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차 《꽃송이》 1등작품〉고급부 작문《어머니사랑》
2026년 03월 13일 09:00 꽃송이1등작품도꾜중고 황나연
2024년 11월상순. 나는 조국으로 떠날 차비를 하면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조국에 가면 층어머니가 너희들의 생활을 돌봐주시니 인사를 잘하고…》
(층어머니?)
물어보니 호텔의 관리원을 《층어머니》라 부른다는것이다.
일본의 호텔에서도 여러 접대원, 봉사원이 손님들을 친절히 대접해주지만 그들을 《어머니》라 부르지는 않은다.
(어머니? 알맞춤한 부름일가?)
좀 어색하다고 느꼈다.
어쨌든 《어머니》라는 우리 나라 고유의 부름은 내가 정말 조국에 간다는 실감을 더해주었다.
11월 19일.
드디여 나는 조국땅을 밟았다. 평양호텔에서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고 50여일간의 조국생활이 시작되였다.
그날 저녁 내가 호실에서 짐을 풀고있으니 《딸랑》하는 종소리와 함께 호실의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층어머니입니다-》
빨간색정복을 입은 빠마머리 아주머니세명이 들어오셨다.
(이분들이 《층어머니》로구나!)
층어머니는 호실리용법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가르쳐주시고 마지막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요》라고 말씀하셨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였다. 조국에 온 기쁨과 함께 긴장감으로 굳어졌던 나의 마음을 풀어주시고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신감으로 채워주었다.
이것이 층어머니들과의 첫 만남이였다.
층어머니들은 매일 100명 가까운 우리 예술단학생들의 빨래랑 호실청소때문에 분주하였다.
아침마다 《빨래 있나요?》하고 찾아오시고 우리의 빨래감을 걸어주시는데 저녁에 우리가 호실에 돌아오면 주름하나없는 침대이불우에 반듯하게 개킨 옷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줄어진 위생지는 꼭꼭 보충되고 어제밤 리용한 목욕수건은 새것으로 바뀌고 쓰레기통은 깨끗이 비워져있다.
매일 공연을 위한 훈련을 끝내고 층어머니의 손길이 구석구석까지 가닿은 호실에 돌아오니 마치 층어머니가 우리를 따뜻이 맞아주는것 같았다.
우리를 만날 때마다 《잘 잤나요?》, 《훈련은 잘 돼가나요?》 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주신 층어머니들. 어느새 나의 이름을 기억해주시고 어서 공연을 보고싶다고 응원해주셨을 때는 정말 기뻤다.

그림 : 심혜숙
어느 날엔 호실에서 동무와 함께 훈련벽보를 만들고있었는데 층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우리를 보시라, 손북조>. 야, 나연이와 미송이가 글 잘 쓰누나.》
이렇게 우리를 칭찬해주시고 벽보의 틀린 철자도 고쳐주셨다. 저녁마다 집에서 나의 숙제를 검열하신 엄마같았다.
내가 몸을 앓았을 땐 일부러 호실까지 찾아오시고는 방의 온도를 조절해주시고 밥은 먹었냐고 걱정해주셨다. 그때의 눈길도 분명 《엄마눈길》이였다.
이렇게 층어머니는 우리 예술단성원들 모두를 돌봐주시고 사랑해주셨다. 층어머니가 계셨으니 아파도 힘이 솟았고 한시도 슬프지 않았으며 훈련에 더욱 몰두할수 있었다.
그리하여 설맞이공연 본무대를 맞이하였다.
일반공연때에는 눈물때문에 가물가물해진 객석 저 멀리에 층어머니들이 앉아게시는것이 보였다. 종장에서는 정말 잘했다고 꽃까지 가져와주셨으니… 얼마나 고맙고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잊을수 없는 추억은 하나더 있다.
2025년 1월 2일.
우리가 김정은원수님을 만나뵙는 최상의 영광을 지닌 날.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층어머니를 비롯한 모든분들이 우리를 축하해주셨다.
몸가까이 모시니 어떠했는가고, 인사를 잘 드렸는가고 층어머니들은 서로 앞다투어 질문하셨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안아주시고 앞으로도 조선사람으로서 떳떳이 자라나야 한다고 귀가에서 뜨겁게 말씀하시는것이였다.
믿어지지 않았던 꿈같은 하루가 층어머니들의 말을 듣고 현실로 안겨왔다.
남은 공연도 무사히 마치고 우리가 조국을 떠나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왔다.
조국을 떠나는 전날밤. 호실동무와 함께 층어머니를 비롯한 조국의 선생님들께 밤새 편지를 썼던 나는 잠깐 눈을 붙이려다가 그만 아침까지 자벼렸다.
《딸랑》하는 종소리로 일어났는데 호실의 문을 여니 걱정어린 눈길로 서계시는 층어머니들.
(??) (!!)
(야단났어! 늦잠잤다!)
당황하 우리에게 층어머니들은 일없다고 하시면서 함께 짐을 꾸려주시고 호텔1층까지 날라다주셨다. 마지막까지 우리의 어머니였다. 마지막까지 애를 먹인것 같아 미안하고 또 고마왔다.
뻐스출발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니 이게 정말 층어머니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되였다.
층어머니들은 우리가 섭섭하지 않게 웃으면서 안아주셨다.
《다시 오라요.》
《잘 지내라요.》
《다시 만납시다.》
직접 말로 전하고싶었던 인사가 참 많았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먼저 흘러나오는것이였다.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나의 속마음까지 알아주셨는지 층어머니는 《됐어요.》하고 뻐스에 태워주셨다.
나는 비로소 조국의 호텔관리원을 어째서 우리가 《층어머니》라 부르는지 알게 되였다.
일본에서 온 우리 재일조선학생들에게 50여일간에 걸쳐 친어머니사랑을 돌려주신 층어머니들. 우리가 불편하지 않게, 섭섭하지 않게 늘 곁에서 생활의 모든것을 돌봐주신 그분들에게는 《어머니》라는 부름이 정말이지 딱 들어맞는다.
그리고 나는 층어머니들의 그 사랑은 위대한 어머니조국의 한부분임을 잘 안다. 50여일간의 어느 한 순간을 돌이켜보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조국의 따뜻한 품속에 안겨있었다.
일본에서도 조선사람으로서 떳떳이 자라나 애국위업의 바통을 꿋꿋이 이어가자. 그리하여 《어머니사랑》에 꼭 보답하자.
이렇게 굳은 결심을 다졌다.
공항으로 향하는 뻐스는 그날따라 빠른 속도로 달리는것 같았다.
뒤돌아보니 평양호텔은 저멀리 작아져있었고 마치 우리의 등을 떠밀어주기라도 하듯 배웅하고는 까맣게 사라졌다.
또다시 《어머니사랑》에 안기는 그날을 그리며 나는 공항으로 향했다.
기쁨의 목소리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썼습니다.
1등으로 평가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설맞이공연에 함께 참가한 동무들과 기쁨을 나누고싶었고 층어머니들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국에 못 가본 동무들도 이 글을 읽고 조금이나마 조국을 몸가까이 느낄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차있습니다.
〈단평〉왜 그들은 《어머니》라 불리우는가
설맞이공연출연을 위해 조국을 처음 방문한 학생의 체험과 감정을 숙소인 평양호텔 관리원(층어머니)들과의 교류속에 담아냈다.
일본의 호텔에서는 손님들을 친절히 대접하는 봉사원이라 해도 《어머니》라 부르지는 않는데 평양호텔은 무엇이 다를가. 그 의문은 조국의 품에 안겨 보낸 나날에 저절로 풀린다.
《층어머니의 그 사랑은 위대한 조국의 한부분》- 작품은 첫 체험의 벅찬 소감을 이 한 문장에 훌륭하게 집약했다.(지)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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