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아와지대진재30년〉《조선신보》기자가 취재현장에서 목격한 장면들
2025년 01월 18일 09:00 력사 총련모든 힘을 모아 분회복구, 학교복구에로
나어린 아이, 끌끌한 조선대학교 학생, 분회위원을 맡아 아들을 조청일군으로 키운 열성동포… 총 125명의 동포희생자를 낸 한신아와지대진재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조선신보》는 지진발생직후에 기자를 현지에 파견하여 련일 피해현장을 보도하였다. 당시 기자로서 현장을 찾은 리현규씨(55살, 사이다마초중 교육회 부회장)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1995년 1월 17일, 지진발생당시 그는 취재로 시즈오까현 아따미에 있었다. 즉시 본사로 향하니 역전에서는 일본신문의 号外가 배포되고있었다.
본사에 도착하니 최수광청년(조대 외국어학부 2학년)이 희생되였다는 비보를 접한 조선신보사 사원이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그 광경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다고 한다.
제1진 취재반은 그날 밤에 조선신보사 지사가 있었던 오사까로부터 파견되여 18일아침에 효고현본부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리현규씨도 현장에 파견되였다. 그때 그는 기자활동을 시작한지 2년째였다.
강진으로 인하여 철도는 괴멸상태에 놓여 오사까로부터는 림시운행뻐스를 타야 했다. 뻐스는 피해가 막심한 도로를 우회하는 식으로 가야 했고 한정된 길은 혼잡하여 소요시간은 평상시의 2배이상이 걸렸다. 그는 조선신보사 오사까지사를 거점으로 하여 이 길을 매일 왕복하여 취재활동을 벌렸다.
당시 학교나 총련지부회관은 피해동포들의 피난소로 되였다. 리현규씨는 《히가시고베초중(현 고베초중)에 도착하니 동포들이 〈기자동무가 왔다.〉고 따뜻이 맞아주었다. 동포들의 피난소에는 각지에서 보내온 지원물자, 격려편지가 넘치고있었다.》며 《피해동포들은 물론 힘들었을것이다. 그러나 첫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동포들모두가 락천적으로 피난생활을 이겨내고있었다.》고 돌이켜본다.
당시 《조선신보》기사에 의하면 지진발생 2일후인 19일시점에서 히가시고베초중에는 30여명의 동포들이 피난하고있었다. 교통수단은 차단되였으나 각지에서 달려든 동포지원대에 의해 구원물자가 속속 들어와 그것들은 동포들과 함께 피난하던 린근 일본주민에게도 공급되였다고 한다.
기자들은 김정일장군님께서 총련중앙 한덕수의장앞으로 보내주신 위문금이 피해동포들에게 전달되는 현장도 찾았다. 조국의 배려에 고무된 동포들을 취재한 리현규씨는 그때 동행한 사진기자가 총련효고 스마다루미지부 오오이께분회에서 찍은 한장의 사진이 인상깊다고 한다. 오오이께분회는 관하동포호수의 100%가 피해를 입고 그중 90%의 가옥이 전괴, 전소되였다.
그런데 사진에는 빈터가 된 분회사무소부지를 배경으로 《우리 분회는 살아있다! 모든 힘을 분회복구에로!》라고 씌여진 횡단막을 든 분회위원들이 찍혀있다. 당시 이곳 분회에서 분회장을 맡았던 최민부씨는 돌아간 최수광청년의 아버지이다.
리현규씨는 《지역동포들은 늘쌍 동포들을 걱정하는 최민부분회장의 모습을 보고 신뢰심을 더욱 굳혀 분회의 두리에 뭉쳤다.》며 《피해당시 지부나 분회, 학교가 명실공히 생활의 거점이 되여 상부상조가 이루어지고 상기업활동의 재개를 위한 정보교류도 오갔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위문전문과 위문금은 동포들이 분발하는 힘의 원천이였다. 동포들은 돈의 문제보다 피해를 입은 자기들이 조국의 은혜를 받아안았다는데 대하여 감격과 고마움을 금치 못하고있었다.》고 돌이켜보았다.
기자들은 95년 3월 4일에 거행된 합동추도식에서 피해동포들과 슬픔도 함께 나누었다. 어머니를 여읜 동창생을 식장에서 만난 리현규씨는 《너무나 가슴이 아파 건넬 말을 찾지 못하였다.》고 회상하였다.
30년전, 피해현장을 찾아다닌 나날을 돌이켜보면서 그는 《조직과 학교가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진재 1년후에 진행된 히가시고베초중, 이따미초급의 착공식을 취재하였다. 두 학교에서는 진재후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새 교사가 일떠섰다. 동포들은 자기 집, 공장이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복구를 위해 심혈을 바쳤다. 4.24교육투쟁의 전통이 깃든 곳에서 학교를 중심으로 발휘되는 조직의 힘, 동포사회의 힘을 느꼈다.》(리현규씨)
당시의 체험은 오늘 리현규씨의 사업에도 반영되고있다. 그는 《현재 사이다마교육회 부회장을 맡고있는데 다른 지방에서 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학교에 비상용비축품을 갖출데 대한 문제가 론의되군 한다. 동포들, 린근주민들은 물론이지만 우리 사업의 첫째자리에는 동포사회의 미래인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고성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