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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내 고향의 작은 다리》(로정범)

2025년 03월 14일 14:44 단편소설

 

[이 작품은 조국해방후 온 나라가 새 조국건설에 떨쳐나서는 속에서 《내 고향의 작은 다리》를 무대로 싹트기 시작하는 청춘남녀의 소박한 련애감정을 그린 작품이다. 아직은 서로 주소도 모르는 사이인 그들이 각기 향한 곳은…(편집부)]

 

1

 

성호네 집에서 얼마쯤 나가면 맑은 시내가 흘렀다. 언제나. 노래하며 흘러가는 그 시내가에는 한사람씩 건느기 좋게 놓여진 돌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목에서 성호는 아침이면 늘 한 처녀와 어겼다.

처녀는 제사공장에 다니는지 다리를 건너 이쪽으로 넘어왔고 성호는 반대로 처녀가 오던 방뚝길을 따라 자기가 일하는 자동차사업소로 가군 하였다.

때는 위대한 장군님의 력사적인 개선연설을 받아안고 온 나라가 새 조국건설에 한사람같이 떨쳐나기 시작하던 1945년 11월경이였다.

공장들에서는 아직 연기가 오르지 못했고 농촌에서는 두더지처럼 세상의 변천을 믿지 않는 살찐 지주들이 여전히 긴 대을 내흔들며 농민들을 못 살게 굴고있었으나 여기 맑은 시내가의 작은 돌다리로는 벌써 새 생활에 나선 사람들의 활기있는 발걸음이 시작되고있었으니 처녀도 그가운데 한사람으로 짐작되였다.

아침이면 좁은 다리목은 건너가고 건너오는 출근자들로 흥성거렸다.

점잖은축들은 서로 먼저 건너오라고 양보를 하였으나 장난이 심한 젊은 패들은 서로 먼저 건너가겠다고 밀치기를 하면서 웃고 떠들었다.

그 사람들속에 가끔가다 세루조끼에 금시계줄을 늘인 유지풍의 사나이와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팔자걸음을 하는 《시골량반》들이 섞일 때가 있었는데 그때면 《타도》라는 말을 아침인사말처럼 쉽게 번지며 다니던 어느 젊은 친구가 그들을 막무가내로 떠밀고 건너가서 약간의 소동이 일어나군 하였다.

다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밝지 못했다.

대개가 컴컴한 색갈의 수수한 작업복에다 신문지에 뭉그린 점심 밥팍을 겨드랑이에 끼고있었고 촌에서 나무 팔러 들어오는 지계군들은 아직 짚신발이였다.

처녀도 마찬가지였다.

몇십전짜리 코고무신 한컬레가 다 큰 처녀를 울리던 악독한 지난 세월의 자취는 처녀의 몸에 아직 그대로 배여있었으니 늘 보아야 처녀는 군데군데 덧천을 대고 기운 물 바랜 깜장치마에다 품이 좁아보이는 흰 저고리를 입고 땜질자리를 감추지 못한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처녀는 매일아침 제일먼저 다리를 건너왔다. 보통사람들이 한창 조반상을 받고있을무렵이였다. 그때면 성호도 다리부근에 가있군 하였다.

오노라는 회사주인놈이 도망가며 마사버린 12대의 자동차가 그의 손을 기다리고있었다.

그 자동차들은 광복과 함께 나라의것으로 된 사업소의 총 재산이였다. 그때까지도 성호는 란폭한 운전사의 술심부름까지 들어주어야 했던 공복전 《조수》의 때를 벗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그 차들을 수리해볼수 있는것은 사업소적으로 그와 다른 몇사람뿐이였다.

성호는 그들을 책임지고있었다. 그래 신새벽에 사업소로 나가고 밤늦어 돌아오군 하였다. 아마 처녀도 자기와 비슷한 리유로 해서 새벽길에 나서는것이라고 성호는 생각하였다. 처녀가 다닌다고 짐작되는 제사공장 역시 오래전부터 숨을 죽이고있었기에…

그래서 성호는 이른새벽마다 인적 없는 호젓한 다리목에서 처녀를 만나게 되었고 말없이 길을 어겼다.

처녀는 늘쌍 뛰여다녔다. 원래 걸음새가 그렇게 보일 정도로 언제나 총총히 뛰는 자세였다.

광복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뛰는 처녀! 그래서 성호가 그를 눈여겨보게 된것인지도 몰랐다.

성호는 운전기술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곁눈을 팔지 않고 앞만 보는 버롯을 키워왔고 어느덧 그에 습관되여 이제는 길을 걸을 때에도 주위사람들에게 무관심하였다. 그런데도 처녀는 차앞으로 뛰여드는 그 어떤 장애물처럼 성호의 눈에 자주 걸려들군 하였으니 그럴 때마다 성호는 그것이 무엇때문이겠는가고 혼자 생각에 잠기는것이였다.

그늘에서 핀 꽃인듯 아련하고 양기 없는 얼굴, 그 얼굴 어딘가에 늘쌍 비껴드는 그 어떤 서글픔과 겁을 먹은듯한 표정, 점심밥곽을 들지 못해서인지 허전해보이는 차림새…

왜 그런지 보면 볼적마다 쓸쓸한 생각을 머금게 하는 쳐녀였다.

간혹 가다 처녀는 성호가 다리를 건너 방뚝길을 한참 갔을 때에야 마주 올적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처녀는 자기가 늦었음을 알고 부끄러움에 발개진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서 성호의 곁을 지나쳐서는 더 빨리 뛰여가는것이였다.

《늦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내가 좀 일찍 집을 나섰는걸요.》

하지만 성호가 그런 말을 할 사이면 처녀는 벌써 저 멀리에 가있었다. 반대로 성호가 그렇게 늦어지는 날도 있었는데 그때면 성호는《오늘은 내가 늦었구만요.》하고 알은체를 하였다. 그래도 처녀한테서는 매일 이렇다할 응대가 없었으니 처녀는 그저 무엇에 쫓기우듯 한시바삐 성호의 곁에서 멀어지려고만 하였다.

다리목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그들이 그렇게 만나는 날은 드물었다.

두사람은 다섯시반경이면 시계처럼 다리의 량쪽에 나타나군 하였는데 처녀는 먼저 다리로 다가오다가도 성호를 보면 얼른 멀찌감치 비켜서서 그가 먼저 건너오기를 기다려주었다.

언제 보아도 늘 그렇게 해주는 처녀가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여 하루는 성호가 우정 다리 이쪽에 서서 그를 기다려준 일이 있었다.

처녀는 먼저 건너오려 하지 않았다. 성호 역시 어떻게나 그에게 양보하고싶은 마음이였다.

왜놈들이 마사버리고 간 공장, 이제는 우리의것으로 된 공장을 살리기 위해 하루같이 새벽길에 나서는 처녀(성호는 그렇게 확신하고있었다.)에게 그런 행동으로써나마 리해의 뜻을 표시하고싶어서였다.

《어서 건너오시오.》

성호는 웃으며 처녀를 바라보았다.

처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녀는 고무신의 땜자리를 감추듯 오른발을 왼쪽신발 가장자리에 꼭 가져다붙이고 해가 방금 솟아오르려고 하늘이 불기우리해지고있는 동켠으로 돌아서서 《새벽부터 녀자가 어떻게 남자들의 앞을 지를수가 있나요.》 하는 태도로 서있었다.

성호는 다시한번 웃으며 처녀를 재촉했다.

그러자 처녀는 잠자코 다리에서 물러섰다. 그리고는 자기를 보며 웃고있는 성호를 경계하는 눈길로 바라보더니 도망치듯 내기슭을 따라 아래쪽으로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하였다. 성호는 아연해서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달구지들이 건너다니는 저 먼 아래쪽에서 처녀가 신발을 벗고 물을 건느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보는 성호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동지달도 다 가는 때라 첫 새벽의 내물은 어일듯 찰것이다. 하지만 처녀는 그보다도 성호가 따라올가 겁나는지 이쪽을 자주 바라보며 허둥지둥 물을 건너갔다. 그리고는 인차 성호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무엇이 그를 놀래웠는가. 인적이 없는 호젓한 강변에서 새벽마다 나타나서는 늘 뭐라고 말을 걸어오는 알지 못할 남자를 경계하는것인가.)

그러자 가슴아픈 한토막의 추억이 묵은 상처를 건드리듯 성호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제사공장쪽에서 굶주린 늙은 야수의 울부짖음같은 아침고동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스러져갈무렵인데 다리너머켠에서 한 처녀가 엎어질듯 달려오고있었다.

성호는 처녀가 늦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렸다.

성호는 출근시간이 늦은 제사공장처녀들이 어떤 봉변을 당해야 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 공장 정문에는 생겨먹은 상관대기부터가 징글스럽기 짝이 없는 오십줄의 왜놈수위가 있었는데 놈은 쩍하면 처녀들의 치마폭을 와락 거머잡아올리며 종아리를 치군 했다.

언제인가 그런 치욕을 당한 한 처녀가 정문앞 버드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성호는 자기도 늦어 뛰던 길이였지만 처녀가 먼저 다리를 건너오도록 얼른 비켜섰다. 처녀는 사양하지 않고 허둥지둥 다리에 올라섰다. 얼음이 깔린 다리는 미끄러웠다. 낮에 녹았던 눈이 밤새 다시 얼어붙은것이였다. 성호는 그런 다리우에서 처녀가 너무 덤벼치는것 같아 가슴을 조이며 서있었다. 일은 바로 이때에 일어났다.

성호의 뒤를 따라오던 오노의 아들이 닁큼 다리에 올라서며 처녀를 막아선것이였다. 다리 복판에서 놈은 무작정 처녀의 손목을 잡으려 그를 희롱하려들었다. 성호도 어쩔 사이가 없이 처녀가 풍덩 물속에 뛰여들었다. 성호는 그 모양을 보지 말자고 눈을 꽉 감아버렸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돌아보니 처녀는 방뚝에 앉아 울고있었다. 성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재빛으로 흐린 하늘에서 싸락눈이 흩날리던 추운 아침이였다. 역쪽에서 《징용》으로 끌려가는 아들을 쫓아가며 울부짖는 어머니의 통곡소리런듯 기적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한참 가다 성호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신발 한짝을 벗어 든 처녀가 내기슭을 오르내리고있었다.

아주 다른 한짝을 잃어버린 모양이였다.

그 일이 있은 며칠후 성호는 내아래켠에서 우연히 고삭은 버들뿌리에 걸려 얼어붙은 코고무신 한짝을 보았다.

금방 사신은듯싶은 새 고무신이였는데 신코에는 바뀌우지 말라고 흰 실로 새겨놓은 +표식이 있었다. 빙하에 포위되여 오도가도 못하고 열어붙은 쪽배처럼 얼음에 묻힌 그 고무신을 보고있으려니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내렸다.

동태대가리인줄 알았는지 까치 한마리가 버들가지에 날아와 앉아 그 고무신을 내려다보며 깍깍거렸다.

그날부터 그 고무신은 제짝을 찾아 다리, 눈에 잘 띄우는 돌우에 반듯하게 놓여있었다.

고무신은 한동안 지나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며 그렇게 놓여있었다. 그러다가 없어져버렸는데 그후 어느날 +표식을 한 그 고무신을 신은 처녀가 다시 다리를 건너오는것을 보았을 때 성호는 얼마나 기뻤던가.

그때부터 성호는 은연중 처녀의 보호자로 나선 자신을 보았었다.

이제 또다시 어느놈이 그에게 집적거린다면 이번엔 무작정 개굴창에 처박으리라 벼르면서… 하지만 왜놈들이 망하자 벼르던 그 마음까지도 어느결에 사라져버렸었다.

이튿날부터 처녀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자기를 피하여 어디 먼데로 돌아다니는것 같았다.

성호는 둥지밑에 받침대를 고여주려다가 거기에 놀라 날아가버린 제비를 볼 때처럼 마음이 허전하였다.

언제가면 가슴에 멍이 든 우리의 누나들이 허리를 쭉 펴고 길을 가도 저렇게 구석진데로가 아니라 복판으로 활보하게 될것인가?

보름만에야 처녀는 다시 다리에 나타났다.

오, 겁많은 《제비》!

그날부터 성호는 몰래몰래 모이를 뿌려놓으며 조심스런 날짐승을 자기의 보금자리로 불러들이는 심정으로 처녀를 대해주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한번 놀란 《제비》는 도무지 곁을 주려 하지 않았으니 성호가 한발자국 다가서기만 해도 벌써 날아오를 태세로 날개를 가다듬는것이였다.

그렇게 반년 남짓한 나날이 흘렀다.

그동안 사업소에서는 12대의 자동차에 모두 발동을 걸었다.

그날은 제일 심하게 마사졌던 성호의 자동차가 마저 살아나서 운전을 하던 날이였다.

성호는 운전기술을 배워준다면서 돈도 몇푼 안주고 자기를 종처럼 부려먹던 오노란 놈과 운전대를 한번 빌리재도 술병을 섬겨야 했던 주정뱅이운전사를 저주하면서 나라가 자기한테 맡겨준 자동차의 운전대률 잡고 사업소마당을 천천히 한고패 돌았다.

그리고는 정문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갈것인가? 어디로든 일 있는가! 앞길은 저렇게 환히 열렸는데…

공장도 우리의것, 땅도 우리의것, 병원도 학교도 재판소도 우리의것이다.

《장군님의 부르심 따라 모두다 민주주의 새 조선 건설에로!》《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매진하자!》

성호는 자기의 집이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새벽이면 자기를 두드려 깨워 일늦겠다 재촉해주고 저녁이면 저 가락소리가 덜렁거리는 밥팍을 받아주며 차가 살아나자면 아직 멀었는가고 자기보다 더 애타게 오늘을 기다려온 어머니에게로.

제사공장앞을 지나려니 밝은 창으로 기대사이를 누벼가는 처녀들이 보였다

흰 연기 피여오르는 공장굴뚝…

어제는 황철에서 첫 쇠물을 뽑고 흥남에서 비료를 낸다더니, 청진에서 기관차를 떠나보내고 어느 로동자휴양소가 문을 열었다더니 오늘은 이 공장이 돌고있는것이였다.

수고했구나, 아침마다 만나는 처녀야, 숨결처럼 고르로이 들려오는 저 기대들의 동음속에 너의 땀도 스몄음을 나는 믿는다.

성호는 정문옆에다 차를 세우고 공장수위한테로 다가갔다. 왜 그런지 그와 담배라도 나누며 무슨 말이든 한마디 나누고싶어서였다.

수고했다는 성호의 인사에 수위는 몹시도 반가와하였다.

《어제 오늘은 인사를 받을래기 정신이 다 뗑합니다.…》

성호는 기쁜 마음으로 다시 운전칸에 올랐다.

장거리앞을 지나는데 구멍 뚫린 법탕소탱이들을 잔뜩 쌓아놓고 그것을 때느라 연물을 녹이고있던 다리병신 외삼촌이 그를 알아보고서는 차앞을 막아섰다. 삼촌은 한다리밖에 없는 몸을 버둥거리며 무작정 운전칸으로 기여올라왔다.

《좋구나. 어서 장마당을 한바퀴 빙 돌고 가거라. 오늘은 잃었던 한다리를 찾은것만 같구나.

나도 어제부터 일을 시작했다.》

성호는 그날 외삼촌과 어머니 그리고 동네 조무래기들을 한차 가득 태우고 그들이 가자는대로 차를 몰았다.

그때로부터 한달이 지나 성호는 처음으로 로임과 상금이 든 불룩한 돈봉투를 어머니한테 가져갔다.

어머니는 외삼촌어머니와 같이 상점으로 나가 여름양복 한벌과 흰 운동화 한컬레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성호는 낡은 세상의 때를 벗어던지는 심정으로 리발과 목욕을 하고 새옷을 입었다.

어머니는 그가 벗어놓은 헌옷들을 수매소로 가져갔다..

성호는 오랜만에 잠을 푹 자고 느지막해서 출근길에 나섰다.

난생처음으로 새 양복에다 사치한 흰 운동화를 신으니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만 쳐다보는것 같아 쑥스러웠다. 하긴 그래서 더욱 날아갈것만 같은 기분이였다.

광복 한돐이 다가오고있는 맑게 개인 7월의 아침이였다. 밤새 내린 비로 불어난 시내물이 쏴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있는데 물 따라 올라온 고기를 잡는지 반두를 든 한 로인이 내기슭을 한가하게 오르내리고있었다.

성호는 다리복으로 다가가며 오늘은 처녀를 못 만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자기네가 만나던 시간은 다섯시반경이였기에…

개건너에서 한 처녀가 다리로 다가오고있었다.

하늘색치마에다 잠자리날개 같은 모시적삼을 입고 흰 코고무신을 신은 《멋쟁이》처녀였다.

그는 다리목으로 들어서다 성호를 보더니 얼른 한옆으로 비켜서서 그가 먼저 건너오기를 기다려주었다.

바로 그 처녀였다.

한창나이의 처녀로서는 차마 입고 나서기 거북한 그런 옷차림으로 다니던 처녀, 그래서 항상 머리를 들지 못하고 다니던 처녀가 자기처럼 이전 세월의 때를 씻어 던지고 《새 사람》이 되여 나타난것이였다.

돌고있는 제사공장, 상금과 로임이 함께 든 불룩한 돈봉투, 새 웃을 입혀주며 눈굽을 적시는 어머니, 수매소로 가져가는 헌 고무신…

처녀를 보는 순간 성호의 눈앞을 화면처럼 스쳐간 광경이였다.

이때 역쪽에서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부터 정시로 운영되기 시작한 평양행 아침차가 떠나는 소리였다.

성호는 래일아침도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처녀와 만날수 있다는것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궤도우를 정시로 달리기 시작한 저 기관차처럼 우리의 생활도 이제는 제 길에 들어서서 힘찬 첫걸음을 내디디였기에···

《동무, 오늘은 아무래도 동무가 먼저 건너와야 할것 같소.》

성호는 건너편에 서있는 처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아침 〈남녀평등권법령〉이 발포되였단 말이요.》

성호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늘 고개를 숙이고 응대를 안하던 처녀가 그 말에는 얼핏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나마 성호를 바라보았는데 그때 처녀의 눈동자는 해빛을 받은 거울처럼 반짝하고 빛을 뿜었다.

《자, 어서 건너오시오. 동무도 한번 떳떳하게 머리를 들구 건너와보란 말이요.》

그 말을 하자니 말하는 자신부터 목이 메여왔다. 그 순간에 그들의 눈길은 또다시 마주쳤다.

이번에는 처녀의 눈시울이 파르르 떨리는듯 했다. 처녀는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왜 그런지 성호는 가슴이 얼얼하게 저려듦을 느꼈다.

성호는 자기가 아무리 먼저 건너오라고 해도 처녀가 응하지 않으리란것을 깨닫고는 다리에서 물러섰다.

그리고는 신발을 벗어 들고 언제인가 처녀가 발을 벗고 물을 건넜던 다리아래쪽으로 내려가려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오늘은 기어코 처녀가 이 다리를, 언제 한번 맘놓고 건너보지 못한 이 다리를 통채로 그에게 내주고싶어서였다.

성호의 생각을 알게 된 처녀가 화닥닥 놀라 다리우에 냉큼 올라서더니 머리를 푹 숙이고 종종걸음쳐 건너왔다.

그다음엔 《고마와요.》 하는 인사 한마디를 남겨놓고 총총히 멀어져갔다.

성호는 처녀가 옆을 지날 때 그가 신은 흰 고무신을 자세히 보았다. 신코에는 +표식이 없었다.

옳구나. 처녀야, 이제는 거기다 그런 표식을 안해도 너의 그 고운 신발은 잃어지지 않으니 어디 가든 마음놓고 벗어놓거라.

성호는 구름을 타고 오르는 선녀와도 같이 하늘색 치마폭을 날리며 흰 연기 피여오르는 공장쪽으로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처녀를 오래도록 지켜보며 서있었다.

《고마와요.》 하며 자기를 바라보던 물기어린 눈.

성호는 처녀를 알기 시작하여 오늘 처음으로 말을 하는 그를 보았다.

 

2

 

그들은 평양행 아침차가 출발기적을 울리는 7시반경이면 또다시 다리에서 길을 어겼다.

처녀는 여전히 다리 저켠에서 성호에게 길을 내주군 하였는데 그때면 성호는 군말없이 먼저 성큼성큼 건너갔다. 그래주는것을 처녀가 기뻐하는것 같았기에…

하지만 이따금씩 그런 처녀에게 《오늘은 아무래두 내가 발을 벗고 또 돌을 건너야 할가 봅니다.》해서 처녀를 난처하게 만들어놓군 하였다. 그러면 처녀는 고개를 돌리고 혼자 몰래 웃으며 한참씩 다리를 건너왔는데 건너와서는 《고마와요.》 하는 인사를 남겨놓고 나는듯 달려가는것이였다.

낮에는 부끄러워 밤에만 피는 분꽃처럼 처녀가 혼자 방긋 웃는것을 볼 때마다 성호의 마음은 절로 즐거워났다. 그래서 성호는 그가 웃을수만 있다면 매일이라도 발을 벗고 물을 건느고싶은 심정이였다.

하루는 처녀가 무슨 수첩을 정신없이 들여다보며 걸어오기에 슬그머니 비켜서서 길을 내주었는데 처녀는 다리를 다 건너와서야 성호를 알아보고 수첩을 감추며 당황해하였다.

성호는 처녀의 수첩에 《돌다리··· 고향》 하는 지금 한창 배우고들 있는 우리 글이 씌여있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처녀는 나날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떤 날은 동무들과 깔깔 웃으며 걸어오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민주청년행진곡》을 신나게 부르며 걸어오다가 자기를 보면 동무들의 등뒤로 살짝 숨어버렸는데 그런 처녀를 보기란 즐거운 일이였다.

성호를 무엇보다 즐겁게 한것은 들가방을 살살 흔들어대며 춤추듯 사뿐사뿐 걸어다니는 달라진 그의 걸음새였다.

언제나 쫓기우듯 총총히 뛰던 처녀, 그래서 이따금 성호는 처녀에게 《이제는 뛰지 않습니까?》 하고 웃으며 말을 걸군 하였다. 그러면 처녀는 《그런건 저한테 묻지 말구 저 돌다리에 물어보세요.》하듯 방긋 웃는것이였다.

성호는 오래동안 자리에 누웠다가 바깥출입을 시작한 누이동생을 볼 때처럼 나날이 달라져가는 처녀를 기쁜 마음으로 살피고있었다.

그런데 한번은 처녀가 오래동안 보이지 않은적이 있었다. 자기들이 만나지 못하는 날이란 명절날과 일요일 그리고 성호가 차를 가지고 먼거리출장을 나갈 때뿐이였는데 그가 오래동안 나타나지 않자 성호는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그 나날의 다리목은 얼마나 허전했던가.… 막을 내린 극장무대처럼…

(그가 앓는것일가?)

하지만 무슨 근거로 해서인지 성호는 처녀가 앓을수 없다고 단정해버렸다.

성호는 별의별 걱정거리를 다 생각해내서는 그를 도와주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있는 자기를 괴롭혔다. 성호는 자기한테 아무런 도움도 청하지 않고 혼자 애를 태우고있을 처녀를 원망하였다.

몇년세월을 한길에서 만나는 사람한테 왜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못한단 말인가. 그의 요구라면 홍수난 물도 건느겠는데···

성호는 처녀가 휴가를 받은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생각도 신통한것이 못되였다. 장군님의 부르심따라 인민경제계획과제를 래달로 끝내자고 일터마다에서 증산경쟁의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는 이런 때에 처녀가 휴가를 받았을리가 없을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오래도륵 나타나지 않는가.

성호는 오늘이면 행여나, 래일이면 혹시나 하여 매일 출근시간만을 기다리다가는 다리목으로 나갔다.

그가 없는 다리목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물때가 오른 돌다리아래로는 맑은 내물이 여전히 주절대며 홀러가고 개뚝의 실버들엔 오늘도 물새가 앉아 지저귀고있었으나 이제는 그것이 성호를 위해 불러주는 노래가 아니였다.

이때에 와서야 성호는 그가 없는 돌다리는 앞으로도 꽃이 없는 화단처럼 허전할것이고 물이 없는 내가처럼 생기를 잃을것이며 텅 빈 제비둥지를 볼 때처럼 쓸쓸하리란것을 깨달았다.

성호는 처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보고싶었다. 하지만 어데 가서 알아보랴. 아직 이름도 모르고 직장도 딱히 어디인지 모르고있는 처녀를…

하여 근 한달이 지난 어느날 성호는 제사공장앞을 지나다가 차를 세우고 이제는 구면이 되여버린 공장수위와 담배 한대를 나누었다.

수위는 말동무가 없어 갑갑하던차에 그를 만나자 지루한 이야기거리를 찾아내가지고 성호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얼핏 지나는 말로 한 한달전에 공장에서 혁신자로 소문난 한 처녀가 갑자기 배를 끌어안고 병원에 실려가 복막염으로 진단받고 수술을 했는데 경과가 좋지 않아 지배인동무랑 모두 면회를 갔다 왔다는 이야기를 하는것이였다.

그 말을 듣자 성호는 좀더 앉았다 가라고 잡아끄는 수위의 손을 무례하게 뿌리쳐버리고 운전칸에 뛰여올랐다. 그리고는 무작정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퇴원했다는것이였다.

그날밤 성호는 불길한 꿈을 꾸었다. 그러다가 후닥닥 깨여나니 출근시간이였다. 성호는 조반을 뜨는둥마는둥 하고 집을 나섰다.

실버들가지에서 까치가 유난스레 깍깍거렸다. 아침까지의 울음조차도 흉한 조짐으로 느껴지는 불안한 아침이였다. 하지만 다리 저켠에 어제 《중앙병원에 후송되였던 처녀》가 이전처럼 먼저 건너오라고 자기를 기다려주는것을 보았을 때 성호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성호는 어데 갔다 이제 나타났는가고, 내가 무슨 꿈을 꾸었으며 저 반갑다고 우짖는 까치의 울음조차도 내게는 어떻게 들렸는지 동무는 아는가고 기어코 말해주리라 속다짐하며 돌진하듯 다리를 건너갔다. 하지만 정작 그앞을 지나면서는 혀가 쑥 들어가버리고말았다.

처녀가 그동안 얼마나 고와졌는지 그를 마주보기조차 두려워났기때문이였다.

젖살이 오르듯 얼굴에 뽀얗게 살이 오르고 갓 지어 입은 저고리에 품이 좁아보일정도로 가슴노리가 팽팽해졌는데 사람이 보름동안에 이렇게도 달라질가 생각되게 처녀는 다시한번 《새 사람》으로 되여 눈앞에 서있었다.

성호는 자기가 여직껏 손아래 누이처럼 오직 위해주려는 마음 하나로만 대해오던 처녀에 대하여 처음으로 되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오래간만입니다.》 하고는 얼른 그 옆을 지나쳤다.

사업소에 가니 정문에서 성호를 기다리고있던 작업반장이 휴양권을 쥐여주며 년간계획완수자들에게 먼저 차례지는것이니 최동무와 같이 낮차로 당장 금강산으로 떠나라고 하였다.

하지만 사업소적인 계획이 이달이냐, 래달이냐 하고 다투고있는 때에 자기 혼자 휴양을 갈수는 없었다. 그래 후에 가겠다고 우기고있는데 때마침 정문을 들어서던 사업소지배인이 어서 차비를 해가지고 떠나라고 하면서 며칠전 위대한 장군님께서 지금 금강산경치가 제일 좋은 때인데 로동자동무들을 많이 보내주라고 하시였다는 가슴 뜨거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휴양소로 떠나던 그날의 역두.

떠날 차비를 해주면서, 역으로 따라 나오면서, 헤여지던 그 순간까지도 계속 울기만 하던 어머니.

《누이, 오늘같은 날에 왜 자꾸 그러시우.》

그날엔 《징용》에 끌려갔다 한다리를 잃고 돌아온 외삼촌도 다림발이 쭉 간 새 양복바지를 차려입고 역으로 나왔었다.

《어머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삼촌…》

《오…》

아, 그렇게 기쁜 날에 자기는 왜 울었던가. 왜 바래주러 나온 이 웃어른들한테 깍듯한 인사 한마디 변변히 못하고 차칸으로 뛰여들어왔던가.

기적소리란 서글픈것이라고만 여겨왔던 역두여!

부둥켜안은 가슴들우로 사정없이 굴러가던 《징용》, 《이민》의 기관차여.

고마와라, 우리 주인된 내 나라여!

안녕히 계시라, 눈물이 해퍼진 어머니여, 삼촌이여.

기다려다오. 하루 떨어져도 그리워지는 출근길이여, 정든 돌다리여!

성호는 휴양소에 보관된 사진첩에서 먼저기에 왔다 간 그 처녀를 보았다.

처녀는 아슬한 구름다리우에 다리를 드리우고 앉아서 단풍이 짙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사진밑에는 《년간계획을 넘쳐 한 기쁨》이라는 글귀가 씌여있었다.

그 사진을 보고서야 성호는 처녀가 그렇게 통통하게 살이 찌고 고와진 까닭을 알게 되였다.

결국 처녀는 자기가 먹은 살이 내리게 그를 걱정하고있던 사이에 일만경치가 내려다 보이는 구름다리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며 랄랄 노래를 부른것이였다.

성호는 처녀처럼 몸무게가 세키로나 불어가지고 휴양에서 돌아왔다.

처녀가 보름, 자기가 보름, 한달을 헤여졌던 그들은 잃어버린 그 한달을 벌충하는 심정으로 또다시 매일아침 다리목으로 줄달음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다리에서 만나는 시간은 다시 한시간가량 앞당겨졌다. 약속은 없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되는것을 자연스러운것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그때는 온 나라가 년간계획을 오늘 래일로 바라보던 그런 시기였기에…

이전에도 그랬던것처럼 그들을 꼭 같은 시간에 한곳에서 만날수 있게 해준것은 그들자신이 아니라 그들이 실려 살던 세월이였다.

세월이 그들로 하여금 어떤 때는 신새벽에, 어떤 때는 7시반에, 어떤 때는 일요일에 그들스스로 다리목에 나서도특 심장의 문을 두드려준것이 아니였던가.

성호는 다시 총총히 뛰군 하는 처녀를 보았다.

《아니 또 뛰기 시작했습니까?》

물어선 무엇하랴.

지금에 와서 걷는것보다 처녀의 뛰는 걸음새가 더 아름다운데야…

…그날은 성호를 위해 마련된 날이였다. 그날 성호가 출근길에 나서니 여느때에는 그저 눈인사로 지나치던 사람들까지 그에게 《축하합니다.》 혹은 《수고많았습니다. 신문에 사진이 났더구만요.》 하고 인사를 하여왔다. 학교로 가던 아이들까지도 꾸벅꾸벅  절을 하였다. 뭐라고 소곤거리며 마주오다 자기 옆을 지나쳐서는 새떼처럼 흩어지며 까르르 웃던 처녀들…

돌다리에 이르니 가을하늘이 비낀 맑은 돌우로 단풍잎이 떠내려왔다. 처음에는 한두잎 떠내려오기에 무심히 보았다. 하지만 그뒤로 잇달리여 내려오는 빨간색, 노란색, 타는 불색, 분홍색, 하늘색의 아름다운 잎새물을 보자 성호는 그 어떤 황홀한 심정으로 하여 가슴이 툭툭 튀기 시작하였다. 금강산에서만 볼수 있었던 황홀한 단풍잎들이였다. 그것들은 흐르는 물결에 실려 서로 부딪치고 굼닐며 끊임없이 떠내려왔다.

성호는 이루 형언할수 없는 행복한 마음으로 꽃잎들이 련달리여 내려오는 개웃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야에 미쳐오는것은 댕기오리처럼 사라져간 시내물과 그우에 펼쳐진 가없는 가을하늘뿐이였다. 저 하늘밑, 푸른 댕기오리가 시작되는 시내가 둔덕에 빨간 기와를 얹은 처녀네 집이 있을거라고 성호는 생각했다. 이른새벽 처녀는 나물버주기안에다 몰래 감추어가지고 나온 단풍잎을 누가 볼세라 조심조심 물에 띄운다. 한잎 또 한잎… 발길에 묻어나온 강아지가 떠내려가는 단풍잎을 따라가며 《왈왈》 짖는다.

성호는 자기한테 보내오는 처녀의 마음인듯싶은 타는 불색의 단풍잎 하나를 건져내여 수첩갈피에 고이 간직하였다.

그후 어느날 성호는 뜻밖에도 차를 가지고 신의주에 출장을 갔다가 거기서 처녀를 만난적이 있었다. 마침 점심무렵이여서 성호가 차를 세워놓고 역전국수집으로 들어가는데 방금 차에서 내린듯싶은 한 처녀가 마주오며 《아이, 어떻게 오셨나요?》 하며 반가와하였다.

타향에 와서 한고향처녀를 만나자 성호도 몹시 반가왔다.

처녀는 증앙민청에서 조직한 경험발표회에 온것이였는데 그날 성호는 국수그릇을 마주하고 처음으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서로가 인차 피하군 하던 사이였지만 타향에서 만났다는 사정이 그들의 사이를 스스럼없이 만든것이였다.

하지만 고향의 돌다리로 돌아와서는 또다시 이전날의 관계로 되돌아간듯싶었다. 다만 달라졌다면 처녀가 이전보다도 자기를 더 부끄러워한다는것이였다.

하루는 처녀가 거울을 정신없이 들여다보며 걸어오다가 성호를 보고는 깜짝 놀라 거울을 그만 내물속에 떨어뜨렸다.

성호는 처녀의 아름다음이 당장 물에 씻겨 내려가는것만 같은 아찔한 생각에 신발도 벗을사이없이 내물에 풍덩 뛰여들었다. 하지만 성호가 거울을 잡아쥐였을 때에는 처녀가 벌써 봄아지랑이처럼 저멀리에서 가물거리고있었는데 거기로부터 깔깔거리는 맑은 웃음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성호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거울에는 성호 자기가 아니라 얼굴에 흐르는 물기로 하여 해초와 같이 더욱 싱싱해보이는 처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처녀는 방금 머리를 감은듯 빈침을 뽑아 입술에 물더니 고개를 뒤로 젖혀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리고는 칠칠하게 드리우는 머리태를 두손으로 꼭 모아 잡으며 《오, 내 아름다움의 보호자이시여》 하고 수집게 웃는것이였다….

성호는 래일아침에 주리라고 생각하며 거울을 간직했다. 그리고 그것을 주고받는 광경을 그려보았다. 그 광경은 비 멎은 뒤의 무지개처럼 황홀하였다. 그래 래일이 기다려지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래일은 일요일이였다. 성호는 래일이 매우 지루할것이라고 걱정하였다. 다행하게도 일요일날 성호네 온 가족은 외삼촌의 발기로 즐거운 바다가놀이를 떠났다.

기차로 두 역만 가면 경치 좋은 바다가였다.

외삼촌은 그날도 다림발이 선 새 양복바지를 입었는데 의족을 얼마나 잘했는지 성한 사람같았다.

하지만 모처럼 마련되였던 바다가놀이는 중도에서 흐지부지되고말았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거기까지 날아든것이였다.

성호는 허겁지겁 자기를 따라서는 어머니를 외삼촌과 함께 저녁차 타고 오라고 사정하고나서 두 정거장사이를 내처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로부터 두시간후에는 그가 벌써 먼거리 출장을 나갈 때면 늘 가지고 다니던 배낭에다 식량과 소금 그리고 어머니가 따라오면서 꼭 가지고 가라고 당부하던 내복을 꿍져 지고 다리목에 가있었다. 그 시각에 성호는 자기와 비슷한 차림으로 마주 달려오는 그 처녀를 보았다.

성호는 래일 가야 만날수 있다고 생각했던 처녀와 이렇게 만난것을 놀랍게 여기지는 않았다.

서로 약속은 없었지만 이전에도 우리가 이렇게 만나지 않았던가, 하지만 여직껏은 일요일의 이런 시간에, 이런 차림새로, 이렇게 허둥지둥 뛰여오다 만난적은 없었다는것, 어쩌면 노래처럼 자기 박자에 맞추어 흘러가던 우리 생활의 선률이, 그 리듬이 악보상에는 없는 징소리로 하여 무참히 파괴되여버렸다는 생각이 파편처럼 가슴에 박혀왔다.

그것은 처녀의 행동거지에서부터 느껴졌는데 여느때 같으면 건너편에서 자기를 기다려주었을 처녀가 앞을 살피지도 않고 정신없이 다리를 먼저 건너왔다. 건너와서야 기다리고 서있는 성호를 알아보고 흠칫 굳어졌다.

자기를 바라보는 처녀의 그 눈, 그 얼굴, 그 몸가짐…

고속도로 돌아가다 순간적으로 정지되면서 확대되여 들어오는 영화필림의 한토막처럼 하많은 뜻을 담고 자기를 바라보는 처녀의 얼굴이 성호의 눈앞으로 확 다가들었다.

성호는 하루사이에 처녀가 세상풍파를 다 겪은 사람처럼 어른스러워보이기도 하고 어쩌면 폭 늙어버린것 같기도 하여 가슴이 막 답답해왔다.

성호는 얼른 그자리를 피해버렸다. 하긴 처녀가 먼저 자리를 피한것인지도 몰랐다.

성호는 얼마 못 가서 우뚝 멎어섰다.

이 길로 입대하자고 나선 몸으로서 이제 헤여지면 언제 만날지 모르는 처녀의 집주소도 아직 모르고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하여 성호가 서로 주소나 알아두자고, 나는 어디에 가든 아침마다 동무와 만나던 이 돌다리를 잊지 않을것이니 우리 기어이 출근길에서 다시 만나자고 가슴가득한 말이라도 하고 헤여지자고 돌아서니 그때는 처녀가 벌써 하나의 점으로 되여 떨어지고있었다.

아, 주변의 하늘은 여전히 맑은 그대로이고 변고의 장조는 아직 보이지 않는데 가슴은 왜 벌써 이렇게 답답해나고 안타까와지는걸가.

성호는 담배를 찾았다. 담배는 없고 손에 거울이 잡혔다. 래일아침 처녀에게 돌려주자던 거울이였다. 그러자 래일은 아직 앞에 있다는 생각이 성호의 아픈 가슴을 어루쓸었다.

처녀야, 우리 잘 있으라는 인사 한마디도 나누지 못하고 이렇게 헤여졌다고 서운해 맡자.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 우리 못다한 이야기를 보물처럼 간직하자.

신의주에서 너와 만나던 그날이 생각난다.

그때 우리를 그처럼 친근하게 만들었던것이 과연 무엇이였던가.

이제 만일 우리가 그어디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조국이라는 크나큰 감정에 잠기게 될것이니 아껴두자, 그냥 우리가 하게 될 말을…

성호는 처녀와 자기와 돌다리가 그대로 비껴있는 거울을 품속에 고이 간직한채 전선으로 떠났다.

며칠후 처녀도 돌다리를 건너 전선으로 떠나갔다.

바로 이런 젊은이들이 미국놈들과 싸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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