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실책 / 미국이 자초한 안보위기 ③> 《달리는 기차》에 대한 무위와 태만
2021년 09월 12일 08:16 공화국 대외・국제 조국・정세6자회담의 중단기간에 진행된 핵시험
조선이 외무성 성명을 통해 핵무기보유를 선언한것은 2005년 2월 10일이다. 2003년 9월 4일 나라의 립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에서 핵의 군사적리용이 결정된 때로부터 17개월후의 사변이다. 그 사이에 미국이 조선의 핵활동을 동결하는 기회와 명분은 충분히 있었다.
풀루토니움생산을 외면
핵무기보유선언의 1년전인 2004년 1월 6일부터 10일까지 미국 스탠포드종합대학 죤 루이스교수와 로스 알라모스국립핵연구소 지그프리드 핵커 이전 소장이 조선을 방문하고 녕변핵시설을 특례적으로 돌아보았다. 조선측의 초청에 의한것이였다. 일행은 페연료봉의 재처리로 핵무기제조의 재료로 되는 풀루토니움이 생산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선측은 《우리의 핵활동에 대한 투명성을 보장하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밝히고 《투명성은 현실적인 사고를 위한 기초》이며 《조미사이의 핵문제의 평화적해결을 위한 실제적기초가 될것이라고 간주한다.》(외무성 대변인)고 하였다. 민간인들이 목격한 사실을 부쉬행정부가 어떻게 간주할것인가를 지켜보겠다는것이 당시 조선의 립장이였다.
그해 2월 25일부터 28일까지 베이징에서 제2차 6자회담이 열렸다. 조선은 핵문제의 평화적해결을 위한 일괄타결방식에 따르는 동시행동의 첫 단계로서 《핵동결 대 보상》을 제안하였다. 미국은 제1차회담에서 하던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대답을 얼버무리였다. 조선측이 일관하게 부정하는 《고농축우라니움계획(HEUP)》설을 기성사실화하여 이를 포함하여 《완전하며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포기(CVID)》가 이루어져야 조선측의 우려사항을 론의할수 있다고 하였다. 핵포기의 범위와 내용에서 견해차이가 있으면 그 첫단계로서의 핵동결을 합의하지 못한다는것은 뻔한 일이다.
《부쉬독트린》을 내걸고 대량살상무기의 개발과 전파를 엄중시하겠다고 하던 미국이 엄연한 현실인 풀로토니움생산은 외면하고 상대가 부정하는 고농축우라니움에 고집하면서 그것을 사찰하겠다고 우기는것은 정합성이 없다. 대표단 단장인 제임스 켈리 국무성 차관보의 언행이 바로 그러하였다. 회담후 조선측이 밝힌데 의하면 그는 《처음부터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한 자세는커녕 저들은 이번에 조선측과 협상하려는것이 아니라고 꺼맀낌없이 말하였》으며 《미리 짜가지고온 각본을 졸졸 내려읽는데 그쳤는가 하면 제기되는 질문에조차 답변을 하지 않는 등 그 어떤 성의도 보이지 않았다.》(외무성 대변인)고 한다.
제2차 6자회담은 의장국인 중국이 성명을 발표하는것으로 끝났다. 의장성명에는 참가국들이 핵문제 및 관련된 관심사를 다루는데 있어서 《상호조률된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는 구절이 있으나 다자대화의 방향을 일반적으로 언급했을뿐 핵문제의 당사국인 조미를 포함하여 6자가 어떤 조치를 취할것인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것은 아니였다. 조선대표단 단장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회담후의 회견에서 의장성명을 존중하는 립장을 밝혔으나 그 내용에 대해서는 《불만족스럽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면서 조미동시행동의 첫단계로 조선측이 제안한 핵동결은 《달리는 기차를 세우기 위해 정지, 정차하는 단계》라고 말하였다.
국제적압력형성의 기도
6자회담이 열리게 된 다음에도 미국은 기차가 달리는것을 방관하고있었다. 부쉬행정부가 추구한 6자회담은 애당초 문제해결을 위한 마당이 아니라 HEUP설에 의해 조선을 《피고석》에 앉혀놓고 《국제적압력》으로 굴복시키기 위한 틀이였다. 이른바 《1 대 5》의 구도이다. 그래서 지연술을 구사하여 회담을 협상장소가 아니라 시간보내기장소로 만들었다. 특히 미국에서 대통령선거가 진행되는 2004년은 《북조선에 압력을 가하는 다자대화》를 저들의 정치적치적쌓기의 수단으로 리용하려고 하였다. 결실이 없었던 제2차 6자회담에 대해서도 부쉬행정부는 마치 CVID에 관한 저들의 주장이 지지를 받은것처럼 광고하고 그 《성과》를 긍정평가하면서 여론을 오도하고있었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보면 조미핵대결전에서 시간은 조선의 편이였다.
자위적 핵억제력을 보유할데 대한 결단이 내려진 조건에서 대화의 부진과 핵문제해결의 지연은 조선에 핵의 군사적리용을 위한 활동을 촉진시키는 시간을 제공하였다. 미국이 시간을 끌수록 조선의 협상력은 제고되였다.
또한 평화를 위한 외교력에서 조선은 미국을 릉가하였다. 2004년 당시도 조선은 미국의 지연술을 거꾸로 쥐고 정세를 주동적으로 이끌어나갔다.
그해 4월에 베이징에서 조중수뇌회담이 열렸다. 중국측은 《조선의 합리적인 우려가 응당 해결되여야 한다.》는 립장을 밝히고 조선측은 《인내성과 신축성을 발휘하여 6자회담에 적극 참가할것》이라고 하였다. 5월에는 일본총리가 두번째로 평양을 방문하였다. 일단 6자회담이 지속되는 기간에 그 참가국들이 조선과 쌍무회담을 가지는것을 미국은 로골적으로 차단할수 없었다. 한편 조선은 평화를 위한 다자대화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미국을 제외한 참가국들과의 쌍무관계를 진전시켜나갔다.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도 CVID주장에 정당성이 없다는것을 인정하고있음이 확인되고 일본총리의 평양방문 등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과 배치되는 국제정세가 형성되여도 부쉬행정부는 다자회담의 틀을 포기하지 못했다. 조선이 인내성과 신축성을 발휘하여 6자회담에 적극 참가할 립장을 표명하고있는 마당에 자포자기할수 없었다.
6월 22일부터 26일까지 베이징에서 진행된 제3차 6자회담에서 미국은 CVID의 표현자체를 들고나오지 못하고 조선의 핵동결에 대한 저들의 행동계획을 담은 《전향적인 제안》이라는것을 내놓았다. 한편 조선은 핵동결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내놓았다. 동결대상에는 녕변핵시설과 페연료봉재처리로 생산된 풀루토니움 그리고 핵무기를 더 만들지도 이전하지도 시험하지도 않는다는것이 포함되였다. 회담기간 조미쌍방은 《거의 2시간반동안 진지하게 마주앉아 회담하였다.》(조선외무성 대변인)고 한다. 6자회담은 그 회수가 거듭될수록 핵문제의 당사국인 조선과 미국의 담판에 유관국들이 동석하는 《2 대 4》의 구도가 선명히 부각되여나갔다.
6자합의와 지연술의 함정
그러나 1기 부쉬행정부의 기간에 《핵동결 대 보상》의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5년 1월에 출범한 2기 부쉬행정부는 대통령취임연설과 년두교서, 국무장관의 국회인준청문회발언 등을 통해 《폭압정치의 종식》을 목표로 선포하고 조선을 《폭압정치의 전초기지》로 규정하였다. 이듬달에 조선의 핵무기보유선언이 나왔다. 핵담판에서 조선의 협상력은 한층 제고되였고 대화의 끈을 더더욱 끊지 못하게 된 미국은 6자회담의 틀안에서 타결점을 찾을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폭정의 전초기지》발언을 철회하는것으로 하여 열리게 된 제4차 6자회담(7월 26~8월 7일, 9월13일~19일)에서 6자의 합의문건이 처음으로 발표되였다. 조미사이의 적대관계청산과 신뢰관계구축으로 핵문제를 해결할것을 명시한 9.19공동성명에 대하여 조선은 《우리의 일관한 립장이 반영》(외무성 대변인)되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부쉬독트린》에 따르는 론리와 주장이 전면배격된 공동성명의 리행은 성명발표직후에 발동된 미국의 대조선금융제재에 의해 제동이 걸린다. 미국을 함정에 빠뜨리는 지연술이 재현된셈이다. 조선의 외교관들은 압력을 받으면서 핵포기문제를 론의할수 없다며 마카오의 은행 《방코델타아시아(BDA)》의 자금동결문제가 풀려야 6자회담에 나갈수 있다는 립장을 견지하였고 인민군은 《조미사이의 대화가 진행되는 기간 장거리미싸일시험발사를 림시중지》한다는 1999년의 합의에 근거하여 2006년 7월 5일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미싸일을 발사하였다. 닷새후 미국주도하에 이를 엄중시하는 유엔안보리결의가 채택되자 조선은 자위적권리에 속하는 미싸일발사를 《위협》으로 매도하는 국제적압력공세를 배격하고 보다 강력한 물리적행동조치를 취할것을 예고하였다.
2006년 10월 9일 조선은 지하핵시험을 진행하였다. 이틀후 《워싱톤포스트》에 실린 기고문에서 클린톤행정부시절의 대조선정책조정관 윌리엄 페리는 《기회를 놓친 후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조선의 핵시험은 부쉬행정부의 대조선정책의 완전한 실패를 명백히 보여주었다. 거의 6년에 걸치는 기간의 정책은 겉으로만 장식된 미사려구와 무위, 태만의 기묘한 결합이였다.》
6자회담은 조선이 핵시험을 진행한 때로부터 2개월이 지난 2006년 12월, 금융제재해제의 론의해결을 전제로 15개월만에 재개되였다. 그러나 그 이후도 조미대화는 중단과 재개가 반복되였으며 조선의 핵억제력은 부단히 강화되였다. 미국이 적대시정책의 도수를 높일수록 《달리는 기차》에는 가속도가 붙였다. (김지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