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련의 힘〉《우리 자랑 이만저만 아니라오》- 세대를 잇는 애창곡
2025년 08월 08일 08:13 총련노래는 대오앞에 나붓기는 전진의 기발
노래 《우리 자랑 이만저만 아니라오》의 가사가 씌여진것은 1964년 11월 25일이다. 총련결성 10돐을 앞두고 그동안의 사업성과를 김일성주석님께 보고드리기 위해 자료를 종합하던 한덕수의장의 뇌리에 문득 그 노래의 후렴구가 먼저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날 밤새워 가사를 다듬었다. 의장이 자신의 수기에서 밝힌 일화이다.
긍지를 담은 가사의 감화력
일본땅의 여기저기 우리 동포 사는곳에
자랑스런 총련조직 버젓하게 꾸려놓고…
그 노래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계기가 있다. 1965년 5월 총련결성 10돐을 축하하는 대집단체조 《조국에 드리는 노래》가 진행되고 이듬해 12월 대음악무용서사시 《조국의 해빛아래》가 상연되였다. 그 무대에서 《우리 자랑 이만저만 아니라오》의 노래와 춤이 펼쳐졌다.

대음악무용서사시의 무대에서《우리 자랑 이만저만 아니라오》의 노래가 울려펴졌다. (사진은 1967년 3월)
동포음악가 김학권씨(77살)는 당시 도꾜중고 고급부 3학년이였다. 합창단을 지도하는 선생의 보좌역을 수행하였다. 고급부 사범반을 졸업하고 우리 학교의 교원이 된 그는 좋은 스승을 만나 음악을 배워 작곡을 하게 되였다.
《젊었을 때 한덕수의장이 창작한 노래의 합평회에 참가한적이 있어요. 허남기선생, 남시우선생…쟁쟁한 분들이 모였었는데 가수가 피아노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 다음 가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저의 부족한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주셨지요.》
당시 활동한 총련일군들에 의하면 한덕수의장은 총련의 각급 기관을 지도하면서 일군들에게 우리 노래 몇곡을 부를수 있는가고 물어보군 하였다. 노래는 3절 가사까지 불러야 진정한 의미를 알수 있다는 조언도 주었다.
고급부 1학년 때 대음악무용서사시에 출연한 황씨는 조고졸업후 도꾜조선가무단 단원으로서 활동하였다. 그에게도 기억에 남는 회합이 있다.
《선전문화일군, 예술인들의 모임에서 〈우리 자랑 이만저만 아니라오〉의 가사를 광범한 동포들에게 알려나갈것이 강조된바 있어요. 그 자리에서 한덕수의장이 이 노래를 멋지게 부르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셨어요.》
동포동네에서 가무단공연을 하면서도 황씨는 그 《과업》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공연을 위해 총련도꾜 시브세지부의 어느 분회를 찾아간 기회에 자주 보던 박분회장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 자랑 이만저만 아니라오〉라는 노래를 아시나요?》
박분회장은 기대하던 대답을 해주었다.
《그 노래 참 잘 지었네. 난 부를수 있소. 음정은 자신없지만 가사는 머리속에 들어있거든.》
분회장은 총련중앙회관을 찾아가 강당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였다. 청중들속에 총련의장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분회장은 당황했지만 의장은 어서 노래를 불러보라고 재촉했다. 본인이 말했듯이 가사는 3절까지 완벽했다. 그런데 노래는 예상밖이였다. 악보에 씌여진 선률을 따르지 않고 마치 판소리처럼 노래하였다. 청중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데 의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였다고 한다. 강당에 그 후렴구가 울려퍼졌다.
수령님의 높은 교시 심장으로 받들고서
사업하는 우리자랑 이만저만 아니라오
박분회장에 동행하여 총련중앙회관에 갔던 황씨는 《가끔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고 한다.
《전문가도 아닌 분회장이 어떻게 가사를 하나도 틀리지 않고 노래를 부를수 있었을가. 아마도 총련사람된 긍지를 담은 가사가 수령님의 교시를 받들고 동포들을 위해 사업하는 분회장의 심금을 울린겁니다. 식민지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온갖 고생을 겪었던 1세동포들은 조국광복의 성업을 안아오신 수령님의 덕분으로 민족의 존엄을 되찾았고 수령님의 령도따라 총련이 결성되고 조직이 장성강화되는 과정에 흥겹게 부르는 노래가 태여났습니다.〈우리 자랑 이만저만 아니라오〉, 그건 곡절많은 인생행로를 걸어온 분회장의 심정토로나 같은것이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