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령유권》주장을 배격하는 백서
2012년 05월 29일 17:10 력사종합대학 력사학부에서 발표
조선중앙통신에 의하면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에서 28일, 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에 대한 상보를 발표하였다. 상보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독도는 그 누구도 침해할수 없는 우리 나라의 신성한 령토입니다. 》
지난날 조선을 침략하고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들씌운 일본이 우리 나라의 신성한 령토인 독도를 감히 넘겨다보며 령토강탈책동에 더욱 광분하고있다.
2월 22일을 《다께시마의 날》로 제정하고 해마다 독도강탈광대극을 벌려온 일본반동들은 독도가 《일본고유의 령토》라고 쪼아박은 《외교청서》를 2009년부터 발표하고있으며 올해에도 같은 내용의 2012년판 《외교청서》를 발표하였다.
그런가 하면 지난 4월 11일에는 력사상 처음으로 도꾜의 한복판에서 독도가 《일본땅》임을 주장하는 대규모집회를 열었다.
이것은 결국 독도강탈책동이 일본정부당국의 공식립장이 되여 더욱 악랄한 단계에서 추진되고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
일본이 쩍하면 념불처럼 외워대는 《독도령유권》주장이 아무런 법적, 력사적타당성도 없는 날강도적궤변임을 다시한번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하여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는 이 상보를 발표한다.
1. 독도는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조선의 땅
독도가 예로부터 조선의 섬이였다는것은 구체적인 력사자료가 명명백백하게 실증해주고있다.
고대시기는 물론 삼국시기에 와서도 고구려, 신라의 주민들은 울릉도와 독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
《삼국유사》의 《연오랑과 세오녀》전설은 기원후 첫시기부터 신라주민들이 동해의 울릉도-독도를 거친 항해길을 따라 일본의 이즈모(오늘의 시마네현)지방에 진출하여 선진문화를 보급한 사실을 보여주고있다.
특히 고구려가 4세기말부터 삼국통일을 위한 남방진출을 강화하면서 5세기말~6세기초에 신라의 청하지역(경상북도 포항시)에까지 진출한 사실은 이 시기 고구려사람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자기들의 령역안에 포함시켰다는것을 보여준다. 당시 고구려사람들은 동해의 울릉도-독도를 거친 항해길을 따라 일본의 노또반도에 진출하여 그 남쪽의 나가노현과 주변일대에 퍼져살면서 일본에 자기의 선진문명을 전파하였다.
최근시기 울릉도에서 고구려사람들이 쓰던 고배(굽높은 잔)가 발견된것은 그 일단을 증명해준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이 시기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우산국의 주민들이 고구려사람들이였다는것을 명백히 알수 있다.
그후 신라는 북쪽으로 령토를 확장하면서 512년에 우산국을 자기 주권에 포함시키였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 지증왕13년)
이리하여 삼국시기 우산국은 정식 울릉도와 독도로 이루어진 우리 나라의 독자적인 지방행정단위로 되였다.
이 시기 독도의 첫 이름으로 불리운 우산도의 의미만 보아도 이 섬이 조선의 섬이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우산도란 이름은 고구려시기 울진현(경상북도)의 옛 이름인 우진야현(《신증동국여지승람》 권45 울진현 건치연혁조)에서 기원되였다. 우진야현의 《우》자는 삼국시기 웃쪽, 웃부분이라는 한자의 음을 옮긴것이고 《진야》자는 돌이, 드르, 들이라는 들판, 벌판의 뜻옮김이다. 우산도의 《우》자도 우진야의 《우》와 같은 한자의 음옮김이며 《산》자는 뫼라는 《산》자의 뜻옮김으로서 역시 웃쪽의 산 즉 높은 지대를 가리키고있다. 따라서 우산은 우진야현의 이름과 같은 말이다.
울릉도의 처음이름인 무릉, 우릉이란 이름도 우산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우진야현의 이름에서 기원되였다.
이러한 지명유래는 당시 울릉도를 개척하고 살면서 울릉도를 자기 고장의 이름과 같이 무릉, 우릉으로 부른 우진야현(울진현)을 비롯한 동해안의 우리 주민들이 봄, 여름, 가을철에 독도에 건너가 물고기잡이를 하면서 독도에도 역시 자기 고장의 이름인 《우산(우산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것을 말해준다.
발해와 후기신라가 병존하던 시기에 이르러 우산국은 후기신라에 속하였다.
이후 우산국은 우리 나라의 첫 통일국가인 고려에 소속되여 그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12세기 중엽후 우산국은 조락하고 고려의 울진현에 편입되였다.
《고려사》(권58) 지리지에서는 울릉도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이에 대한 주해로 《우산(독도), 무릉(울릉도)은 본래 두개의 섬으로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은 날이면 바라볼수 있다. 》고 첨부함으로써 두 섬이 뗄래야 뗄수 없는 고려의 섬,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확증하였다.
그후 리조봉건국가는 초기에 울릉도에 대한 왜구의 침입이 잦은것과 관련하여 섬주민들을 보호, 통제하려는 목적밑에 섬을 비워두고 대신 수토관(조사관)을 정상적으로 파견하여 섬을 조사장악, 통제하는 일시적인 《공도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리조봉건국가의 이러한 《공도정책》에도 불구하고 울진현을 비롯한 조선동해안의 주민들은 울릉도에 건너가 살면서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투쟁을 벌리였으며 독도에까지 가서 물고기잡이를 하였다. (《태종실록》 권33 12년 4월 기사, 16년 9월 경인, 17년 2월 을축)
리조전반기에 독도는 《삼봉도》로 불리웠는데 이것은 15세기경에 조선동해바다가 주민들 특히 영안도(함경도)주민들이 독도에 가서 물고기잡이를 하면서 섬을 조사하는 과정에 독도에 두개의 큰 바위섬(동도, 서도)과 그 가운데 작은 바위섬이 있는것을 보고 새롭게 붙인 이름이다. (《성종실록》 권15 3년 2월 경오)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울릉도인 무릉도와 독도인 우산도가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우리 나라 섬으로 명백히 서술되여있다.
또한 리조봉건정부는 일본의 쯔시마도주가 《거주》요, 《탐사》요 하면서 독도를 놓고 교활한 술책을 쓸 때마다 제때에 타격을 주어 그들의 독도침략기도를 단호히 일축해버리였다.
특히 경상도 동래의 어민 안룡복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일본인들의 침략과 략탈이 강화되자 1693년(숙종19년) 일본의 호끼번주를 찾아가 담판을 벌려 그들로 하여금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섬이라는것을 확고히 인정하게 하였으며 또 당시 일본 도꾸가와막부정부의 관백에게서 서계(확인문서)까지 받아내는 과감한 투쟁을 벌리였다.
18세기말경에 와서 한때 독도는 《가지도》로 불리웠는데 《가지》는 물개라는 말로서 이 시기 이 섬에 물개가 많은데서 유래되였다. (《증보문헌비고》 권1 여지고19 관방1 해방1 동해 울진조)
리조봉건국가는 1882년에 리규원을 울릉도검찰사로 하여 102명이 망라된 현지조사단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조사하였으며 이에 기초하여 륙지의 인민들을 울릉도로 적극 이주시켜 섬의 농경지를 개척하고 울릉도의 행정관리로서 도장을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그리고 1883년 3월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을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사》(동해안과 남해안의 여러 섬들의 개척과 고래잡이를 맡은 관리)로 임명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맡아보게 하였으며 당시 울릉도에 와서 비법행위를 하던 일본인 254명을 전부 쫓아버리게 하였다.
리조봉건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으로 많은 우리 주민들이 울릉도에 건너가 살게 되면서 당시 섬주민은 400여호에 1,700명으로 늘어나고 경작지는 무려 7,700마지기나 되였다.
울릉도의 주민들이 늘어나면서 그 부속섬인 독도에 대한 이곳 주민들의 생산활동도 더욱 적극화되였다. 1904년 11월 일본군함 《쯔시마》호가 독도침략을 노리고 이곳을 몰래 조사하여 일본명치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매해 여름이 되면 울릉도에서 많은 사람(조선사람)들이 이 섬(독도)에 건너와서는 섬우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부근에서 어업에 종사한다. 》고 기록한것은 그 일단을 보여준다.
울릉도와 독도에서 우리 주민들의 생산활동이 활발히 벌어지고 반면에 독도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략탈이 강화되기 시작하자 리조봉건정부는 1900년 10월 25일 칙령 41호를 공포하여 독도에 대한 조선의 령유권을 정식 선포하였다. (《관보》 제716호 1900년 10월 27일)
이처럼 조선측사료들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사람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발견되고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민에 의하여 개척되고 장악리용되였으며 섬에 대한 우리 나라의 주권이 단 한번도 포기되여본적이 없는 명실공히 조선의 섬이였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준다.
2. 일본사료를 통해 본 조선의 고유한 령토 독도
중세와 근대, 현대에 걸치는 일본측사료들에도 독도는 조선의 령토로 되여있어 일본반동들의 《독도령유권》주장의 허황성을 폭로하고있다.
독도가 일본측사료들에 나타나기 시작한것은 17세기부터이다.
이때로부터 근 300년간에 걸쳐 일본의 거의 모든 사료들에는 독도가 조선의 섬으로 기록되여있다.
우선 중세기에 만들어진 거의 모든 일본측사료들은 독도를 우리 나라의 섬으로 명백히 기록하고있다.
일본사료인 《호끼민담기》에는 호끼주의 요나꼬지방 어업가들인 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이 1616년에 호끼(백기)번주(우두머리)에게 죽도(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허락해줄것을 제기하는 《죽도도해면허》를 제출하였는데 그들의 신청에 대한 승인이 당시 호끼번주의 사망으로 중단되였다가 그 다음해 이곳에 파견된 도꾸가와막부의 관리 아베를 통해 다시 제기되여 막부의 승인을 받았다(《호끼민담기》 1 오다니와 무라가와가 바다를 건너 왕래한 일)고 기록되여있다.
《죽도도해면허》는 말그대로 죽도인 울릉도가 있는 수역으로 건너갈수 있다는 허가증으로서 자기 나라의 바다와 섬이 아닌 울릉도수역에서 물고기를 잡겠다는 요청을 《승인》한 문서이다. 따라서 《죽도도해면허》는 울릉도가 자기 섬이 아니라는 일본정부의 《확인서》이며 그 부속섬인 독도도 일본섬이 아니라 조선의 섬이라는것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이다.
《송도도해면허》역시 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이 1661년에 일본령해를 벗어나 송도인 독도수역으로 나갈수 있게 해달라고 신청하여 도꾸가와막부의 승인을 받은 허가증이다. 일본어업가들의 《송도도해면허》와 그에 대한 막부의 승인은 당시 일본의 민간인들이나 도꾸가와막부정부가 독도(송도)를 자기 섬으로 여기고있지 않았다는것을 공식 인정한것으로 된다.
또 다른 자료들인 《은주시청합기》는 이즈모(운주)관리 사이또가 이즈모번주의 지시로 1667년에 일본의 서북변방의 섬인 오끼도(은주)를 답사하면서 이곳과 그 주변 바다와 섬들을 조사하여 제출한 보고서이다. 보고서에 의하면 《두 섬(울릉도와 독도)은 무인도인데 고려(조선)를 보는것이 마치 이즈모(운주)에서 오끼도(은주)를 보는것과 같다. 그런즉 일본의 서북경계는 이 주(은주)로서 그 한계를 삼는다. 》라고 기록되여있다. (《은주시청합기》 권1 국대기부)
《은주시청합기》의 이 사료는 이즈모관리가 당시 상부의 지시로 실지답사와 조사에 기초하여 편찬한것으로 하여 신빙성과 사료적가치가 높다.
17세기에 편찬된 일본사료들에는 안룡복사건과 그를 전후한 시기 쯔시마와 도꾸가와막부정부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섬들이라는것을 정식 인정한 내용이 들어있다. 죽도(울릉도)와 그밖의 한 섬(독도)을 조선의 섬들이라고 인정한 도꾸가와막부정부가 1696년 1월에 내린 결정을 기록한 《조선통교대기》의 사료, 1696년 10월 쯔시마의 신임도주가 리조봉건국가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확인한 도꾸가와막부정부의 결정지시문을 전달한 내용을 담고있는 《죽도기사》의 사료, 이 시기 리조봉건정부와 도꾸가와막부정부가 울릉도와 함께 독도가 조선의 령토임을 문서교환형식으로 공식 인정한 《공문록》의 사료 등은 당시 일본인들이나 일본정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섬이라고 인정하고있었음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중세 일본에서 제작된 각종 지도들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령토로 그려져있다.
중세 일본에서 제작된 지도들인 《조선경도일본대판서국해변항로지도》(1748년), 《일본여지로정전도》(1775년), 《조선8도지도》(1785년), 《삼국통람여지로정전도》(1785년), 그리고 《8도총도》(1802년), 《일본변계략도》(1832년) 등에는 독도와 울릉도가 조선의 섬으로 표기되여있다.
특히 《삼국통람여지로정전도》에는 울릉도와 독도옆에 일본어로 이 섬들이 조선이 소유한 섬들이라고 명백히 기입되여있다.
근대시기에 와서도 일본 명치정부의 외무성, 내무성, 태정관은 여러차례 발표한 자기의 국가공문서들에서 독도를 조선의 섬으로 명백히 밝혔다.
1869년 일본외무성이 조선침략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이에 대해 작성한 공문서인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와 1877년 3월 명치정부의 내무성공문서, 1877년 3월 20일 명치정부의 태정관공문서 등에는 울릉도, 독도가 조선의 섬으로 기록되여있다.
특히 1877년 3월 20일 일본 명치정부의 태정관이 내무성에서 제기된 공문서를 접수하고 검토한 후 내려보낸 지시문인 태정관공문서에는 《질문한 죽도(울릉도)와 그밖의 한 섬(독도)에 관한 건에 대해서는 본방(일본)과 관계없는것으로 할것》이라고 일본 명치정부의 최종결정이 밝혀져있다. (일본 명치정부 태정관 지령문 1877년)
이 지령문은 3월 29일 내무성에 하달되고 4월 9일에는 시마네현에 전달되여 모든 절차를 끝냈다. 그리하여 시마네현으로부터 제기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령유권문제는 일본정부가 이 섬들이 조선의 섬이라는것을 인정하고 재확인한것으로 막을 내리였다.
근대시기 일본의 주요군사기관이였던 해군성의 자료들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섬이라는 내용을 게재하고있다.
일본해군성은 1886년에 편찬한 세계수로지인 《환영수로지》에서 독도를 제4판 《조선동해안》조에 기록하였으며 1889년에 《일본수로지》, 《조선수로지》 등 나라별로 편찬하면서 독도를 《조선수로지》에 포함시켰다.
이것은 당시 일본해군성이 독도를 자기 나라의 섬이 아니라고 인식하고있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근대시기 일본에서 제작된 많은 지도들에도 울릉도, 독도가 조선의 섬으로 표기되여있다.
주목되는것은 일본지도들에서 독도를 19세기까지는 소나무가 많이 자란다는 《송도》(마쯔시마)로 표기하다가 20세기초부터 영국사람들이 오기한 영향으로 참대가 많이 자란다는 《죽도》(다께시마)로 원래의 울릉도이름과 바꾸어 표기한것이다. 가관은 당시 일본지도들에 명기된 독도의 이름과는 달리 이 섬은 소나무나 참대를 비롯한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돌섬이라는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당시의 일본인들이 독도에 대한 초보적인 표상조차 전혀 가지고있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독도가 일본의 섬이 아니라는것을 알수 있다.
이렇게 근대초기까지도 일본의 많은 문서들과 지도들에 조선의 섬으로 기록되였던 독도는 일제의 조선강점과 식민지화가 현실적인것으로 되면서 급전환하여 일본의 섬으로 외곡표기되기 시작하였다.
1904년 나까이 요사부로의 《리앙꾸르섬(독도)의 령토편입과 임대청원서》자료, 1905년 1월 내무대신이 나까이의 《청원서》를 받고 내각회의에 공문서를 제출한 《공문류취》자료, 1905년 1월 28일 《리앙꾸르섬(독도)편입에 대한 일본각의결정서》, 1905년 2월 15일 《죽도(독도)편입에 대한 일본내무대신의 훈령》의 지시문,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고시 40호》자료 등에는 이전 시기에 일본정부가 독도를 조선의 섬으로 기정사실화해오던것을 어떻게 제놈들의 섬으로 외곡날조하였는가를 말해주는 구체적인 내용이 수록되여있다.
1904년 나까이는 독도에서 물개잡이의 독점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일본명치정부에 이 문제를 독도소유당사자인 리조봉건정부와 교섭해줄것을 요청하였다가 독도를 강탈하려는 일본명치정부의 회유와 강요로 자기 나라 정부에 《리앙꾸르섬(독도)의 령토편입과 임대청원서》를 제출하게 되였으며 이에 기초하여 일본명치정부는 죽도(독도)를 일본에 편입한다는 결정서와 지시문, 고시를 몰래 날조하였다.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시마네현고시 40호》는 일본명치정부의 지시를 받고 시마네현지사가 1905년 2월 22일 자기 지방신문에 자그마하게 냈다고 하는 날조문건이다.
《시마네현고시 40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위 37゜9´30″, 동경 131゜55´오끼도로부터 85n·mile에 있는 섬을 다께시마라고 칭하고 지금 이후로는 본현(시마네현)소속의 오끼도사의 관할로 정한다. 명치 38년 2월 22일 시마네현지사 마쯔나미 다께요시》
이 《시마네현고시 40호》는 나까이의 의도적인 《리앙꾸르섬(독도)의 령토편입과 임대청원서》, 우리 나라의 독도령유권을 강탈하기 위한 일본명치정부의 고의적인 지시에 의하여 외곡되여 제출하달된 공문서와 지시문에 기초한것으로써 외곡날조된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원래 일본 도꾸가와막부정부는 17세기말에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령토로 재확인하는 공문서를 리조봉건정부에 전하였고 1869년이후 명치정부의 외무성, 내무성, 태정관, 해군성이 련달아 독도가 조선령토임을 명백히 확인하여왔다.
이런 조건에서 20세기초에 들어와서 일본 명치정부가 독도를 자기의 령토에 편입하자면 국제법상 응당 사전에 이 섬에 대한 령유권을 가진 리조봉건정부에 통보하여야 한다.
그러나 일본이 그렇게 하지 않은것은 내외여론의 비난이 두려운데 있었으며 더우기는 독도가 자기의 령토가 아니라는것을 일본정부자신이 뻔히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일반적으로 령토편입문제는 매개 나라의 중대사이므로 이에 대한 내각결정은 비밀사항이 아니면 중앙관보에 게재하여 공시하는것이 관례이다.
그런데 일본 명치정부는 독도의 령토편입문제만은 국가관보에 게재하지도 않고 수도 동경(도꾜)에 있는 여러 공사관들에 통보하지도 않았는데 그 리면에는 《시마네현고시 40호》의 발표를 어물쩍해넘기고 후에 이를 법적근거로 일본의 《독도령유권》을 합법화하자는 교활한 속심이 깔려있다. 그것은 당시 일본정부가 《시마네현고시 40호》내용을 일본의 중앙신문들에 전혀 싣지 못하고 지방의 자그마한 관보에만 싣게 하였으며 현재는 그 관보마저 가지고있지 못하고있는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최근 어느 한 독도연구자가 시마네현도서관에서 《시마네현고시 40호》가 게재된 시마네현관보 2월 22일부를 보자고 요구하니 그 호수만이 빠졌다고 답변하였다고 하면서 《시마네현고시 40호》의 불법무효성을 폭로한바 있는데 이것은 《시마네현고시 40호》가 아무러한 법적근거도 없는 날조된것임을 다시한번 보여준다.
현대시기의 일본사료들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섬으로 기록되여있다.
이 시기 일본에서 출판된 과학사전들과 일본정부가 발표한 국가공문서들이 이를 확증해주고있다.
1960년 일본에서 출판된 《일본대백과사전》의 독도항목을 보면 《일본에서는 〈다께시마〉로 부르지만 조선에서는 독도라고 부르며 유럽, 아메리카인들에게는 〈리앙클〉바위로 알려져있다. 조선에서는 15세기(1481년)의 〈동국여지승람〉에서부터 우산도란 이름으로 무릉(울릉)도와 함께 강원도 울진현에 소속된 령토라고 인식되여왔다. 일본에서는 에도시대(1603년~1867년)에 어업가들에 의하여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였지만 자국령토라고 생각하지 않고있었다. 》고 기록되여있다.
《일본대백과사전》은 일본의 학계와 교육계, 정치계의 견해 및 과학성과들을 종합체계화한 중요한 참고서이고 분량만 해도 30권이나 되는 방대한 대사전이다. 바로 이처럼 종합적인 일본의 대사전에 독도가 조선의 섬으로 기록되여있다는것은 현대시기에도 일본의 학계와 교육계는 독도를 조선의 령토로 인정하고있었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조선어대사전》은 1985년에 오사까외국어대학 조선어연구실의 교수들이 편찬한것으로서 전문기관이 연구하고 서술하였기때문에 신빙성이 있는것으로 인정되고있다. 이 책의 《독도》라는 올림말(상권 670페지)에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는 무인도》이며 옛 이름은 우산도라고 하였다고 명백히 씌여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현대시기에 들어와 일본의 독도강탈책동이 우심한 속에서도 일본의 학계에서는 여전히 독도가 조선의 령토로 인정되고있었다는것을 말하여준다.
일본의 법적사료를 보아도 1951년 6월 6일에 발표된 《총리부령 24호》와 같은해 2월 13일에 발표된 《대장성령 4호》에서는 독도를 일본의 부속섬이 아니라고 규정하였다. 이후 일본은 1960년과 1968년에 이 두개의 법령을 개정하였는데 그때도 독도가 일본의 부속섬이 아니라는 조항만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이것은 현대시기 일본인들뿐아니라 일본정부 역시 독도가 저들의 땅이 아니라는것을 번연히 알고있다는 자료적증거이다.
이처럼 근 300년간에 이르는 일본의 력사자료들은 독도가 조선의 신성한 령토이라는것을 여실히 증명해줄뿐아니라 일본반동들의 《독도령유권》주장이 력사적사실과 완전히 어긋나는 황당무계하고도 강도적인 궤변이라는것을 실증해주고있다.
3. 독도가 조선의 섬이라는것을 확증해주는 유럽 및 미국사료들
독도가 조선의 섬이였다는것은 유럽과 미국사료들에도 반영되여있다.
조선의 섬 독도를 게재한 유럽사료들에는 유럽인들이 18세기 중엽이후 조선동해를 항해하다가 독도와 울릉도를 직접 본데 기초하여 그리거나 이미 그린 옛 지도를 인정하고 모방하여 그린 지도들과 항해길을 그린 해도, 항해길을 적은 수로지들이 있다.
유럽인들이 그린 옛 지도들로서는 《조선전도》(1721년, 1735년, 1846년), 《조선왕국전도》(1732년), 《일본 및 조선지도》(1748년), 《일본제국지도》(1750년), 《일본지도》(1750년), 《중국, 조선지도》(1774년), 《중국과 조선 일본지도》(1749년), 《삼국총도》(1832년), 《중국 및 일본지도》(1837년, 1839년), 《중국지도》(1794년, 1808년)등이 있는데 이 자료들에는 독도를 우산도 또는 《챵찬따오》(우산도=천산도를 중국식으로 발음한것)라는 명칭으로, 혹은 울릉도의 중국식발음인 《판링따오》라는 이름으로 경상도 평해앞바다에 그려놓았다.
프랑스해군이 제작한 해도인 《태평양전도》(1851년), 로씨야함대가 만든 《조선동해안도》(1857년, 1882년), 영국해군이 제작한 《일본렬도》(1859년) 등에는 독도가 조선반도의 가까이에 조선의 섬으로 그려져있다.
특히 1857년 로씨야에서 제작된 해도인 《조선동해안도》에는 해도이름그대로 조선동해안에 울릉도와 함께 독도를 표기하고 독도밑에 이 섬의 모양을 그린 그림까지 그려넣어 조선의 섬이라는것을 더욱 뚜렷이 보여주었다.
수로지는 근대시기 유럽인들이 만든 항로기록으로서 프랑스인과 영국인들이 많이 제작하여 남기였는데 해당 수로지들에도 모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동해상에 그려져있다.
프랑스해군이 작성한 수로지인 《항해지침》(1895년, 1928년), 영국인들이 만든 수로지들인 《중국수로지》(1858년, 1861년, 1864년), 《중국해안항해지침》(1873년, 1884년, 1892년), 《일본, 조선 및 린접해안항해지침》들에서도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조선의 섬으로 기록되였다.
이처럼 유럽인들이 남긴 지도들과 해도들, 수로지들에는 독도가 조선의 령토로 그려져 독도에 대한 우리 나라의 령유권을 확증하고있다.
독도를 조선의 령토로 인정한 미국측사료를 보면 2005년 4월 미국국립기록조사국에서 독도를 조선땅으로 인정한 미국정부의 2건의 비밀문서가 공개된것이 있다. 그중 한 문서는 1951년 6월 남조선강점 미군의 한 고위인물이 당시 남조선《국무총리》에게 독도를 미공군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겠다고 통지한 문서로서 이것은 패망당시 일본을 강점하였던 미국이 이 섬을 일본령토가 아니라 조선의 령토로 인정하였으며 일본도 이것을 알고있었다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1995년 미국정부 국방지도제작소에서는 수로지 《항해지침, 조선 및 미국》을 제작하였다. 이 수로지에서는 독도와 울릉도를 조선에 소속된것으로 기입하였는데 거기에는 독도해설과 함께 독도그림 2점도 들어있다.
미국의 이와 같은 독도분류는 미국이 이미전부터 독도에 대한 우리 나라의 령유권을 인정하여왔다는것을 보여준다.
최근 미국에서 1946년에 제작된 지도가 발견되였는데 여기에도 독도는 조선의 령토로 명백히 표기되여있다.
이처럼 우리 나라와 일본, 유럽과 미국의 력사사료들은 독도에 대한 우리 나라의 령유권이 의문의 여지조차 없는 정정당당한것이며 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이야말로 어리석고 파렴치하며 황당무계한 궤변이라는것을 똑똑히 실증해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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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적사실자료들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독도는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분쟁의 대상이 될수 없는 철두철미 조선의 신성한 령토이다.
우리 나라의 독도령유권에 대해서는 세계가 인정하고있다.
지난 2009년 5월 미국의 워싱톤에서 진행된 독도와 관련한 국제학술토론회 참가자들은 독도가 삼국시기에 조선의 령토였다는 사료들이 있고 1700~1800년대에 일본에서 제작된 지도들에도 독도가 조선의 령토로 기록되여있는 조건에서 조선의 독도령유권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고 일치하게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반면에 일본은 1905년에야 처음으로 독도에 대한 《령유권》을 주장하였으므로 일본의 《독도령유권》주장은 아무런 력사적근거도 없는 궤변이라고 인정하였다.
이처럼 세상이 독도를 우리 나라의 고유령토로 인정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반동들이 력사적으로 보나, 국제법적으로 보나 허황하기 그지없는 《독도령유권》을 계속 떠들어대는 속심은 독도를 분쟁의 대상으로 만들고 이를 구실로 조선재침의 길을 기어이 열어나가자는데 있다.
일본당국은 지난 시기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력사에 전무후무한 특대형반인륜범죄를 감행하여 준엄한 심판을 받은 자기의 침략력사에서 반드시 교훈을 찾아야 하며 일본에 종국적파멸을 가져올 파렴치한 령토강탈책동, 독도강탈책동을 당장 걷어치워야 한다.
일본은 독도의 돌 하나라도 절대로 다칠수 없다.
독도는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영원히 신성불가침의 조선땅이다.
(조선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