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련의 힘〉모든 희생 무릅쓰고 일하는 청춘의 랑만
2024년 02월 21일 07:31 총련《동네가 우리 집》, 조청반에서 자라난 일군들
《운동의 앙양기에 조청일군이 되였습니다. 마침 재일동포들의 조국왕래실현을 요구하는 오사까-도꾜간 도보행진이 한창일 때인데 내가 배치된 조청지부에 전임일군이 10명가량 있었던걸로 기억합니다.》
1964년 4월 김대영씨(77살)는 조청도꾜 아라까와지부에 전임일군으로 배치되였다. 그는 도꾜중고를 졸업하였는데 지부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대다수는 일본학교를 나왔다. 전임일군이 되기 전에는 땀흘려 일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로동청년들이였다.
로동청년들과 전임일군의 일과
아라까와는 동포들이 밀집되여 거주하는 지역이다.
《동네의 청년들을 묶어세워 활동하는 조청반이 10개는 넘었을것입니다. 운동의 주력은 일교출신의 로동청년들, 나보다 나이많은 형, 누나들이였지요. 》
민족교육을 받지 못한 조청원들은 조선말과 글을 배우기 위해 지부에서 운영하는 청년학교를 다녔다. 특히 동네의 청년들을 교양하고 이끌어나가야 할 조청반 역원들은 자신의 민족적소양을 높이기 위해 열심히 배웠다. 김대영씨도 조청지부에 배치되자마자 청년학교의 강사를 맡았다.
《내가 강사를 맡은 미까와시마반에서는 한개 반에 수십명의 청년들이 망라되였고 대여섯명의 역원들이 각기 수완을 발휘하여 그들을 각종 활동에 동원했습니다. 당시로 말하면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대회나 집회가 벌어지던 시기인데 열기띤 투쟁현장에서 성토하고 구호를 부르면 정치정세에 우둔했던 청년들도 저절로 각성되는 법이지요.》
조청반 역원들도 대다수가 로동청년들이여서 대상과의 사업에서 어려운 론리를 내세우지 않았다. 조청활동에 참가할것을 처음으로 권유할 때에는 《너는 조선사람이니 당연히 참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처럼 소박하고 솔직한 호소에 호응하는 청년들이 있었고 그것이 당시의 동네풍경이였다.
《낮에는 로동을 하고 저녁에는 조청활동에 자신을 바치는 역원들은 청년들속에서 존대받는 존재였지요. 나도 자기 마음이 시키는대로 자발적으로 창의적으로 일하는 형, 누나들의 모습에서 많은것들을 배웠습니다.》
김대영씨는 일교출신청년들의 심정이 리해되였다. 일본 중학교에서 배우다가 고급부진학을 준비하는 과정에 민족차별을 당한 그는 홀로 도꼬중고를 찾아가 입학원서를 받았다. 조고생이 되여 참가한 대회나 집회에서 조선청년의 기개를 떨치며 정열에 넘쳐 성토하는 조청일군들의 모습이 너무 멋있었고 부럽기만 하였다.
조고졸업후 전임일군이 된 김대영씨는 로동청년들과 달리 낮과 밤 가림없이 조청활동에 전념하였다. 조직에서 보장되는 생활비가 넉넉치 못해 미까와시마에 위치한 아빠트의 자그마한 방에서 동료들과 동거생활을 하였다.
《돈이 없어도 상관없어요. 동네가 우리 집이였으니까. 신발이나 가방의 제조, 옷만들기나 무두질…가네수공업을 하던 동포들이 많았지요. 모두 1세들인데 우리가 가면 돌봐주었습니다. 동포의 자식들이 조청원이라서 동원사업을 위해 집을 찾아가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이 곧 동포가 작업하는 일터이지요. 우리는 먼저 집주인의 일손부터 도와드립니다. 그러면서 식사도 대접받고… 전임일군인 우리는 아침 잠에서 깨여나면 오늘은 어느 동무의 집을 찾아갈가, 그 작전부터 세웠지요. 당시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면 활동을 못했습니다. 조청반에서 꼭꼭 학습한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의 한대목을 실천한셈이지요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수 없는것처럼 유격대가 인민을 떠나서 살수 없다.> 조청전임일군이 바로 그랬습니다.》
《보람이란 사상정신으로 간직되는것》
미까와시마에 살았던 량창홍씨(83살)는 1965년 5월부터 7월까지 청년학교에서 배웠다. 계기는 옷만드는 일을 하던 부친이 세상을 떠나 생활고에 시달린 그의 가족들이 조국에로의 귀국을 검토한것이였다.
《3개월간 배운것만으로는 우리 말을 제대로 할수 없지요. 그러나 청년학교를 다니고 <내가 조선사람이 됐다.>는 충족감은 생겼습니다.》
일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회사에서 일하던 량창홍씨는 24살에 청년학교를 다니게 될 때까지 《조선과 인연이 없는 생활》을 누리고있었다.
《청년학교의 수업이 끝난 다음에 조청반동무들은 제각기 활동을 시작하는데 처음 보는 광경이여서 많은 자극을 받았어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청년들의 집을 찾아가 행사동원도 하고…회사원인 나와 별반 다름없는 환경, 조건인데 그들의 모습은 비할바없이 정력적이였습니다. 》
조청원들에게 이끌리여 그들의 활동에 참여하게 된 량창홍씨는 청년학교를 졸업한 후 조청반의 역원이 되였다. 청년들의 존대를 받는 역원으로서의 사명감을 지니고 활동하면서 조청운동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다. 다른 역원들은 주에 한두번 활동하는데 량창홍씨는 《거의 매일 조청원들을 만나 뭔가 일감을 찾아하면서 보람을 느끼고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조국과 수령, 재일조선인의 력사에 관한 서적들을 탐독하였다. 가족들은 귀국하지 않았고 동네에서의 생활이 계속되였다. 67년 7월 부터 두달간 총련간또학원에서 강습을 받은 량창홍씨는 조청전임일군으로 나설 결심을 하였다.
《전임일군이 되면 일년내내 쉬임없이 일하게 되고 경제생활은 어렵다, 그런것쯤은 응당한것으로 여겼지요. 그때까지 맏아들인 내가 회사원으로서 일하면서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부양했는데 전임일군이 되면 그렇게 하지 못하니 가족회의를 열어 대안을 론의했습니다. 옷만드는 기술을 배운 동생이 가족들의 살림을 안받침하겠다고 나서주었습니다. 어머니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니 조청활동에 몸담은 맏아들이 먼저 변하고 가족들도 그 영향을 받은겁니다. 누구보다도 정력적으로 일하는 조청반 역원이 전임일군으로 나서는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여겼습니다.》
조청운동의 현장에서 전임일군이 배출되고 그 일군이 다시 새로운 운동을 일으켰다. 량창홍씨도 낮과 밤 가림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청년들을 만났다. 전임일군으로서 《인민을 떠나 살수 없는 유격대》처럼 살았다.
조청아라까와지부를 출발점으로 하여 량창홍씨는 50여년간 전임일군으로서 활동하였다.
《일본사회에 파묻혀 살면서 민족허무주의에 빠졌던 청년이 조청을 만나 되살아난거지요. 보람이란 돈이 아니라 사상정신으로 간직되는것입니다. 힘든 일, 어려운 일이 있어도 조국을 위해, 동포들을 위해 일하고있다는 실감만 있으면 견디여낼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변치 않은 우리 동무들》
그렇게 일하는 청년들이 일본의 방방곡곡 동포사는 곳마다에 있었다. 젊음에 넘쳐 약동하고 비약하는 조청원들이 총련의 60년대 앙양기에 시대를 선도하고 떳떳이 일하였다.
김대영씨가 조청지부에 배치된 해에 미까와시마에서 큰 화재가 있었다. 철도역 주변에 30~40호의 동포들이 밀집되여 사는 구역, 일명 《아빠치부락》의 살림집들이 소실되였다.
거처를 잃은 동포들이 손 맞잡고 눈물을 흘리는데 100명을 넘는 청년들이 그곳으로 달려왔다. 불탄 건물 잔해를 치우고 비바람을 막을수 있는 판자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작업은 낮과 밤을 이어 계속되였다. 청년들이 조를 뭇고 교대로 일하였다.
《그때 조청원들에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힘, 우리는 그런 힘을 갖고있다는 자부라 할가, 앙양된 기세가 있었지요. 함께 배우고 투쟁하며 조국청년들처럼 혁명의 노래, 건설의 노래를 불러 마음을 합친 청춘시절의 체험은 세월이 흘러도 잊을수 없는겁니다.》
지금도 김대영씨의 수첩에는 량창홍씨를 비롯하여 조청운동을 함께 한 수많은 《동무》들의 련락처가 적혀있다. 조청반의 역원을 거처 아라까와지부의 린근에 위치한 도꾜조선제1초중의 뻐스운전수가 된 신동무, 일본대학에 다니면서도 아침 6시에 시작되는 조청반의 《회상기》학습에 꼭꼭 참가하여 대학졸업후 민족금융기관에서 일하게 된 홍동무, 《아빠치부락》에서 살며 화재발생후에 판자집짓기의 열기를 온몸으로 느끼던 리동무…
김대영씨는 일흔살을 넘은 오늘도 도꾜도내에서 《동무》들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변함없는 마음속을 들여다 본다고 한다.
《청춘이란 조국을 위해, 동포조직을 위해 바치는 시절, 누구나가 그런 지향을 가졌지요. 내가 만난 동무들은 모두 한눈 팔지 말고 조청운동에 정열을 쏟아부은 우리 청춘 후회없다고 긍지높이 돌아볼겁니다.》
(김지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