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실책 / 미국이 자초한 안보위기 ①>《강경에는 초강경으로》 대응한 조선


《악의 축》교리에 기초한 압박정책

20년전 미국본토가 공격받은 《9.11사건》을 기화로 《테로와의 전쟁》에 돌입한 미국은 스스로 함정에 빠져 쓰라린 패배를 당하였다. 교전상대는 중동의 나라들뿐이 아니였다. 미국은 《반테로전》의 맥락에서 대조선강경책을 강행하여 오랜 교전국을 핵무장으로 떠밀어버림으로써 심각한 국가안보상의 위기를 자초하였다.

핵무기전파방지조약탈퇴를 지지하는 대회에 참가한 펑앙시민들 (조선중앙통신)

《9.11》과 네오콘의 역공세

부쉬대통령이 취임후 첫 일반교서연설에서 조선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한것은 《9.11》의 4개월후인 2002년 1월이다. 그 사이에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공격이 감행되였다. 《우리의 목표는 테로지원국가들이 대량살상무기로 미국 및 우리의 우방국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것》이라며 확전대상에 대하여 내비친 연설을 조선은 《사살상 우리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외무성 대변인) 고 간주하였다.

연설초안에서는 이라크만이 문제시되였는데 대통령이 조선과 이란을 추가할것을 지시하였다고 한다.  조선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게 된 론리적인 근거, 자료적인 증거는 연설에서 제시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극도의 반감과 뿌리깊은 적대의식이 확인되였다. 아버지 부쉬대통령의 시절에 제1차 핵위기가 조성되고 미국이 조선의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상정, 정세가 전쟁접경까지 치달은 사실을 아들이 모를리 없다. 부쉬정권의 중추를 이루고있었던 부대통령 딕 체이니, 국방장관 드널드 럼즈펠드, 대통령안보담당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 등은 지난 시기 포드와 레건, 아버지 부쉬행정부의 요직에서 반쏘반공랭전전략을 작성하고 실행하던 강경매파의 인물들이였고 그 이외도 국무차관 죤 볼턴으로 상징되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 들이 백악관, CIA, 국무성과 국방성, 대조선제제를 담당하는 재무성까지 장악하고있었다. 《악의 축》연설은 이들의 대조선관의 집중적인 표출이였다.

부쉬행정부가 세계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가르고 대결을 고취하면서 《북조선위협》설을 류포시키는 리유에 대하여 조선은 저들이 《랭전의 승자》가 아니였음을 통감한 강경매패들의 초조함과 위기의식의 발로라고 보았다. 《로동신문》(2001.4.19)은 부쉬행정부의 출범을 전후한 시기의 세계정세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있었다.

…쏘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되였을 때 강경매파들은 그것을 랭전에서의 저들의 《승리》로 과신하면서 미국을 유일한 초대국으로 하는  《단극화된 세계》를 구상하였으나 그후 조선을 중심으로 하여 시작된 사회주의재생운동이 세계적범위로 확대되였다…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전략적요충지인 조선반도에서 분단사상 처음으로 북남수뇌회담이 열리여 통일기운이 고조되자 미국의 패권적지위확보를 경계하고있던 (중국, 로씨야 등)주변 나라들과 국제사회의 일치한 지지를 불러일으켰으며 랭전시기 조선과 소원한 관계에 있던 영국과 도이췰란드를 비롯한 서유렵나라들까지  련이어 외교관계를 설정하게 되였다… 부쉬행정부가 시대와 력사발전의 법칙과 요구를 무시하고 미국식위선과 오만에 물젖어 낡아빠진 《힘의 정책》-랭전정책에 기초하여 주권국가를 억누르겠다고 《강경대응》을 운운하는것은 아무에게나 다 통하는것이 아니다…

강경매패들은 《9.11》을 역공세의 기회로 삼았다. 테로에 대항해 미국의 편에 서지 않는 나라는 미국의 적이 되였다. 《초대국의 힘》에 대한 과신과 망상으로 하여 정치적도덕체면도 군사적분별도 다 잃어버린 네오콘의 독주가 시작되였다. 테로리스트와 대량살상무기를 확산시키는 《불량패국가》에 대해서는 선제공격을 가할수 있다는 《부쉬독트린》에 따라 이 나라 행정부는 《반테로전쟁》의 맥락에 대조선정책의 초점을 맞추었다.

《대통령특사》방조의 전말

불과 2년전까지만 하여도 조미대화가 이어지고있었다. 북남수뇌상봉에 의하여 조선반도의 환경이 변하였다는것을 인정하면서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강화하는데 리롭게 두 나라의 쌍무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조치들을 취할것을 확약한 조미공동콤뮤니케 (2000.10.12)가 발표되고 클린톤대통령의 평양방문이 상정되였었다. 그런데 부쉬행정부는 핵태세검토(NPR)보고서에서 조선을 핵선제공격대상으로 정해놓고는 이른바 《ABC(Anything But Clinton)》정책에 따라 이전 행정부시기의 조미합의를 전면파기하는 행위를 계획적으로 체계적으로 감행하였다.

《악의 축》발언이 터져나온 2002년,  조선은 평화를 위한 전방위외교를 전개하였다.  세기의 교차점에서 수뇌외교를 통해 다져진 중국, 로씨야와의 선린우호관계는 보다 높은 발전단계에 들어섰다. 일본총리가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고 국교정상화의 의지를 담은 조일평양선언이 발표되였으며  북남관계는 반세기이상 끊겼던 철도를 련결하는 수준까지 전진하였다.

조선반도를 둘러싼 새로운 변화를 저들의 일방적 외교안보정책의 장애로 본 부쉬행정부는 거기에 제동을 걸기 위해 자객을 파견하였다. 그해 10월 3일부터 5일까지 제임스 켈리 국무성 차관보가 《미국대통령특사》로서 평양을 방문하였다. 조선측은 부쉬행정부가 대조선정책과 대화재개립장을 설명하기 위하여 특사를 보내겠다고 하기에 그를 받아들이였다.

특사파견에 앞서 부쉬행정부내 강온파간에 갈등이 벌어졌다고 하지만 결국 국무성, 국방성과 《비확산전문가》들이 협의한 끝에 결정된것은 《평양을 방문하되 협상은 하지 않고 정보당국이 포착한 문제만 제기한다》는 방침이였다.

10월 3일, 평양 중구역에 위치한 조선외무성 청사에서 김계관부상이 특사를 만났다. 특사는 아무런 근거자료도 없이 조선이 핵무기제조를 목적으로 농축우라니움계획을 추진하여 조미기본합의문(1994.10.21)을 위반하고있다고 걸고 들면서 그것을 중지하지 않으면 조미대화도 없고  특히 조일관계나 북남관계도 파국상태에 들어가게 될것이라고 하였다. 부상은 그런 계획은 없다고 되받아쳤다.

이튿날인 4일, 만수대의사당 회의실에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특사를 만났다. 그는 전날에 진행된 대책회의의 결과를 통보하였다.

《미국의 가증되는 핵압살위협에 대처하여 우리가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하여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것도 가지게 되여있다.》

미국의 강경매파들이 예상치 못한 폭탄선언이 터져나왔다. 특사는 전날에 밝힌 립장을 되풀이할뿐이였다. 조선의 외교관이 눈앞에서 핵무장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는데도 그에게는 아무런 협상권한이 없었다.

《HEUP시인》의 허위극

당시 미국에 의해 《대량살상무기보유국》으로 지목된 이라크에 대한 군사공격이 벌써 세계의 화두로 되고있었다. 그러나 《9.11》 이후의 형국에서 《반테로전》과 《대량살상무기의 비확산》론리를 휘두르면 어느 나라든 굽어들것이라고 생각한것은 오산이였다. 《미국대통령특사》는 뜻밖에도 조선에서 문전거절 당하여 쫓겨나는 꼴이 되였다.

당황망조한 행정부는 즉시에 대응책을 찾지 못했다. 5일, 귀국에 앞서 서울에 들리여 기자회견을 진행한 켈리차관보는 평양에서 핵문제를 론의하였다는 짤막한 성명만 랑독하고 질문을 받지 않았다. 워싱톤의 훈령에 따른것이였다. 100여명의 기자들이 모인 회견은 6분만에 끝났다.

10여일후 부쉬행정부는 《북조선이 고농축우라니움계획(HEUP)을 가지고있음을 시인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하여 《핵범인》을 꾸며내는 여론조작을 일삼았으나 제2차 핵위기가 촉발되여 궁지에 몰린것은  조선이 아니라 미국이였다. 부쉬행정부가 핵문제로 북남, 조일관계에 제동을 걸면서 조미기본합의문에 따라 조선에 해오던 중유제공을 중단하는 결정을 내리자 조선은 합의문에 따라 동결했던 녕변핵시설을 재가동시켰다. 미국이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사촉하여  조선을 반대하는 결의를 채택하게 하자 조미공동성명(1993.6.11)에 따르는 림시정지조치를 해제하여 핵무기전파방지조약(NPT)에서 탈퇴하였다.

평양에서는 핵무기전파방지조약탈퇴를 지지하는 대회에 100여만명의 시민들이 참가하였다. (조선중앙통신)

《강경에는 초강경으로》- 그것이 조선의 대응방식이였다. 부쉬행정부의 군사안보정책을 다스린 네오콘들은 미국이 동서랭전을 선포한 후 처음으로 도발한 침략전쟁에 정의의 전쟁으로 대답하여 정전후에도 반미자주의 기치를 들고 핵위협과 경제제재에 대항하여온 동방의 나라에 대하여 너무도 몰랐다.  조미합의의 파기가 초래할 위기에 대한 상상력도 결여되여있었다.

《악의 축》연설의 4년후, 조선은 처음으로 지하핵시험을 진행하였다. 핵무기의 재료는 부쉬행정부가 시비를 걸던 《고농축우라니움》이 아니라 재가동한 녕변 핵시설에서 페연료봉을 재처리하여 추출한 풀루토니움이였다.

그 이후도 미국은 오랜 교전국의 《초강경대응》을 거듭 촉발하였다. 력대 행정부의 오만과 실책이 조선을 미국본토에 대한 핵보복능력을 갖추는데로 떠밀었다.

(김지영기자)

20년전 미국이 시작한 《반테로전쟁》의 와중에 터진 제2차 핵위기와 그 이후의 조미핵대결을 5번에 걸쳐 더듬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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