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품속에서 꽃펴난 나의 꿈》/사회주의조국에 귀국한 동포들의 회고담
2017년 04월 21일 10:01 공화국 민족교육【평양발 김유라기자】재일동포자녀들에게 조국에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여온지 올해로 60돐이 된다. 일본에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받아 배운 학생들속에는 조선에 귀국한 사람들도 많다. 사회주의조국의 품속에서 배움의 꿈을 실현한 사람들은 60년전 감격의 그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있다.
감격속에 받아안은 교육원조비
《자전거로 1시간, 기차를 타고 1시간, 걸어서 또 반시간…그 당시는 조선학교가 많지 못했으니 민족교육을 받자면 먼곳에 있는 학교에 다녀야 했다. 통학비, 자전거보관비 그리고 학교에 그 당시 돈으로 약 1,300엔을 월사금으로 바쳐야 했다. 아이들을 조선사람으로 키우고싶은 간절한 마음은 있어도 가난에 시달리던 동포들속에는 아이를 우리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첫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여온 1957년 4월, 세이방조선중학교(당시) 1학년이였던 곽창만씨(72살)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이역땅에서 어렵게 생활한 동포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받아안았을 때 감격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수 없다고 한다.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받아안게 된 소식에 접하여 아이들이 너무 좋아서 〈만세!〉를 부르고 껑충껑충 뛰던것이 어제일 같다. 그때로부터 우리는 월사금을 물지 않고 학교에서 공부를 할수 있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멀리 있는 동포자녀들을 생각하시여 교육원조비도 보내주시고 2년후에는 재일동포들을 위한 귀국의 길까지 열어주시였으니 모든 동포들이 수령님과 조국을 그리며 희열에 들떠있었다.》
같은 세이방조선중학교에 다닌 곽창만씨 부인인 백복순씨(70살)도 그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백복순씨네 집에서는 아버지가 고철(古鉄)을 모으는 일을 하고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복순씨의 4살우의 오빠는 세이방조선중학교를 졸업하고 다까사고조선초급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당시 교원들은 로임을 받지 못하고 학부형의 집에서 숙식하며 생활하군하였다. 그러나 조국에서 교육원조비를 보내여온것으로 하여 오빠가 처음으로 로임을 받고 돌아왔다. 로임봉투속에는 1,000엔짜리 9장이 들어있었던것으로 기억하고있다. 가족들이 다 놀라고 얼마나 기뻐하였는지 모른다.》
도꾜조선제9초급학교에 다니던 오광석씨(65살)네 집도 홀어머니가 세남매를 키우느라 생활형편이 어려웠다. 그는 《우리 세남매는 다 우리 학교를 다녔는데 담배장사를 하던 어머님이 번 돈만 가지고는 불가능한 일이였다. 나는 첫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여온 이듬해인 1958년도에 도꾜조선제9초급학교에 입학했다. 나에게 민족교육의 첫 걸음을 내디디게 해준것은 바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이였다.》고 뜨겁게 회상한다.
과학연구의 길에서
1959년 12월 첫 귀국선이 니이가다항을 출항하였다.
1961년에 귀국한 오광석씨는 《당시 우리 학교 국어교과서에는 조국의 현실이 많이 소개되여있었으며 선생님들도 우리에게 조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민족교육은 우리의 마음속에 조국에 대한 사랑이 싹트게 해주었으며 우리는 조국땅에서 자기 꿈을 꽃피울 그날을 갈망하게 되였다.》고 돌이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