁을 평가하시였다.

4.24교육투쟁의 직접적계기는 1월 24일에 나온 문부성학교교육국장의 통첩이였다. 그 주된 내용은 조선인자제라도 학령에 해당하는 사람은 일본사람과 같이 市町村立 또는 私立의 소학교 또는 중학교에 취학시켜야 한다, 학령어린이 또는 학령학생의 교육에 대해서는 각종학교의 설치는 인정할수 없다는것이다. 즉 조선인학령학생은 다 일본학교에 들어가라는것이며 조선인학생을 대상으로 한 각종학교설치는 안된다는것이다. 이것은 본질상 해방되여서 3년도 안되는 사이에 조선학교의 문을 닫으라는것이며 식민지노예교육의 계속이고 동화교육의 강요이다.

이 통첩은 조선의 영구강점을 노리고 일본을 아시아침략의 교두보로 만들려는 미일당국이 앞으로 창건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고 조련조직과 조선학교를 중심으로 단결하는 재일동포들의 력량을 막아보려는 음흉한 의도에서 나온것이다.

4.24교육투쟁의 전개

당시 조련조직과 재일동포들은 해방후 쌓아올린 자녀교육의 길을 《한장의 통첩》에 의하여 빼앗겨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각오로 학교페쇄를 반대하고 민족교육을 사수하는 투쟁에 한결같이 떨쳐나섰다.

조련중앙은 조련 제13차중앙위원회(1948년 1월), 2월 16일 조련중앙성명, 조련 제14차중앙위원회(1948년 4월) 등에서 민족교육의 자주권옹호의 립장을 견지하여 투쟁하도록 불러일으켰다. 특히 3월 23일에는 조선인교육대책위원회를 내오고 4월 18일에는 일본수상앞으로 4가지항목 즉 ①교육용어는 조선어로 한다 ②교과서는 조련교과서편찬위원회가 만든것을 사용한다 ③학교관리는 학교단위가 조직하는 관리조합이 한다 ④일본어는 정과(正課)로 취급한다는 요구를 내걸었다. 이것은 당시 투쟁에서 절대로 양보할수 없는 교육투쟁의 방향성이였다.

몇개 지방의 투쟁을 요약한다.

2월경부터 거의 모든 지방에서 학교를 페쇄하라는 당국의 지시가 있었고 조련과 동포, 학부모들이 당국과 교섭을 벌렸다.

1948년 3월 31일 山口県庁앞에서 진행된 조선인교육부당간섭반대인민대회(《2008在日朝鮮人歴史・人権週間》 47페지에서)

야마구찌현에서는 현당국이 3월 31일까지 학교페쇄를 명령하였는데 바로 31일에 조선인교육부당간섭반대인민대회를 개최하고 현당국과 교섭하는 한편 1만명이 넘는 동포들이 현청을 둘러싸서 24시간 철야투쟁을 벌린 결과 페쇄령을 일시 철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오까야마현에서는 4월 7일에 페쇄령이 나왔고 16일에는 조련 현본부위원장이 검속되였으나 19일 7,000여명의 인민대회를 가지고 대표들이 지사와 교섭한 끝에 페쇄령의 집행정지 등 3항목의 각서를 교환하였다.

효고현에서는 현, 시당국과 여러 차례 교섭하였으나 4월 10일 현지사가 페쇄를 통고하였고 15일에는 현청에서 요청투쟁을 벌리던 동포 73명을 검속(検束)하고 23일에는 고베시내 3학교를 경찰이 급습하여 2학교를 페쇄하였다. 24일 동포들의 투쟁은 절정에 이르러 지사실에서 담판한 결과 지사는 페쇄령을 철회하고 구속자를 석방한다고 문서로 확인하였다.

우리의 승리였다.

그런데 그날밤 11시 30분 고베기지사령관은 《비상사태선언》을 선포하고 조선사람잡이를 시작한다.

오사까부에서는 4월 12일에 19교의 페쇄를 통고하였다. 동포들은 이를 반대하여 23일 부청사앞의 오떼마에공원(大手前公園)에서 1만 5,000명규모의 군중대회를 가지고 현당국과 교섭하였으나 경찰당국은 179명을 검속하였다. 26일에는 4만명규모의 요청투쟁을 같은 공원에서 진행하고 부지사와 면담하였으나 결렬되였다. 군중들은 5분이내로 해산하라는 명령에 의해 하는수없이 해산하던 중에 당시 16살 김태일소년이 경찰이 의식적으로 쏜 총알로 희생되였다.

도꾜도에서는 4월 20일에 페쇄를 통고하고 23일에 도꾜군정부가 지시를 내렸으며 27일에 일본경찰당국이 교장과 관리조합일군 16명을 검거하였다. 그들은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벌렸다.

이렇게 각지에서 벌어진 투쟁에는 100만 3,000명이 참가하였으며 체포된 수는 3,076명, 희생자는 2명 그리고 군사위원회재판, 군사재판, 일본재판을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남조선에 강제송환된 동포도 있었다.(수자는 조련 5전대회문헌)

이러한 투쟁은 《각서》를 교환한것으로서 일단 수습되였다.

4.24정신과 전통의 계승을

4.24교육투쟁을 민족교육의 《원점》으로 보는것은 단적으로 말하여 잘못이다.

민족교육의 원점은 재일동포자녀들에게 우리 말과 글로 교육하여 조선의 훌륭한 아들딸로 교육교양하는것이다.

4.24의 정신은 이러한 민족교육을 탄압하려는 내외원쑤들의 탄압책동을 물리치고 민족교육의 마당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속에서 발휘된 당시의 일군들과 동포들, 학부모, 학생들속에서 형성된 정신적재부를 말한다.

4.24교육투쟁의 정신을 필자나름으로 3가지로 정리해보았다.

첫째로, 미일당국의 악랄한 탄압속에서도 우리 말과 글을 배우는 마당이며 민족성을 안겨주는 배움의 요람인 민족교육을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내겠다는 투쟁정신이다.

미군이 일본점령기간에 내린 유일한 비상사태선언이 민족교육을 지키려는 투쟁에 발포된 사실만을 놓고 보아도 민족교육을 사수하려는 동포들의 기개를 충분히 보여준다.

《이 자리에서 만족한 해결을 보기까지 싸우겠다.》고 끼니도 채우지 못하고 모포 한장 없는 속에서도 어린애를 가슴에 껴안고 철야투쟁을 벌린 야마구찌동포들의 투쟁모습은 당시 여러곳에서 있은 보편적현상이였다.

둘째로, 민족교육을 없애치우려고 탄압한 강대한 통치권자인 미점령군과 일본의 국가권력을 상대로 동포들이 하나로 되여 투쟁한 단결의 정신이다.

47년 10월현재 오사까거주동포수가 10만 3천여명이였다고 하는데 오떼마에공원에 모인 동포수가 1만 5천명 또는 4만명이라고 하면 얼마나 많은 동포들이 참가하였는가. 각지 동포들은 적수공권(徒手空拳)이였으나 단결을 무기로 투쟁에 떨쳐나선것이다.

셋째로, 무력으로 탄압하려는 원쑤들앞에서 민족교육을 사수하기 위하여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불굴의 정신이다.

효고현지사실에서 MP가 총을 겨냥했을 때 《쏠테면 쏘라.》, 《나를 죽이고 학교를 없애라.》는 웨침은 총을 가진 적들앞에서도 절대로 굴하지 않는 정신의 표현이다.

4.24교육투쟁 70돐을 맞이한 오늘 총련일군들과 동포들, 학부모들앞에는 4.24의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교육사업에서 새로운 전진을 이룩해야 할 영예로운 과업이 나서고있다. 그 어떤 어러움앞에서도 민족교육의 정당성과 생활력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걱정만 하는 《우국지사》격이 아니라 행동으로 민족교육발전을 위하여 헌신해나갈것이 요구되고있다.

(재일조선인력사연구소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