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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엽의 내외정세와 총련의 활동

2023년 05월 26일 07:27 총련

《한일회담》반대

총련은 결성대회당시부터 《한일회담》분쇄를 방침화하고 견결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일회담》은 미, 일, 남조선의 군사적일체화를 다그치고 남조선을 미국과 일본의 2중의 식민지로 전락시키며  조선의 분단을 영구화하려는데 목적을 둔 담판이였다. 그리고 이를 반대하는 투쟁은 공화국주권에 도전하여 조국의 영구분렬을 노리는 그 어떤 모의도 허용하지 않으며 조국의 존엄과 재일동포들의 자주권을 지켜나가려는 애국적투쟁이였다. 총련은 1964년 한해만 하여도 《한일회담》을 배격하는 대소군중집회를 연 8,600회 조직하였다.

1964년 4월 1일부 《조선신보》

 조국왕래의 실현을

총련은 1963년부터 조국왕래의 자유, 해외려행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대중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본 각지에서 서명운동과 통일요청행동, 대소군중집회, 출판물배포활동이 벌어졌다. 1964년 3월부터 4월사이에는 《재일조선인조국왕래요청단》의 오사까-도꾜간 도보행진이 진행되여 여기에 5만1,000여명의 동포들이 참가하였다.

1964년 4월 9일부 《조선신보》

 조선학교탄압을 배격

《한일조약》이 체결되자 일본당국은 문부성차관통달(1965년 12월 28일)을 내놓고 조선학교를 사립학교로서도, 각종 학교로서도 인가히지 않을데 대하여 지시하였다. 1967년 3월에는 《외국인학교법안》을 국회에 상정시키려 하였다. 총련은 이를 사실상 《재일조선인학교탄압법안》으로 보고 반대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67년 3월부터 약 1년동안에 중앙과 지방에서 벌어진 항의요청운동에  연 14만명의 동포들이 참가하였다. 총련의 투쟁과 내외여론의 지탄으로 《외국인학교법안》은 1974년까지 7번이나 페안되였다.

《조선신보》 1967년 3월 15일부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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