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의 흔적을 찾아서/히로시마
2022년 08월 16일 13:00 력사아무리 부정해도 사라지지 않는 력사의 흔적들이 지금도 일본각지에 남아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지배의 력사, 조선반도와 일본의 인연이 깃들어있는 곳들을 소개한다.
침략전쟁의 출발점/広島大本営跡
미군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투하된지 77년이 지났다. 전쟁 피해지로 널리 알려진 히로시마는 과거 침략의 거점인 《軍都》로 기능하였다. 그 흔적은 오늘도 이곳에 남아있다.
히로시마시 紙屋町西역에서 약15분 걸으면 웅장하게 일떠선 広島城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시기 이 일대에는 大本営을 비롯한 일본의 군사시설이 밀집되였었다.
大本営은 전쟁당시 일본의 최고의사결정기관으로 일본천황이 머물러 지시를 내리던 곳이다.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4년 9월 일본정부는 당초 도꾜에 두었던 大本営을 히로시마로 옮겼다. 히로시마에는 큰 배를 리용할수 있는 宇品港(현재 広島港)이 있어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서 적합하였기때문이다. 大本営이 설치된 이후 주변에는 수많은 군사시설이 잇달아 설립되여 히로시마는 《림시수도》가 되였다.
広島大本営은 広島城 바로 앞에 위치하였다. 과거 明治천황, 伊藤博文 등이 전쟁을 직접 지휘한 이곳은 大本営해산후에도 로일전쟁과 제1차세계대전, 중일전쟁, 제2차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을 출병시키는 거점이 되였다. 히로시마는 오랜 기간 침략과 전쟁의 상징으로 된 도시였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히로시마에서 1년간 기능한 大本営은 그후 《력사유적》으로 그 모습을 남겨왔으나 원자폭탄이 투하됨으로써 건물은 모두 파괴되여 초석만이 남았다. 넓은 면적에 깔린 초석에서는 당시 大本営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수 있다.
전쟁책임을 미화/広島護国神社
大本営유적지 근처에는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하나의 신사가 있다. 広島護国神社이다.
일본의 명절마다 참배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곳은 제2차세계대전에 이르는 일본의 침략전쟁에서 사망한 9만 2천여명의 군인들이 《호국영령》으로 《안치》되여있다. 신사내 일각에는 그를 찬양한 기념비가 세워져있으며 매년 8월 15일에는 《영령감사제》가 열린다. 침략자들을 《영령》 으로 모시는 이곳에는 전쟁가해자들을 미화하고 영웅시하는 일본의 군국주의사상이 반영되고있었다.
그밖에도 広島城부근에는 일본 륙군간부의 양성기관으로 1897년에 개교한 《広島陸軍幼年学校》유적이며 청일전쟁시 평양을 침략한 《歩兵第十一連隊》유적이 있다. 어느 해설판에도 자기 나라의 침략행위를 《위업》으로 묘사하고 후세에 전하기 위한 기술이 있다.
피폭지이면서도 전쟁가해자들의 력사가 깃들어있는 땅. 히로시마초중고 고급부 학생들은 군사시설의 흔적이 짙은 이곳에서 매년 력사실습을 진행하여 침략거점이 된 히로시마의 가해책임을 학습하고있다.
(김사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