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고〉존엄을 지켜 값있는 삶을 보낸 동포부부를 회억하여 / 오광인
2025년 12월 29일 09:00 동포생활가가와현 오시마세이쇼엔을 42년만에 찾아
가가와현 다까마쯔항에서 8키로 떨어진데 위치한 작은 섬인 오시마(大島)에 한센병환자였던 사람들이 입소하고있는 일본의 국립료양소 오시마세이쇼엔(大島青松園)이 있다. 얼마전 이곳을 42년만에 찾았다. 3번째가 된다.
발걸음을 옮기게 된 계기는 올해 10월 《조선신보》창간 80돐 축하연에 참가했을 때 받은 취재요청이였다. 기억에 남는 잊을수 없는 기사에 대하여 듣고싶다는것이였다.
조선신보사에서는 1968년 18살에 입사하여 2010년에 퇴사할때까지 적지않은 기사를 집필하였다. 몇편의 기사를 고르라니 어렵다.
후날 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을때 그런 사정을 알리고 그저 창간 80돐을 맞은 감상과 재직기간 어떤 맘가짐으로 일했는가 이야기했다. 젊은 기자의 의도대로 안갔을것이다. 미안한 감이 들었다.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보관해놓았던 자료들을 꺼냈다. 하나하나 살펴보는속에 퍽 오래전에 오려낸것이라 희미하게 변색된 기사에 눈길이 멎었다. 세이쇼엔에서 료양생활을 보내던 한센병회복자 서외도, 최두이동포부부에 대하여 쓴 글이다. 그들은 김일성주석님탄생 65돐을 빛내이기 위하여 정성을 바치였다. 그 소행을 소재한 기사가 1977년 4월 23일부 《조선신보》에 게재되였다. 그러다가 며칠후 그들을 소개한 기사는 삭제되여 지면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였다. 그런데 6년후 부활되였다. 동포부부의 떳떳한 삶에 대한 기사가 신보지면에 새로 실렸다.
기사를 읽으니 두번의 만남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리움과 함께 세번째 《만남》을 위해 그들이 한생을 보내야만 했던 오시마에 가자고 맘먹었다.
첫 만남과 《삭제된 기사》
1977년 봄철 편집국에 총련 가가와현본부에서 동포부부의 소행을 적은 통신기사가 보내여왔다.현지취재가 제기되였다. 마침 쥬고꾸지방의 출장이 예정되여있던 나에게 분공이 차례졌다.
다까마쯔항에서 오시마를 왕래하는 작은 전용선에 몸을 실었다. 일부러 먼 길을 올 필요가 없다고 하던 부부가 잔교(桟橋)에 나와 맞아주었다. 첫 만남이였다.
투병생활을 하는속에 맺어진 그들부부가 일본정부의 강제격리정책에 의하여 오시마에 끌려온것은 1944년 가을이였다. 1년간 참으면 병을 고치고 나갈수 있다는 《약속》을 믿었다. 그러나 렬악한 감금생활을 계속 강요당하였다. 병마는 서동포의 왼쪽손가락을, 최녀성의 시력을 앗아갔다.
그런 처지에 놓여있는 그들을 어디서 알았는지 1948년말경 우리 조직에서 격려편지와 함께 얼마간의 돈을 부쳐왔다. 그해부터 해마다 그맘때가 되면 꼭꼭 송금이 있었다.
1959년 국민년금법을 제정한 일본정부는 1961년부터 료양소입소자들에게도 적용하기로 했으나 일본국적소유자에 한하였다.
부당한 민족적차별에 분격을 금치 못한 각지 료양소의 동포환자들은 동맹조직을 무어 일본정부에 대한 항의요청투쟁을 벌리기로 했다. 이곳에서 서동포는 3명의 대표의 한사람으로 뽑히였다.
그러나 도꾜에 가는 차비조차 없었다. 총련본부를 찾았다. 조직은 반가히 맞아주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재일동포들을 비롯하여 해외에 있는 모든 조선공민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민족적권리를 옹호하는것을 자기의 신성한 의무로 간주하고있다라고 하신 김일성주석님의 높은 뜻을 받들고 사업하고있다고 자처해왔는데 얼마간의 돈을 부친것으로 제일을 다한것처럼 여긴 자기들이 부끄럽다, 면목이 없다고 도꾜까지의 왕복차표만이 아니라 활동자금까지 마련해주었다.
이국땅에 사는 동포들이 온갖 민족적차별과 박해를 박차고 떳떳이 살아갈수 있도록 극진히 보살펴주는 조국과 령도자의 사랑의 손길이 불우한 처지에 있는 자기들에게도 뻗쳐지고있다는것을 부부는 알았다. 그것을 도꾜에 갔을때 강렬히 느꼈다. 본부일군이 일러준대로 우선 총련중앙을 찾았다. 총련중앙은 일본정부를 상대로 하는 투쟁이 쉽지 않으며 오래 걸릴것을 예견하고 매달 활동비를 보내기로 하였다.
정신적, 물질적 방조와 지원을 받으며 10년여에 걸친 투쟁끝에 승리했다. 차별을 시정시켜 꼭같은 권리를 쟁취하였다. 조직의 고마움을 느끼던 나날 총련을 무어주고 이끌어주는 조국과 령도자의 은덕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부풀어오르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텔레비죤에서 우리 나라 무역선 《만경봉》호가 오까야마현 미즈시마항에 입항했다는 소식에 접하였다. 김일성주석님의 탄생 65돐을 경축하여 재일동포들이 드리는 선물을 실으러온것이다. 그러한 일이 있다는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순간 부부는 이때라고 맘막었다. 자기들의 심정을 담아 본부위원장에 넘기는 편지와 함께 30년간 조직에서 보내준 위문금과 원내환자작업임금을 절약하면서 저축한 돈을 모아 본부사무소를 찾았다.
부부의 생활처지를 아는 본부일군은 감동하면서도 손을 내지 못하였다. 마음만 받겠다고 몇번이고 말했다. 결국은 뜨거운 정성에 머리를 숙이였다.
기사는 비교적 크게 편집되였다. 인쇄된 《조선신보》는 일본각지에 발송되였다. 그런데 며칠후 그날부 《조선신보》의 제2판이 보관용으로 재인쇄되는 조치가 취해졌다. 내가 쓴 기사는 삭제되고 그 부분은 다른 기사로 메워졌다.
자신의 취재집필능력과 사람 됨됨이에 대하여 뉘우치게 되였다. 기사에서 《문둥병환자》라는것을 필요이상으로 강조했다. 편견이 짙게 남아있는속에 좋지 못한 인상을 주는 《문둥이》이라는 말이 있는데 하필 《문둥병환자》라는 용어를 일부러 부표제에까지 달았는가. 적어도 낡은 병명에서 생기는 오해와 편견을 없애기 위해 사용되게 된 한센병이라고 언급해야 했을것이였으며 환자가 아니라 회복자라고 표기해야 했다고 돌이켜보게 되였다. 편견은 자신에게도 있었다. 처음으로 만났을때 그들의 손을 잡지 못했다. 차대신 내준 우유에 입을 대지 않았다. 예방이나 소독 등의 특별한 대책은 필요없는 질환이라는것이 증명되고있었으나 《무서운 병》, 《고치지 못한 전염병》이라는 틀린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두고두고 후회되는 처사였다.
총련본부에서 기사를 보았다, 부부에게도 전하였다는 전화를 받았다. 제2판이 인쇄된것을 알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2판이 기본이여서 제본된 그날부의 신문과 축쇄판에서 그 기사는 찾을수 없다.
두번째 만남 재조명 부활
1983년 가을철 시고꾸에 출장갔던 동료가 서동포의 서거를 알려주었다. 오래간만에 들은 동포의 소식이 비보였다.
오시마로 향하는 배에 다시 몸을 실었다. 이전 위원장으로부터 인계를 받아 동포부부에 대하여 늘 관심을 돌리던 새 본부위원장이 동행해주었다.
두손을 모아 굳게 잡고 애도의 뜻을 표하며 최두이녀성을 위로하였다.
사전에 일군으로부터 들은 사연이 떠올랐다. …
1983년 김일성주석님탄생 71돐경축현대회장에서 서동포부부를 찾을수 없었다.
초상화앞에 모셔달라고 꽃다발과 꽃병을 가져오는 등 해마다 4월의 명절을 경건한 심정으로 맞이하며 눈이 안보이는 부인의 손을 잡고 남먼저 대회장에 달려온 서동포였다.
그 무렵 서동포는 후두암으로 인해 운신조차 못하는 형편에 놓여있었다. 대회가 끝나자마자 일군은 오시마로 향하였다. 의식이 희미해진 서동포의 손이며 발을 주물어줄수밖에 없었다. 5월 9일 69살을 일기로 눈을 감았다. 고인의 곁에서 구부러 앉아 슬픔을 꾹 참고있는 최두이녀성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였다. 그런 최녀성이 그달말경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다시 찾아와준 일군에게 5장의 봉투를 내밀었다.
총련본부, 시고꾸조선초중급학교, 다까마쯔지부, 녀성동맹, 상공회.
각기 이렇게 씌여진 봉투에는 적지 않은 금액의 돈이 들어있었다.
《주인의 유언입니다.》
생전에 자기가 눈을 감으면 얼마간의 돈이 있으니 총련애국사업에 써달라고 하던 서동포였다.
4월의 명절과 국경절을 맞이할때만이 아니라 영화상영모임이 낡은 영사기의 고장으로 중단된것을 가슴아파하여 만기가 된 정기예금으로 영사기 두대를 구하여 본부와 학교에 희사하는 등 늘 애국사업에 관심을 돌려왔다.
홀로 남게 될 안해에게 한푼이라도 유산으로 남겨주고싶었지만 그는 고마운 우리 조직과 일군들의 따뜻한 손길이 있기에 여생을 떳떳하게 보낼수 있다고 확신하고있었다. 남편의 그런 마음을 최녀성은 잘 리해하고있었다.
6년만의 회포의 시간은 빨리 흘러 다까마쯔로 향하는 마지막배편의 출항시간이 다가왔을 무렵 최녀성이 벽장에 봉투가 있으니 봐달라고 하였다. 돈이 든 봉투였다. 공화국창건 35돐때 축하금으로 조직에 넘기려고 준비해두었던것이였다. 우리 나라에서 국경절을 성대히 경축했다는 소식을 조국방송에서 들었다고 하면서 주인도 기뻐했을것이다, 주인의 뜻을 이어가야 한다라고 한 최녀성의 두눈에서 이슬이 흘러내렸다.
감흥속에 원고를 썼다. 삭제된 기사에서 언급한 사례도 부분부분 되살렸다. 기사는 1983년 12월 20일부 《조선신보》에 게재되였다. 첫번째 만남시 찍은 부부의 사진이 함께 실렸다.

최두이동포부부에 대하여 소개한 기사가 실린 1983년 12월 20일부 《조선신보》
세번째 《만남》, 마음의 기둥
오시마로 향한 전용선은 86명을 수용할수 있는 비교적 큰 배로 바뀌여지고있었다. 20분이면 가닿았다.
42년만이라 옛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더우기 취재를 위한 지난 두번의 방문은 면담이 위주여서 생활환경은 체감못했었다.
5년전에 개관된 사회교류관에는 재원자가 700명을 넘었던 1958년을 전후한 시기의 오시마의 정경을 150분의 1로 축소하여 재현한 모형(지오라마) 이 전시되고있다. 섬전체가 수용소와 마찬가지였다. 비록 울타리는 없어도 륙지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으니 헤염치고 도망칠수도 없다.
지금까지 4000명을 헤아린 이곳의 재원자수는 해마다 줄어들고 현재 입소자수는 29명이며 평균년령은 약 84살이라고 한다. 숱한 사람들이 이곳에서 한생을 보냈다.
섬의 거의 중심지에 위치한 납골당으로 갔다. 이곳에서 숨진 2100명을 넘는 사람들의 유골이 안치되고있다. 이름과 사망년월일은 개인정보라 알려 주지 않았다.
두번째방문이후 최녀성의 소식은 알지 못했다. 1983년 69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 서동포보다 나이가 3살우다. 현재 료양소에 100살을 넘는 사람은 없다. 제나름대로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서동포의 뜻을 이어 뭇사람들에게 감명을 안기며 값있는 삶을 보냈으리라는 확신은 흔들림없다.
확인은 못했지만 부부의 소행에 감동하여 한센병에 대한 리해를 깊이고는 간호사자격을 취득하고 이곳 료양소에 자진해 왔으며 그후 오까야마현의 료양소에서 계속 회복자들을 위해 힘쓴 동포녀성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선신보》에 게재되였던 부부의 사진을 분향대앞에 놓고 향불을 피워 유골이 안치되고있을 고인을 추도하여 묵상하였다. 첫번째만남시 잔교까지 나와 맞아주던 부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세번째 《만남》이다. 현지에서 추도하자는 이번 방문목적의 주된 하나가 이룩되였다. 이곳에서 료양생활을 보낸 동포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납골당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화장터의 바로 옆에 세워진 석탑으로 향했다. 화장후 납골하여 남은 뼈를 안치하고있다. 령혼이 오시마를 떠나 바람타고 자유로히 넘나들것을 념원하여 《바람의 춤(風の舞)》이라고 이름지워졌다.
가족, 친척들과의 인연을 끊은 서동포의 과거생활에 대해서는 고향이 경상북도 청도군이라는것밖에 알수 없다. 서쪽하늘을 바라보며 고향땅에서 의좋게 지내고있을 부부를 상상하면서 다시 묵상하였다.
섬을 돌아보니 기독교와 여러 종교의 시설이 눈에 띄였다. 평생 나갈수 없는 이 섬에서 여생을 어떻게 보낼것인가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신앙에서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2중3중의 어려움속에서 존엄을 지켜 떳떳하게 산 서동포부부의 정신적지주에 대해서 아예 언급할 필요는 없을것이다.
서동포부부만이 아니라 돌이켜보면 마음의 기둥을 깊이 간직하고 애족애국의 한길에 떳떳한 자국을 새긴 수많은 일군들과 동포들을 취재길에서 만났다. 그 대렬은 대를 이어가고있다.
* * *
귀로에 오를때마다 흐뭇한 감에 휩싸이군 했다. 이번에도 역시 멀어져가는 오시마를 바라보면서 감회에 잠기였다. 삶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였다. 새 힘을 얻은것 같다. 방문해서 좋았다.
50년 고락을 함께 해왔으며 이번 방문에 동행한 인생의 반려에게 말했다.
《여생을 잘 보내자.》
(이전 《조선신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