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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련의 힘〉어둠속에서 광명을 찾은 녀성일군의 인생행로

2023년 12월 22일 06:35 총련

주석님의 령도를 받들고 동포녀성들과 힘을 합쳐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사진은 조국해방 15돐기념 교또조선인대회)

《수령님의 사상을 배우고 실천하는것이 삶의 보람》

《동포대중과의 사업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저희들에게는 손영희고문이 본보기가 되였습니다.》

녀성동맹 교또부본부 고문인 손영희씨(92 살)가 배워준 일본새에 대하여 17살 아래인 본부 고문 오정대씨(75살)는 한마디로 말한다.

《일군은 정책적대가 확고해야 자기 결심에 따라 책임적으로 일할수 있습니다.》

세러복차람으로 참가한 결성대회

손영희씨는 인생행로에서 만난 고비고비를 선명히 기억하고있다.

일제식민지시기 그의 부친은 혹가이도 유바리탄광에서 노예로동에 시달리다가 조국해방을 맞이하여 가족들과 함께 교또로 향하였다. 강원도 춘천출신인 부친은 마이즈루항에서 원산항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하였다.

《일본에 건너오기 전에 만주땅에서 노역살이를 한 아버지는 그곳에서 김일성장군님의 항일투쟁소식을  전해들었다고 합니다. 교또에 살게 되면서부터는 앞으로 귀국하면 장군님을 만나뵈울수도 있다는 희망을 저에게 이야기하군 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단된 조국땅의 현실을 보면서 가족들은 교또에 머물러 살게 되였다. 《조선말을 배워야 한다.》는 부친의 지시에 따라 손영희씨는 1946년부터 재일본조선인련맹(조련) 교또부본부 사무원으로 일하게 되였다. 당시 15살이였다. 창씨개명으로 《고야마 에미꼬》라고 불리우던 소녀는 조선이름을 되찾고 조련고등학원에서 민족의 말과 글을 배웠다.

이듬해의 10월, 도꾜로 함께 가자는 선배의 권유를 받아 따라나섰다. 입을 옷이 따로 없어 녀학생의  세라복차림으로 갔었는데 열기넘치는 회장에 도착하여 그것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임을 깨달았다. 그가 참가한것은 재일본조선민주녀성동맹 결성대회였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녀성해방>이라는 말은 몰랐고 녀성의 지위, 역할에 대하여  생각해본적도  없었는데 대회장 정면의 집행부자리에 남성은 없고 녀성들만이 앉아있는걸 보니 웬지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

그후 소녀는 《직업혁명가》라는 단어를 되뇌게 된다. 혁명가는 아는것이 많아야 한다며 《자나깨나 학습에 열중하는 나날》을 보냈다. 《조련고등학원에서 유물론, 변증법을 배우고 맑스-레닌주의서적도 읽었다.》고 한다.

손영희씨는 교또의 녀성동맹본부에서 일하다가 53년에 일터를 도꾜로 옮겨 녀성동맹중앙 조직부장으로서  활동하였다. 《김은순위원장(녀성동맹중앙 초대위원장)이 힘센 동포상공인들에게 녀성운동의 필요성을 력설하고 활동자금도 마련하는 모습을 수없이 보았다.》고 한다. 당시 녀성동맹도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의 로선을 따랐는데 일본각지의 운동을 고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나날에 각혈의 증상을 겪은 손영희씨는 54년부터 1년간 사업현장을 따나 료양생활을 보냈다. 그래서 민전의 로선상오유와 운동을 극좌모험주의적방법으로 벌린 후과에 대해서는 55년 5월에 총련이 결성된 다음에야 알게 되였다.

녀성동맹 일군들은 동포녀성들과 함께 총련애국사업의 한쪽수레바퀴를 떠밀고나갔다.

전설적영웅, 해방의 은인을 우러르며

《총련이 결성된 후, 수령님께서 재일조선인운동의 주체적로선전환방침을 밝혀주신데 대하여 알게 되여 그 내용을 깊이 학습했습니다. 수령님의 로작도 탐독했습니다. 제일 감동한것은 항일의 나날, 렬강들이 대립하고 싸우는 복잡한 국제환경속에서 수령님께서 주체사상을 창시하시여 조선혁명의 주인은 조선인민이라는 진리를 밝히신것입니다. 우리 운동에서도 주체를 세워야 한다, 동포대중을 주인으로 내세워 그 힘을 하나로 모으는것이 총련일군의 책무다, 이 진리를 깨달았을 때 나는 어둠속에서 광명을 찾은것처럼 기뻤습니다.》

손영희씨는 《열심히 배우고 열심이 일한다.》는것을 사업과 생활의 신조로 삼았다. 주체사상을 배워가니  《자기 지향을 동포들이 알아듣는 통속적인 말로 표현할수 있게 되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는것이 많아질수록 《수령님에 대한 흠모심》이 더해만 갔다.

《녀성의 권리에 대한 모독은 전체 인류사회와 인간에 대한 모독이요… <회상기>에서 소개된 수령님의 말씀이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동무들은 행복하다, 어깨에 총을 매고 남자들과 함께 투쟁의 길에 나섰으니 그 이상 보람있는 일이 또 어디 있소… 유격대 녀대원들에게 하신 말씀을 녀성동맹 일군인 저에게 보내주신 격려로 간직했습니다.》

총련은 김일성주석님의 로작들과 혁명력사를 일군들과 동포들이 따라배우도록 하였다.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는 1961년부터 일본에서도 증쇄, 보급되게 되였다. 《김일성선집》 제1권이 증쇄된것은 64년이다.

녀성동맹에서도 《재일본조선어머니대회》(62넌 3월), 녀맹분회열성자 제1차대회(63년 11월) 등을 계기로 《공화국의 녀성처럼 생활하자》는 구호를 들고 운동을 고조시켰다. 당시 교또부본부에서 사업하던  손영희씨는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동포녀성들을 운동에 망라시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주석님 탄생 60돐에 즈음하여 충성의 마음을 담아 《한 바늘 수놓기 운동》을 벌린 동포녀성들

《수령님은 말그대로 전설적영웅이시며 해방의 은인, 그이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애국운동을 벌리는것이 동포사회의 기풍이였습니다. 수령님 탄생 60돐(1972년)에 즈음하여 재일동포들의 <충성의 편지>, <충성의 기>를 전달하기 위한 자건거행진이 각지에서 진행되였는데 <충성의 기>는 동포녀성들이 <한 바늘 수놓기 운동>을 벌리며 마련한겁니다. 교또에서도 지부와 분회, 각 가정들에서 정성담아 기발에 수를 놓았습니다…》

《친정에 돌아간 딸》이 받아안은 배려

1977년 11월, 녀성동맹 교또부본부 위원장이였던 손영희씨는 생애의 결정적인 국면을 맞이하였다.   김일성주석님께서 녀성동맹결성 30돐에 즈음하여 조국을 방문한 재일조선녀성대표단을 접견해주시였다. 손영희씨는 대표단의 성원이였다.

《수령님께서는 일본에 사는 동포들에게 조선사람의 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느라고 수고했소, 고맙소라고  하시면서 자애로운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시는데 정말이지 감격에 목이 메여 어쩔줄 몰랐습니다.》

주석님께서는 녀성동맹 일군들을 친정에 돌아온 딸자식처럼 대하여주시고 온갖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대표단 단장인 녀성동맹중앙 박정현위원장에게 로력영웅칭호를, 단원들에게 국기훈장 제1급을 비롯한 국가수훈의 영예를 안겨주시였다.

조국체류기간에 대표단은 나라의 정사에도 참가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6기대의원선거, 그것도 주석님을 후보자로 모신 안주선거구에 나가 난생 처음으로 선거표를 손에 쥐고 충성의 한표를 바쳤다.

최고인민회의 제6기 제1차회의에서는 김일성주석님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하였다. 조국에 체류하는 총련의 대표단들도 회의에 참가하였다. 세러복차림으로 녀성동맹결성대회에 참가한 때로부터 30년, 의사당의 좌석에 앉은 손영희씨의 마음속에 일군으로서 체험한 갖가지 장면들이 떠올랐다.

최고인민회의 제6기 제1차회의에 참가한 손영희씨(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주석님을 국가주석으로 추대하는 연설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박정현위원장이 하였다.

《일찌기 조국을 잃은 슬픔을 안고 현해탄을 건넌 때로부터 수십년세월 이역땅 섬나라에 갇히워 가장 무권리한 수난자로 참을수 없는 멸시와 천대속에 눈물로 옷고름을 적시며 살아온 이름없는 한 녀성이 오늘은 위대한 수령님의 은덕으로 세상에서 가장 존엄있는 주체조선공민의 영예를 안고 꿈에도 바랄수 없었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고 공화국 로력영웅이 되여 이렇게 어버이수령님앞에 섰습니다…》

박정현위원장의 연설은 그 혼자만이 아닌 손영희씨를 포함한 대표단 성원들, 전체 녀성동맹 일군들의 심정을 대변하고있었다.

손영희씨는 《그때의 모든 일이 어제일처럼 생생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의 체험이 《일군으로서의 각오를  새로 다지는 계기점》이 되였다고 말한다.

《지난날 조선말을 못하고 아는것도 별로 없었던 한 소녀가 떳떳한 녀성동맹 일군이 되여 총련애국사업의 한쪽수레바퀴를 떠밀고나갈수 있게 이끌어주신 분은 우리 수령님이십니다. 수령님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수령님의 뜻대로 동포들과 사업하는것, 그것이 저에게는 삶의 보람이자 기쁨이였습니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조국을 방문한 대표단을 통해 녀성동맹앞에 나서는 과업을 제시하시였다. 손영희씨는 지난 시기보다 더 열심히 배우고 더 열심히 일했다. 《일군들에게 있어서 선생은 동포대중이다》,《총련은 사상교양단체이지 행정기관이 아니다》,《사람과의 사업, 일군과 동포사이에 오가는 정이 기본이다》… 수령의 사상을 실천하는 녀성일군의 사업현장에는 언제나 원칙적이며 정책적대가 선 언사들이 오고갔다.

녀성동맹본부 위원장으로서 그렇게 일했다. 고문이 된 다음에도 일본새는 같았다. 그의 뒤모습을 보며 수많은 후대일군들이 자랐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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