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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련결성 70돐/ 자랑찬 력사를 더듬어⑦〉총련탄압을 박차고, 재일동포선수의 첫 월드컵출전

2025년 05월 18일 10:10 총련 기고

오는 5월 25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략칭 총련)의 결성 70돐을 맞이하게 된다.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은 김일성대원수님과 김정일대원수님, 김정은원수님의 천재적예지와 현명한 령도에 의해 결성되고 강화발전되여온 총련의 70년의 로정을 감회깊이 돌이켜보며 은혜로운 사랑과 배려에 감사드리고 총련사업을 보다 높은 단계로 올려세워나갈 열의에 충만되여있다. 총련결성 70돐에 즈음한 이 련재글에서는 총련의 결성과 그 이후의 기간을 10년씩으로 나누어 그 기간의 특징적활동과 사변, 사건중의 몇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8번에 걸쳐 서술한다. 집필은 재일조선인력사연구소 오규상소장이 담당한다.(매주 한번 게재)

2005-2014년

일본당국의 총련과 재일동포들에 대한 부당한 정치적탄압과 인권유린행위를 반대규탄하는 깅끼지방대회(2007.3.3)

총련의 70년의 력사는 일본당국의 차별정책, 탄압정책의 근본시정을 요구하며 주권국가의 해외공민으로서의 자주적권리와 응당한 처우를 요구하여 투쟁하여온 력사이기도 하다.

2002년 9월 조일수뇌회담이 진행되고 평양선언이 발표되였다. 그러나 그후 일본당국과 일부 분자들의 총련과 재일동포들에 대한 탄압책동은 절정에 이르렀다. 특히 일본이 조선에 대한 독자제재를 시작한 2006년부터 일본정부당국, 경찰, 공안당국의 반공화국, 반총련, 반재일조선인 탄압책동은 미친듯이 감행되였으며 그를 반대하는 총련과 재일동포들의 투쟁도 견결히 진행되였다.

일본수상이였던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아무런 근거도 밝히지 않고 총련과 그 구성원을 범죄자로 매도하는가 하면 우르마 이와오 경찰청장관(漆間巌警察庁長官)은 《북조선관계자가 일으키고있는 사건을 최대한 리용하여 수사하도록 전국의 경찰에 요구(*본질상 지시)하고있다.》(2006.11.30)고 뇌까리면서 총련과 재일동포들에 대한 한정없는 탄압을 촉구하였다. 일본당국은 총련관련시설에 대한 고정자산세 등의 징수, 조선선박의 입항금지, 조선과의 수출입차단 등 공화국과 재일동포를 리간시키며 장차 총련을 소멸시키려고 로골적으로 책동하였다.

2006년 11월 27일, 일본 경시청공안부(警視庁公安部)는 재일동포녀성이 의약품을 조국방문시에 가져가려고 한 과거의 사실을 놓고 《약사법위반용의》로 감행한 강제수색에 언론보도기관과 무장기동대를 대거 동원하여 동포녀성의 자택, 총련 시부세(渋世)지부사무소, 총련 도꾜도본부와 니이가다출장소, 조국왕래기념관과 창고, 니이가다에 있는 일본운송회사까지 일제히 강제수색하였다.

계속하여 일본경찰당국은 《국외이송목적유괴(国外移送目的誘拐)와 감금 등 용의》, 《로동자파견법위반》, 《세리사법위반》, 《전자적공정증서원본불실기록 동공용(電磁的公正証書原本不実記録同供用)》, 《관세법위반》, 《소득세법위반》 등의 구실을 붙여 총련의 각급 기관과 상공회를 비롯한 산하단체, 사업체, 동포자택에 대한 불법적인 강제수색을 대대적으로 벌렸다.

총련과 재일동포들은 일본당국의 정치적탄압, 불법적인 탄압책동을 반대하여 참으로 견결히 투쟁에 나섰다. 탄압책동의 현장에서의 항거투쟁, 경찰기관에 대한 항의투쟁, 성명, 담화 등을 통한 대내외에 립장표명과 주요 역두에서의 삐라살포, 긴급집회와 중앙과 지방에서의 대소의 단죄규탄대회, 경찰당국의 의도를 담아 모략기사를 보도한 신문사에 대한 항의투쟁, 조청, 류학동, 녀성동맹과 어머니회, 교직동 등 계층별 동포단체들의 투쟁, 국회앞에서의 앉아버티기투쟁과 가두시위투쟁 등 광범히 전개하였다.

단죄규탄대회중에서도 2007년 3월 3일에 진행한 도꾜 히비야공원대음악당(日比谷公園大音楽堂)에서 개최한 일본당국의 총련과 재일동포들에 대한 부당한 정치적탄압과 인권유린행위를 반대규탄하는 재일본조선인중앙대회는 특기할 일이였다. 이 대회를 두고 도꾜도당국과 우익세력들은 대회장의 사용과 이후의 시위행진마저도 방해하려고 온갖 책동을 감행한것이다. 총련의 정당한 립장을 도꾜고등재판소도 인정하여 대회는 7,000여명의 동포들로 진행되였다. 이날 깅끼지방대회가 동시진행되고 규슈지방대회(3.10) 그리고 아이찌, 야마구찌 등에서도 진행되였다.

그뿐아니라 총련은 일본인민들을 비롯하여 국제적인 지지여론을 환기하기 위한 사업도 벌렸다. 제4차 유엔인권리사회(2007.3)에 총련대표단을 파견하여 일본당국의 책동을 폭로규탄한것은 하나의 례이다. 이후에 강제수색을 당한 몇단체들은 국가배상청구재판을 비롯하여 법정투쟁도 벌렸다.

지금도 일본당국에 의한 제재조치와 탄압정책은 계속되고있으나 반대투쟁에 떨쳐나선 총련과 동포들의 투쟁정신은 조국사수, 총련고수의 애국애족정신의 과시이며 이어나가야 할 고결한 전통으로 될것이다.

재일동포선수들이 2010년 월드컵에 출전한 조선대표로서 활약하였다.

4년에 한번 진행되는 세계축구선수권대회(월드컵)는 세계의 축구선수와 애호가들뿐아니라 전 세계적인 이목을 끄는 체육행사의 하나이다. 지역별예선을 거쳐 상위팀만이 출전자격을 가지는 경기이다. 개인의 재간이나 특수한 재능이 있다고 하여 그 무대에 오를수 있는것이 아니다.

2010년 월드컵 남아프리카대회에 전 세계가 이목을 끄는 속에서 조선팀이 44년만에 출전하는것만도 동포들에게 있어서는 각별한 관심이 쏠렸는데 이 월드컵에 민족교육의 화원에서 자란 재일동포축구선수가 조선팀의 한 성원으로 참가한다는것은 동포사회의 일대 사변이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였다.

이 대회에 안영학(당시 31살, 오미야아르디자), 정대세(26살, 가와사끼프런타레),량용기(28살, 베가르다센다이)선수들과 김광호감독(재일본조선인축구협회 부회장)이 조선팀 성원으로 참가하게 된 소식은 재일동포사회에 커다란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재일동포축구선수도 공화국국가선수로서 활약하는 무대가 있는구나》, 《우리도 노력만 하면 세계무대는 차례진다.》고 출전결정당초부터 큰 반향이 일어났다.

조선팀은 6월 16일,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부르그경기장에서 우승후보 브라질팀과의 련맹전 첫 경기에 림하였다. 조선팀은 1 대 2로 아쉽게도 패하였으나 두 재일동포선수들은 기둥선수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경기에 출전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조선팀은 련맹전을 돌파하지는 못했으나 많은 교훈을 얻었으며 새 전망을 가지게 되였다.

월드컵에 동포선수들이 참가했다는 력사적사실은 조국은 그 언제나 재일동포들을 조국인민들의 한 구성원으로 보고있다는 증좌이다. 또한 우리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장차 축구선수를 희망하는 청소년들에게 신심을 안겨주었다. 해마다 진행되고있는 《재일조선초급학교 중앙축구대회》(꼬마축구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에게도 앞날에 대한 희망과 포부를 크게 안겨준 력사적사변의 하나였다.

(재일조선인력사연구소 소장 오규상)

주요년표 2005-2014

2006.11.30 일본경찰당국의 총련조직과 동포녀성에 대한 부당한 강제수색을 단죄규탄하는 재일조선인중앙집회 진행
2007.2.4  일본당국에 대한 조청원들의 항의집회 및 시위투쟁이 효고, 교또, 오사까, 시가를 비롯한 조청일군들과 맹원들, 동포들의 참가밑에 진행
2007.3.3 일본당국의 총련과 재일동포들에 대한 부당한 정치적탄압과 인권유린행위를 반대규탄하는 재일본조선인중앙대회 진행
2007.5.2 아베정권과 경찰당국의 총련산하단체에 대한 파쑈적강제수색을 단죄규탄하는 재일본조선인중앙대회 진행
2010.3.27  일본시민사회단체주최로 고등학교무상화제도에서 조선학교배제를 반대하는 긴급행동 도꾜 시브야에서 진행
2014.9.6∼27  허종만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공화국창건 66돐경축 재일조선인축하단 조국방문

【해설】이 기간은 총련결성이래 내외반동들의 반공화국, 반총련, 반재일조선인책동이 극치에 이르렀으나 수령과 조국에 대한 드놀지 않은 신념을 가지고 정면돌파전을 벌려 총련조직과 동포사회를 굳건히 고수한 기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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