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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학교 6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발제론문/정기열교수

2016년 11월 22일 10:30 조국・정세

남녘, 북미주 포함 해외동포사회 일반의 “민족교육부재문제”에 대한 비판적소고

– 재일(총련)동포운동이 70년 꽃피운 “위대한 민족교육운동사” 시각에서 –

2016년 11월 12일

들어가는 말: ‘노예로동’으로 시작된 1세기 북미주이민사

북미주대륙(카나다 포함) 특별히 “아메리카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에 오늘의 수백 만 ‘코리안-아메리칸콤뮤니티’(미주’한인’공동체)가 형성되기까지 약 110년의 세월이 흘렀다. 20세기 초 “꼬레안”(Corean)들이 미국에 첫발을 디딘 때는 조선시대 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다해가던 때다. 1세기를 넘긴 미주이주사는 1902년 12월 2일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만 40일 뒤인 1903년 1월 13일 자정 하와이(사탕수수농장)에 도착한 ‘86명” 첫 조선이주자들로부터 시작된다. 20세기 초 ‘노예로동’으로 시작된 미주이주사 배경에는 크게 다음과 같은 세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1901-1902년 혹심한 가뭄, 홍수로 관서지방에 발생한 대기근; 둘째, 당시 중국, 일본으로부터의 ‘인력수출’이 중단되며 발생한 하와이사탕수수농장 자체의 노동력 부족; 셋째, 조선에 대한 미국기독교단(감리교)의 ‘선교프로젝트’가 핵심배경이었다. 참고로 1902년 제물포를 떠난 조선노동자는 본래 121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와이에 모두 다 가닿지 못했다. 일본 고베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받은 1, 2차 신체검사 때 1차에 먼저 20명, 2차에 15명이 탈락되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결국 86명만 미국땅에 첫발을 디딜 수 있었다. 참고로 당시 86명 중 남자는 48명, 여자는 16명, 아이들은 22명이었다.

2년 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소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됐던 때까지 약 2-3년 모두 약 7,000명의 “조선로동자”가 하와이사탕수수농장으로 “팔려갔다”. 조선사람들의 미주집단이주는 그러나 ‘한일합방’이 강제된 1910년 전후 아예 금지된다.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하기 위해 관련 자료 하나를 소개한다.

… 최초의 이민선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1903년 1월 13일부터 일본의 제지로 이민이 중단된 1905년 7월까지 65척 선편으로 7,226명(남자 6,048명, 여자 637명, 어린이 541명)이 하와이로 들어갔으나 이들 중 479명이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받아 되돌아 왔으므로 1903-1905년 사이 하와이로 이민 간 전체 조선인노동자는 총 6,747명이다. 이민자 중 농부는 불과 1/7이었고 대부분은 막노동자들이다. 또한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사람이 전체의 약 65%였다. 초기 이민자들은 기독교인이 다수고 목회자(목사), 유학생, 향리의 선비, 광부, 군인, 농촌의 머슴, 역부, 건달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05년부터 45년 일제 패망까지 미국 거주 조선사람 증가수는 따라서 완벽하게 멈춘다. 조선노동자들의 해외이주 자체를 아예 금지시킨 배경엔 물론 ‘카츠라-테프트밀약’으로 알려진 1905년의 미일간 야합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망국노’로 전락한 조선사람에게 당시 “해외취업이주”란 말 자체는 실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패망까지 끝없는 해외침략전쟁과 동아시아지역에 대한 식민지영토확장, 팽창, 지배, 통치, 착취, 수탈에 “로동력”이 절실했을 일제가 그들에게 있던 공짜나 다름없는 ‘식민지로동력’을 ‘취업이주’ 명목으로 미제에게 뺏길 수 없었던 것은 그들에겐 당연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두 부류다. 하나는 역사에 ‘사진신부’로 알려진 경우다. 또 다른 부류는 초기 ‘조선인류학생’들이다. 사진신부 역사는 하와이로 이주해간 당시 조선노동자 대부분이 20대 남성들이었던 배경에서 시작된다. 당시 하와이사탕수수농장의 여성부족 문제를 푼 것이 ‘사진신부’들이다. 일제시대 20세기 초기 또 하나의 비극적 역사가 탄생한 배경이다. 참고로 사진신부 수는 1910년부터 1925년까지 모두 9백51명에 달했다. 당시 조선인들의 미주이주 자체가 아예 금지됐던 1905년 이후에도 그러나 꾸준히 미국땅을 밟은 또 다른 예외가 있다. 조선인유학생들이다. 기록에는 정확히 1924년까지 약 ‘500 명의 조선류학생’들이 미국 땅을 밟았다. 사진신부들과 달리 ‘류학생’ 대부분은 당시 2천 만 식민지조선민중과 다른, 대단히 다른 극소수의 특수한 예외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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