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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들의 발걸음을 더듬다-2

2024년 07월 04일 08:42 력사

이역땅 일본에 건너온 1세동포들은 일제식민지시기는 물론 해방후 온갖 고생속에서도 조국을 위해, 조직을 위해, 동포들을 위해 꿋꿋이 살아왔다. 재일조선인 1세들의 목소리를 소개한다.

조선사람이라는 긍지

정계선씨/교또

정계선씨

1934년 7월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태여난 정계선씨는 산과 계곡 등 자연에 둘러싼 환경에서 가족, 친지들과 모여 살았다.

《아버지는 나를 임신한 어머니를 조선에 두고 살림살이를 위해 이미 일본으로 건너가 일을 했다.》

정계선씨가 조선에서 보낸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를 정성껏 도와준것이 그의 큰아버지였다. 친부모를 여읜 그의 아버지에게 있어서 부모를 대신하는 존재였던 큰아버지는 정씨에게도 많은 사랑을 쏟았다.

《내가 태여났을 때 그 축하로 미역국을 끓여주자고 생각한 큰아버지는 미역을 사러 산을 넘어 거리에 나갔다고 한다.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큰비를 맞아 부은 대량의 미역을 끌며 돌아오셨다.그만큼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한편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의 안부를 확인할수 없어 오래동안 머리를 앓았던 가족들은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는 3살때 어머니와 함께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와 아버지가 있는 고베를 찾았다.

《인간다운 생활은 꿈도 못꾼다.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

낯선 고베땅에서 재회한 가족들은 중로동을 도저히 감당해낼수가 없었다. 그후 숯을 구워파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며 오사까의 산골에서 집을 짓고 살았다.

정씨네 가족은 1945년의 조국해방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오사까에서 효고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아버지는 귀국후의 생활에 곧 익숙되도록 마련된 국어강습소의 건설에 참여했다. 당시 조선말을 할줄 아는 정씨도 강사로 동포자녀들앞에 섰다고 한다.

그후 결국 고향땅에서 살게 될 일은 없었다. 그는 가와니시의 동네에서 친숙해진 친구가 교또에 살고있었기에 그곳 출신인 남성과 결혼할것을 다짐하게 된다. 동네살림을 함께 했던 친구의 존재가 이후의 삶을 결정하는데서 크게 영향을 미친것은 그 친구가 조선말로 소통할수 있는 조선사람이였기때문이다.

정계선씨는 10년간 교또중고의 식당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교또의 동포들이며 일군들중에는 그를 지금도 《어머니》라 부르며 따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는 오랜 세월을 식당어머니로 일한데 대하여 《우리 학교가 조선사람을 키우는 곳이기때문이다.》고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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