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실책 / 미국이 자초한 안보위기 ②>《자위를 위한 핵억제력보유》의 정당성 


이라크에 대한 침공과 《선핵포기》강요

2003년 1월 10일, 미국의 적대시정책에 대항하여 핵무기전파방지조약(NPT)에서 탈퇴하였을 때까지만 해도  조선은 《NPT에서 탈퇴하지만 핵무기를 만들의사는 없으며 현 단계에서의 우리의 핵활동은 오직 전력생산을 비롯한 평화적목적에 국한될것》(조선정부 성명)이라고 표명하고있었다. 《미국이 적대시압살정책을 그만두고 핵위협을 걷어치운다면 우리는 핵무기를 만들지 않는다는것을 조미사이의 별도의 검증을 통하여 증명해보일수도 있을것》이라는 립장도 밝혔었다.

전쟁발발직후의 조미대화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침공에 이어서 《반테로전》의 확대를 노리는 대통령과 강경매파측근들의 안중에 《북조선과의 협상》은 없었다.

그해 3월 20일, 미국은 《악의 축》의 하나로 규정한 이라크에 대한 군사공격을 개시하였다.  《대량살상무기보유국》으로 지목된 이라크는 유엔결의에 따르는 사찰에 협력하고 사정거리 150km이상의 미싸일을 페기하는 등 스스로 무장해제하다가 폭격을 맞았다. 당시 미국방장관 럼즈펠드는 《미국은 반테로전쟁 및 이라크전쟁, 북조선과의 전쟁을 동시에 추구할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그렇다, 우리는 필요한것들을 완벽하게 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있다.》(2002.12.24 기자회견)고 공언하고있었다. 허세일지라도 상대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망발이다.

미국의 이라크공격에 대한 조선의 첫 반응은 《우리로 하여금 정당방위를 위하여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 갖추면서 무엇을 더 해야 하겠는가를 똑똑히 알게 하고있다.》(2003.3.21 외무성 대변인)는것이였다.

근거도 없이  《고농축우라니움계획(HEUP)》설을 들고 평양에 날아든 《미국대통령특사》를 쫓겨낸 이래 조선은 모든 문제해결방식의 기준점은 자국의 자주권과 생존권에 대한 위협의 제거라며 그 기준점을 충족시키는데는 협상의 방법도 있을수 있고 억제력의 방법도 있을수 있다고 밝혀왔다. 이라크전쟁이 발발되자 조선은 미국에 대하여 《협상이냐 억제력이냐》의 량자택일을 더욱 강력히 촉구해나섰다.

바그다드폭격이 시작된 2002년 3월부터 수개월간은 조선과 미국이 중대한 기로에 서있던 시기였다. 이 기간에 핵대결의 당사국들이 취한 행동, 회담장 안팎에서 전개한 론리와 주장, 그 귀결로서 내려진 결단에 의해 대결의 국면이 바뀌여 핵을 둘러싼 공방전이 종전과 다른 양상을 띠게 되였다.

이라크전쟁발발후 대화에 의한 핵문제해결을 촉구하는 국제여론이 조성되였다. (사진은 2003년 7월 평양에서 열린 국제회의)

세계가 그 과정을 목격하였다. 당시 유엔의 결의없이 이른바 《유지련합》을 뭇고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독단과 전횡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발이 일고있었다. 조선의 주변나라들은 《HEUP》설을 빙자한 확전기도에 반대하고 핵문제해결을 위한 중재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베이징에서 주최국인 중국이 사회하는 조미사이의 핵문제에 관한 회담이 진행되였다. 미국은 베이징에서의 《3자회담》을 《바그다드효과》의 산물로 보고싶어 했지만 조선은  이라크의 수도가 함락하는 장면을 보고 위기감을 느끼며 회담장에 나간것이 아니였다. 목적은 적대시정책전환에 관한 미국의 의지를 가늠하는것이였다.

그 전해에 《대통령특사》로서 평양을 방문한 켈리 국무성 차관보가 미국측 대표를 맡았다. 그는 문제해결의 방도를 내놓지 않고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이라크전쟁발발직후에 실현된 조미대화는 국제사회의 기대와 관심을 모았으나 결실없이 끝났다. 미국은 핵문제를 유엔으로 끌고 가려고 하였다. 한편 조선은 《우리는 부득불 필요한 억제력을 갖추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고 밝히고 《이러한 사태는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미국이 만든것》(외무성 대변인)이라며 핵대결이 격화된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하였다.

《무장해제한 다음에 협상》

부쉬행정부는 결정적시기에 《협상이냐 억제력이냐》의 량자택일을 회피하였다. 《HEUP》설을 꺼내며 약속위반에 대한 보상은 없다는 론리로 미국의 책임을 지우고 조선의 행동만을 요구하는 구도를 잡으려 하였다. 특히 조선반도핵문제는 국제적인 현안이며 그에 맞는 회담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미국이 다자안보의 론리를 늘어놓고 조미쌍무회담이 아닌 다자회담의 틀거리를 주장한것은 협상을 하려는것이 아니라 조선에 대한 국제적압력공간을 형성하려는 외교적시도에 불과하였다.

자국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쉬행정부의 속내를 이미 꿰뚫었던 조선은 《반테로전쟁》의 정형을 지켜보면서 필요한 자위적조치를 취할수 있는 준비를 착실히 추진하고있었다. 3월초의 시점에서 미국을 비롯한 유관국들에 녕변핵시설에서 8천여대의 페연료봉을 재처리하는 작업이 마지막단계에서 진행되고있다는것을 중간통보하였다. 이라크전쟁발발후 조선이 《억제력을 갗추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은  페연료봉을 재처리한 결과물의 용도가 바뀐다는것을 의미하였다. 7월 뉴욕에서 진행된 조미외교관들의 접촉에서는 재처리작업이 이미 끝났음이 통보되였다. 백악관은 핵무기의 재료가 되는 풀루토니움추출은 《중대한 문제》라는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으면 안되였다. 조선은 지체없이 외교공세를 들이대여 베이징에서 6자회담을 직방 열고 그 테두리안에서 조미쌍무회담을 진행할데 대한 제안을 내놓았다. 미국은 저들이 주장한 다자대화의 마당에 다시 끌려나오게 되였다.

8월 27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된 6자회담(조선, 미국, 중국, 로씨야, 남조선, 일본)에서 조선은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포기 대 조선의 핵계획포기》를 목표로 세우고 그를 위한 모든 조치들을 일관적으로 동시행동원칙에 따라 단계별로 리행해나갈것을 요구하였다.

중국과 로씨야, 남조선도 핵문제의 평화적해결을 촉구하면서 일괄타결과 동시행동방식을 취할데 대하여 지적하였다. 일본은 핵문제보다 랍치문제 같은데 초점을 집중하였다.

미국은 조선이 핵무기계획을 검증가능하게 불가역적으로 완전히 포기(CVID)해야만 안전담보와 경제협력문제를 론의할수 있으며 쌍무관계를 정상화하려면 미싸일, 상용무력, 인권 등 이여의 문제들도 론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이 이라크처럼 무장해제한 다음에야 미국이 움직일수 있다는 주장이 바그다드의 함락을 목격한 각국 대표들의 찬동을 받을리 만무하였다. 오히려 전쟁억제를 위해 자위적조치를 취한다는 조선의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비핵화실현을 위한 힘》

6자회담이 결실없이 끝난 때로부터 엿새후인 9월 4일 평양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1기 제1차회의가 열리여 조미사이의 핵문제와 관련하여 외무성이 취한 대외적조치들을 승인할것이 전원찬성으로 결정되였다. 핵의 군사적리용이 나라의 립법기관에서 승인된것이다. 그날 회의를 실황중계한 조선중앙텔레비죤은 결정이 채택될 때 주석단에 앉으신 최고령도자의 영상을 계속 화면에 비치였다.  조선반도비핵화를 선대수령의 유훈으로 간직해오던 인민의 여론이 나라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핵억제력보유에로 결집된 순간이였다.

8월의 6자회담에서 조선대표단 단장인 김영일 외무성 부상은 조미사이의 핵문제해결과 관련한 원칙적립장을 밝히고있었다. 그는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우리의 총적목표이다, 핵무기 그자체를 가지고있자는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핵문제가 대화를 통해 해결되자면 미국이 대조선적대시정책을 근원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최고인민회의 결정이 채택된것으로 하여 외무성 부상의 발언이 나라의 로선과 정책으로 되였다. 정당방위수단으로서의 핵억제력은 조선반도비핵화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 미국의 강압적인 정책을 전환시키는 현실적인 힘으로 규정되였다.

조선을 핵선제공격대상으로 규정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해에 조선은 《불은 불로 다스린다》는 원리를 핵리용에 관한 정책에 적용하여 적국과 맞서는 결단을 내리였다. 풀루토니움이든, 농축울라니움이든 그 무엇을 개발하고있다는 《북조선의 핵의혹》은 과거지사가 되고 미국은 핵보유국인 조선과 힘겹고 고달픈 대결전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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