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신보》창간 80돐〉1960-90년대에 활동한 기자의 회고
2025년 10월 10일 11:00 총련《동포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신문》
강혜진씨(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 고문, 총련도꾜 스미다지부 상임고문)는 동포들과 더불어 애족애국의 길을 길어온 《조선신보》의 력사를 목격하고 체험하였다.
꼬마배달원의 추억
조국이 해방된 직후 오사까 히가시나리구에 있었던 강혜진고문의 집에는 텔레비죤은 물론 라지오도 없었으나 《해방신문》은 있었다고 한다.
《철이 들기전이니 제대로 읽지도 못했지만 신문을 처음으로 알았다. 〈해방신문〉은 가까이에 있었다.》
초급부 저학년시기 아버지가 《해방신문》분국과 지국에서 사업하던 관계로 그는 보급사업을 돕자고 형과 함께 꼬마배달원이 되였다. 그는 신문을 배달하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착하다고 칭찬해주던 동네의 정다운 동포들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한 추억과 함께 신문을 펼쳐보며 희로애락하는 동네동포들의 모습 또한 잊지 못한다고 한다.
《지금도 생생한것은 조국에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온 소식을 보도한 〈조선민보〉지면이다. 기쁨과 환희에 넘치는 지면을 당시 가난에 쪼들리면서 일본대학에서 고학을 하던 학생이 우리 집에서 펼쳐보았다. 그는 기사를 한글자한글자 짚어가며 〈정말 이런 고마운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이제야 살았다.〉며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동포들에게 《조선신보》를 배포하는 일군(1974년)
각지 동포들속에 들어가
도꾜로 이사하여 도꾜조고를 1966년 4월에 졸업한 강혜진고문은 조선신보사 편집국 조직생활부(조생부 / 총련사업과 동포생활을 취재하는 부서)에 배치되여 기자활동을 시작했다.
그 시기 재일동포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사태가 빚어지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