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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우리들의 학교 -나라초중 동창회에 참가하여-

2012년 06월 27일 16:37 민족교육

깅끼지방이 장마철에 들어선 날, 비걱정을 하면서 학교를 향하였다. 당일 아침의 날씨예보는 흐림후 개임을 알리고있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학교행사라면 의례히 날씨가 좋기를 바라는 법이다.

미미나시역을 내려 학교로 발을 옮기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환한 웃음을 띄운 김선생이였다. 25년전 함께 사업하던 녀교원이다.

4년전 초가을 나라초중이 부득이 일시휴교하게 된 소식을 듣고 오사까로 가는 도중에 여기를 찾은바 있었다. 교문 오른편 울타리에는 《나라초중은 영원한 우리의 모교입니다.》고 씌여져있었다.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이곳 우리 학교 역시 졸업생들만이 아니라 학부모들, 당시 교원들, 본부, 지부의 일군들, 모든 관계자들에게 있어서 학교는 잊을수 없는 생활의 거점이였고 동포들의 모임의 중심이였음을 보여주고있었다.

각지에서 달려온 나라초중 동창회 참가자들

선대의 뜻을 이어

10일,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된 동창회모임에 대해 많은것을 느꼈지만 두가지만 적으려 한다.

하나는 학교를 몹시 귀중히 여기고 계속 굳건히 지켜가려는 나라동포들의 마음이다.

졸업생들과 청상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여 조직된 행사의 종자는 《나라학교, 우리 학교 (나∼らのハッキョ)》였다. 그것은 학교의 자랑찬 력사를 서로 더듬어보며 학교의 미래를 함께 그려보자는것으로 일관되여있었다. 초창기에 새 교사를 짓고 학교사업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리달규, 리성규씨의 부친을 비롯한 애국의 선대들의 공적이 소개되였다. 리달규씨는 교가를 들으면서 눈물을 금치 못해하였다.

동생 성규씨는 실행위원장이란 중책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두 형제와 모친을 함께 만난 자리에서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끝까지 학교를 지키며 유치반의 재개원을 실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모친께서는 《마땅히 그래야지.》 하고 대견스레 아들들의 얼굴을 바라보고계시였다.

이날 행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였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규슈에서 온 졸업생도 있었다. 력대 교장 10명중 7명이 참가하고 교장재직중에 서거한 문병수교장의 부인도 소개되였다. 력대 교장들을 대표하여 2대교장인 김광성씨가 학교건설당시에 깃든 이야기를 피로하였다.

학교안팎은 깨끗이 청소되여있어 당장 수업을 할수 있는 상태였다. 운동장 주변의 꽃밭도 잘 가꾸어져있었다. 지금 있는 우리 학교들과 대비해도 손색이 없었다. 졸업생들과 청상회 회원들은 학교미화사업를 꾸준히 진행하고있다. 언제든지 학교를 재개할수 있게 준비해온것이다. 학교를 몹시 귀중히 여기고 계속 굳건히 지켜가려는 나라동포들의 마음이 이날 행사를 성공시킨 요인일것이다.

나라초중의 추억으로 이야기꽃을 피운 참가자들

인상깊은 학교

또 하나는 제2부 연목중 특히 《제40기 나라조선초중급학교 졸업식》에 아주 감동했다는것이다.

2008년 3월의 졸업식이후 재학생들은 산넘어 히가시오사까조선초급학교에 다니고있는데 휴교가 안되였으면 마땅히 받을수 있었던 졸업증서를 이날에야 수여받게 된것이다.

당시 교무주임이였던 림수란선생이 호명하고 5명이 무대에 섰다. 당시 교장이였던 구영태씨(현재 후꾸시마초중 교장)가 졸업증서를 읽고 수여하였다. 5명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보고있는 참가자들도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나 역시 그랬다.

각기별 졸업생들이 소개되고 그들도 참가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들을 보고있으니 26년전 미에현 이가시로 가정방문하던 일이 떠올랐다. 학교까지 2시간이 실히 걸리는 장거리를 통학시키는 아버지 림씨한테 그 동기를 물으니 우리 학교에 보내는것은 마땅한 일로 생각한다는것이였다. 당시 주변에서는 이들 부모를 가리켜 《귀신같은 부모(鬼のような親)》라는 말까지 들려왔었다고 한다. 내가 가정방문하던 시기는 큰 딸이 다니는 시기였는데 결국 4자매가 나라초중에 다닌 셈이다.

이들을 포함하여 검뀁에서 통학하던 사람들이 소개되였을 때도 역시 큰 박수가 터져올랐다.

《졸업증서 수여》도 《졸업생 소개》도 나라학교재개에 대한 모두의 한결같은 지향의 표시였다. 당면 유치반의 재개를 목표삼아 사업하겠다고 총련본부 소철진위원장, 윤원식고문이 힘찬 어조로 말하였다.

동포들이 늘 모여드는 공간으로 하며 나라력사교실, 사물놀이교실, 민족악기교실, 무용교실 등을 운영하면서 유치반의 재개를 지향한다고 한다.

4시간에 걸친 모임은 끝났다. 교문을 나서려 하니 방금전까지 뜻깊은 한때를 함께 보냈던 문씨가 달려와 다시 굳은 악수를 나누고 작별인사를 하는것이였다. 그는 내가 재직하던 당시 교육회 부회장이였다. 학교운영의 어려운 고비를 함께 지낸 동지였다.

창립이래 올해로 43년이 되는 이 학교에서 내가 사업한것은 4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근 40년간의 교원생활에서 가장 인상에 남아있는 학교중의 하나다.

돌아가는 길, 전차칸 창문너머로 학교 교사를 바라보면서 유치반이 재개되는 날, 원아들의 《아침인사 노래》를 꼭 들으러 오겠다고 다짐하였다.

(조광훈, 교직동중앙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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