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련의 힘〉일본의 수도 한복판에 펼쳐진 대집단체조의 장엄한 화폭
2023년 05월 26일 07:28 총련김정은원수님께서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제25차 전체대회 참가자들에게 보내주신 서한 《각계각층 동포군중의 무궁한 힘으로 총련부흥의 새시대를 열어나가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습니다.
《동포들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헌신, 일군들과 동포들사이에 오고가는 따뜻한 정이 곧 총련의 힘입니다.》
강령적 5.28 서한 접수 1돐을 맞으며 총련의 자랑찬 애족애국의 로정을 일군들과 동포들의 체험과 증언에 기초하여 더듬어보는 련재기획 《총련의 힘》을 시작합니다.
《우리 힘을 모아 싸우면 못해낼 일이 있겠는가》
1965년 5월 28일, 도꾜고마자와륙상경기장에서 총련결성 10돐을 축하하는 대집단체조 《조국에 드리는 노래》가 진행되였다. 8천여명의 학생들이 출연한 대집단체조를 일본 각지에서 모여온 3만여명의 동포들이 관람하였다. 당시 《조선신보》는 관람자들이 《그야말로 가슴이 북받쳐오르는 벅찬 감격과 감동의 도나가속에서 한시간 반을 보냈다.》며 현장의 열기띤 분위기를 전하였다.
운동장에 울려퍼진 《힘! 기백! 절도!》
도꾜조선중고급학교를 졸업한 리대래씨(83살)는 일본체육대학에서 배우고나서 오사까조고에 체육교원으로 부임했다가 2년후 모교에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였다. 그때가 바로 1965년 4월, 당장 제기된 첫 사업이 대집단체조에 출연하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이였다.
《남학생들의 곤봉체조를 담당했는데 처음 해보는 일이며 시간도 촉박했습니다. 말그대로 돌격전, 강행군을 벌렸지요.》
체육대학에서 배워 유럽에서 시작된 《매스게임》에 대한 표상도 있었지만 실지로 체조대형의 일치성, 조화성을 보장하는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고 리대래씨는 말한다.
《한 장면에 출연하는 체조대는 가로 36렬, 세로 30렬로서 총 1,080명. 조국에서 보내준 대형변화표와 훈련하는 학생들이 모습을 번갈아 보면서 갈등속에 분발하는 나날이였습니다.》
신길웅씨(74살)는 1965년 4월 이곳 학교 고급부에 입학하였다. 운동장에서 진행된 입학식에서 학교장이 하던 축하인사는 기억에 나지 않지만 식전이 끝난 후 어느 교원이 신입생들을 모아놓고 하던 말은 뇌리에 새겨져있다.
《<동무들, 래일부터 체육복을 가지고 학교에 와야 합니다.> 처음엔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요. 대집단체조를 한다고 하는데 어릴 때 조국의 기록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잠간 보았을뿐 학생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제대로 리해하지 못한채 훈련에 참가했습니다.》
1958년부터 도꾜중고에서 체육교원으로 일하던 송혜숙씨(86살)는 녀학생들에게 민족무용도 가르쳤다. 그래서 자기자신이 먼저 기술전습을 단단히 받고나서 대형변화표에서 지정된 움직임을 실현하는 작업에 달라붙었다. 대집단체조에서는 녀학생들이 출연하는 서막과 종막, 부채춤, 농악과 같은 무용부분을 맡았다.
4월에 새 학년도가 시작되여 총련결성기념일인 5월 25일까지는 두달도 남지 않았다. 송혜숙씨에 의하면 《짧은 기간에 장면을 완성시킬수 있었던 비결은 깐깐한 조직사업》이였다.
《교원이 1천여명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지도할수는 없습니다. 한 장면에 출연하는 학생들이 <대대>, <중대>,<소대>의 단위로 나뉘여지는데 교원들은 소대장들에 대한 기술전습만을 하고 그 다음에는 소대장이 자기 단위의 20명에게 기술을 배워줍니다. 소대마다 기술을 습득한데 기초하여 대형변화표에 따라 전체훈련을 진행하였습니다.》
당시 도꾜중고 운동장에는 직경 수센치메터의 플라스틱제 《포인트》가 1,080개 놓여있었다. 대형변화를 훈련하는 학생들속에서 《자기 포인트를 지키자.》는 표어가 등장하였다.
리대래씨도 그 광경을 기억한다. 《누가 먼저 말했는지, 학생들이 <힘!기백!절도!>라는 구호를 불렀는데 교원들도 그러한 관점에서 지도했습니다. 다리를 90도 각도로 올리는 행진을 비롯하여 동작의 완성도를 서로 경쟁시키면서 학생들의 단결력을 키워나갔습니다.》
동네의 동포들도 한덩어리가 되여
조선의 집단체조는 김일성주석님께서 1930년 초기혁명활동시기에 카륜의 진명학교에서 창작공연하도록 하신 꽃체조 《조선의 자랑》에 시원을 두고있다. 전체 인민이 대동단결하여 조선의 독립을 이룩하자는것을 주제로 한 작품이였다.
1947년에는 해방된 조국땅에서 집단체조 《김일성장군 만세!》가 진행되였다. 예술성과 사상성이 곁들여진 조선의 집단체조의 특징은 체조대와 배경대의 배합이다. 작품의 주제를 부각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는 배경대가 처음으로 도입된것은 1955년에 진행된 《해방의 노래》로서 세계적으로도 류례없는 일이였다.
그 10년후 일본에서 대집단체조를 위해 꾸려진 창작집단에는 체조대, 배경대, 음악대 그리고 출연자들을 안받침하는 기자재의 공급부 등이 있었다.
대집단체조에는 도꾜와 간또의 초, 중, 고급학교 학생들과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출연하였다. 각 학교들에서 동작과 대형변화를 훈련하고 나중에 한자리에 모여 종합하는 방법을 취했다. 수업을 보장하면서 훈련이 조직되였는데 강도와 밀도가 높았다. 학생들을 위해 점심과 빵, 우유, 바나나 등 간식이 보장되고 공동훈련을 위해 어린 학생들이 뻐스로 이동할 때면 신변보호를 위한 인원이 동원되였다. 숱한 비용이 들었는데 동포상공인들이 이바지하였다. 그때까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방대한 사업이였다. 송혜숙씨의 표현을 빌리면 《모두가 무아지경으로 자기 맡은 일에서 책임을 다했다.》고 한다.
배경대는 초급부 3학년부터 중급부 3학년까지 약 4,000명의 학생들이 맡았다. 초급부 4학년시절에 일교생들을 위한 하기학교에 참가한것이 계기가 되여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꾜조선제1초중급학교에 편입한 신길웅씨는 《고급부에 진학하기 전에 모교에 들리여 배경책의 제작현장을 목격》하였다. 《전투장이나 같았다.》고 한다.
학생들이 펼쳐보인 배경책은 기성품이 아니라 전부 손수 만들었다. 신문지에 풀을 바르고 색종이를 붙이고 그것들을 받침대로 엮어서 책처럼 만들었다. 도꾜제1초중에서는 약 1,000명의 학생들이 배경대에 동원되였다. 큰 가마에서 찹쌀밥을 물로 끓이고 풀을 만들어 그 다음 작업부터는 인해전술에 의거했다. 학생, 교원들만으로 일손이 모자라면 학교주변에 거주하는 학부모들이 도와나섰다. 신문지와 색종이를 나르는 어린것들도 풀투성이가 되였다.
대집단체조의 성공을 위해 헌신한것은 학생들의 부모와 가족들만이 아니였다. 무용부분의 녀학생들이 입었던 치마저고리를 비롯한 의상은 녀성동맹의 일군들, 지역의 동포녀성들이 분담하여 제작하였다. 《자기 딸은 출연하지 않는다고 남의 일처럼 여기는 어머니는 없었다.》고 송혜숙씨는 회고한다.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땀을 흘릴 때 동네의 동포들도 한덩어리가 되였습니다.》
감동의 도가니속에서 보낸 시간
대집단체조가 진행된 고마자와륙상경기장은 1964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개최되는 올림픽경기대회를 위해 건설된 시설이다.
동서랭전이 심화되고있던 시기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도꾜올림픽의 13개종목에서 출전권을 획득하여 선수단을 일본에 파견했으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주로 사회주의국가와 신흥독립국들이 참가한 국제체육경기대회(GANEFO 가네포)를 불인정하고 그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올림픽에 참가할수 없도록 조치를 취했다. 조선선수단은 이에 항의하여 도꾜올림픽의 개회식전날에 불참을 선언하고 귀국하였다.
체육의 령역에서 드러난 균렬의 배경에는 첨예화되는 세계의 정치, 경제 및 군사적 대결구도가 있었다. 동서랭전은 또한 동포들의 삶에도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있었다. 당시 미국의 사촉하에 재일조선인사회에 분단과 대결을 강요하게 될 《한일회담》이 추진되고있었다.
대집단체조가 창작된것은 도꾜올림픽이 끝난지 수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였다. 각 학교들에서 동작과 대형변화를 익힌 학생들이 올림픽개회식이 진행된 도꾜 요요기의 국립경기장에 모여 관통련습을 진행하였다.
송혜숙씨는 《기적을 보았다.》고 한다.
《교원들은 자기가 맡은 부분만 알고 전체상을 몰랐습니다. 상상도 못했지요. 그런데 학생들이 고운 의상을 입고 음악이 흐르고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는걸 보니… 정말 놀랐고 눈물이 났습니다.》
신길웅씨도 처음보는 화폭,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4,000명 배경대의 박력에 압도되였다.
《<바좟!>,<바좟!>-장면이 바뀔 때마다 배경책을 힘차게 펼치는 소리가 경기장을 진감했습니다. 어린 동생들이 저렇게 잘하는데 우리도 본때를 보여야지, 모두가 다짐했지요.》
총련결성 10돐을 맞이한 5월 25일은 비가 와서 학교에서 《연기》통지를 받은 학생들은 경기장으로 가지 않았다.
5월 28일, 혹가이도에서 규슈까지 일본각지 총련조직이 있는 곳마다에서 동포들이 뻐스와 전차로 밤을 새여가며 고마자와륙상경기장으로 달려왔다. 관람석은 3만여명의 관중들로 꽉 메워졌다.
오후 2시 정각, 류창한 나팔소리가 도꾜하늘에 울려펴졌다.
《바좟!》
빈틈없이 들어찬 배경대에 《김일성원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라는 붉은 글발이 아로새겨졌다.
누구나 다 처음 보는 광경이였다. 관중들은 숨이 막히는것 같이 경탄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줄 모르고 손바닥이 절로 박수를 쳤다. 웬일인지 눈시울이 뜨끔해지더니 주루룩 뜨거운것이 떨어져내렸다.
장중한 서곡과 함께 배경대에 《경축 총련결성 10주년》의 글발이 나타난 다음 붉은 막 일색으로 배경이 변하고 그 막이 서서히 열리면서 대집단체조의 제목이 나타났다.
《조국에 드리는 노래》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가 터져올랐다. 경기장은 감격과 감동의 도가니로 화하였다.
제1장 《번영하는 우리 조국》에서는 나라를 되찾기 위한 김일성장군의 항일투쟁사와 광복의 환희, 천리마의 기상으로 나래치는 사회주의조국의 위용이 형상되였다. 제2장 《공화국기치 따라》에서는 총련의 애족애국사업과 《조국으로의 왕래의 자유를 실현하자》 등 재일동포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를 글로 박은 구호들이 배경대에 등장하였다. 제3장에서는 《조선은 하나이다》,《한일회담 반대》,《미제는 남조선에서 나가라!》 그리고 제4장에서는 《조일인민 친선》의 글발이 나타났다.
커다란 감동은 단지 대집단체조의 규모에 놀라서 그런것이 아니였다. 관중들은 그 화폭이 그려내는 정신, 배경대에 새겨진 글발에다가 자신의 심정을 겹쳐보고있었다.
단결의 기운, 운동의 전성기
당시 3남매를 키우던 동포녀성이 자식들이 출연한 대집단체조를 보고 투고한 글이 《조선신보》에 실렸다.
그 배경대속에, 그 체조대속에 우리 집 아이들도 섞여있다는 자랑찬 생각은 아이를 길려 받은 감격이라고 하면서 어머니는 이렇게 썼다.
《어린것들이 단결하면 이다지도 놀랍고도 놀라운 화폭을 전개하거늘 어찌 우리 있는 힘을 모아 싸우면 못해낼 일이 있겠는가.》
맹훈련의 나날이 결실을 맺었다. 3만여명의 뜨거운 시선을 온몸으로 감수한 학생들의 가슴가슴에 형언할수 없는 환희, 한없는 긍지감이 부풀어올랐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다던 신길웅씨도 경기장에서 관중들의 박수와 환호에 휩싸여 《자기들이 큰 일을 했다.》는것을 실감하였다. 조선학교에로의 편입을 반대하던 부친도 대집단체조를 보고나서는 《우리 학교, 우리 학생들이 대단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리대래씨는 20대 교원시절에 대집단체조창작에 참가하여 《수령의 위대성, 조국의 힘, 총련의 힘을 실감하였다.》고 한다.
아직은 조국왕래가 실현되지 않았던 시기에 총련은 《조국을 향하여 배우자!》는 구호 그대로 일본땅에서 처음으로 그것도 훌륭하게 대집단체조의 화폭을 펼쳐보였다. 《힘》을 느낀것은 체조대, 배경대에 속한 학생, 교원들뿐만이 아니였다. 현장에서 함께 땀을 흘린 체육인과 예술인, 의료인들, 처음으로 해보는 방대한 사업에 물심량면으로 이바지한 일군들과 동포상공인들… 그 화폭을 위해 숱한 관계자들이 일하고 부모들도 애를 쓰며 동네동포들이 한덩어리가 되였다. 3만여명의 관중들이 감동을 함께 나누었다. 대집단체조는 일본각지에서 애족애국하는 동포들의 힘, 총련의 잠재력을 가시화하여 보란듯이 발휘하는 일대정치축전이였다.
무슨 실리를 따지고 타산부터 앞세운다면 수많은 인원이 동원되고 막대한 자금을 요하는 사업이란 실현될수 없었을것이다.
김일성주석님의 로선전환방침을 받들고 총련이 결성된지 10년. 총련중앙지도부는 조국과 조직의 두리에 동포들을 대동단결시키는것을 무엇보다 중시하고 거기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대집단체조의 성공으로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랭전대결의 시대, 《한일조약》체결(1965년 6월)로 새로운 차별과 탄압이 감행되는 엄혹한 정세하에서도 총련의 힘을 간직한 동포들은 조국의 통일과 일본에서의 민주주의적민족권리획득을 위해 보다 과감하게 싸웠다. 일본당국의 《한국》국적강요책동을 단호히 물리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해외공민된 영예를 떨치였다. 대집단체조의 성공으로 그 정당성과 생활력이 뚜렷이 과시된 총련의 민족교육을 지키는 투쟁이 전 조직적, 전 동포적으로 전개되여 동화교육을 강요하는 《외국인학교법안》을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재일조선인운동의 전성기, 송혜숙씨는 그 한복판에 섰던 남다른 긍지를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도 가슴에 안고있다.
《우리는 정의롭고 강하다.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대집단체조창작에 참가하여 그것을 증명해보일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이보다 더 행복한 인생이란 없습니다.》
(김지영기자)
련재 《총련의 힘》에서 취급할 동포사회의 사변과 일화들, 증언과 자료들을 모집합니다. 기자가 현장을 찾아 당사자, 관계자들을 취재합니다. 조선신보사 편집국 03 (6820) 0103 E메일 sinbo@korea-np.co.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