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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우리 말과 나⑪/박재수

2024년 07월 15일 07:38 론설・콜럼

우리 말 고수의 계주봉을 이어가며

후비육성에 대한 생각

요즘 나이에 대하여 생각할 때가 많다. 올해 희수가 되여서 그런지 아니면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먼저 가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80고개를 내다보면서 내가 오늘까지 먹은 나이만큼 후회없이 제대로 살아왔는가, 아직 다하지 못한 일이 없는가, 앞으로 더 하고싶은 일, 할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나이와 의논하면서 생각하는 나날이다.

그럴 때마다 나의 머리속을 언뜻언뜻 스쳐지나가는것이 있다. 다정한 제자들의 얼굴과 그리운 스승의 모습이다.

눈을 살며시 감으면 《그새 조선어교육의 대를 이을 후비를 얼마나 키웠는가.》 하는 스승의 목소리가 귀전에 들려오는것만 같다.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 보급해나가는 애국의 계주봉을 이어갈 실력있고 덕이 있는 국어교육자, 조선어연구자를 얼마나 키워내였는가 하는 물음에 깊은 생각에 잠길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조선대학교에서 국어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인재를 키우는것은 참으로 영예로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3~4세를 대상하다보니까 말로 하는것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대학교원이라면 더하다. 나는 그것을 체험을 통하여 느꼈었다.

조선대학교는 새세대 동포자녀들에게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주는 단순한 배움터가 아니라 주체의 리념과 불변의 신념, 순결한 량심을 지닌 해외의 참된 애국충신, 애국인재를 키우는 자주적인간육성의 신성한 전당이다.

대학교원으로 키우자면 실력은 물론 숭고한 리념과 신념, 깨끗한 량심을 지닌 교육일군으로 준비시켜야 한다. 뿐만아니라 학부교원들과 대학의 결심이 있어야 하며 또한 행운도 있어야 한다.

문학부 교원시기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필자

내가 대학에서 국어교육일군으로 사업하면서 조선어교육의 바통을 이을 조선대학교 교육일군을 육성하는데 큰 관심을 가지게 된것은 1980년대 초반이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문학부교원으로 사업하던 1983년 2월이였다고 기억된다. 그날은 몹시 추운 날이였다.

첫 시간이 시작되여 얼마 안 있어 갑자기 학생이 나를 찾아오더니 《수업시간인데 박정문선생님이 아직 안 오셨습니다.》라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그럴리가… 수업은 반드시 보장하시는분이신데…)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여기저기 알아봤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였다. 론문집필중에 병이 터져 그만 돌아가셨다는 비보에 접하게 된것이다.

이때의 충격적인 체험은 나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사람의 인생은 래일을 기약하지 못한다. 그러니 후비육성은 나이에 구애됨이 없이 미리미리 해야 한다, 그것은 빠를수록 좋다는 교훈이다.

나는 그때부터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속에서 소질이 있고 전망성있는 학생을 점찍어 대학교원으로 키우려고 목적의식적으로 사업하였다. 그때 내 나이가 33살이였다.

인재육성의 계주봉

나는 먼저 대상이 될만한 학생을 찾았다.

처음 대학의 담당부서에 학력이 높고 우수한 학생을 문학부에 보내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랬더니 《문학부교원들은 자기 손으로 후비를 키울 생각도 하지 않고 좋은 학생을 달라고만 한다. 공들일줄 모른다니까.》라는 말을 듣게 되였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좋은 학생을 얻자면 남을 바라보고 기다리는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주동적으로 대상학생을 찾아내고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이렇게 하여 문학부학생들을 중고국어교원으로 키우는 한편 대학에서 조선어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일군을 키우기 위한 사업에 본격적으로 달라붙게 되였다.

노력한 보람이 있어 재직기간에 여러명의 후비를 문학부교원으로 키울수 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기쁨이고 행복이였다.

나는 후비육성사업을 하면서 많은것을 생각하게 되였다. 그중의 하나가 나이에 대한 생각이다.

나는 후비를 키우면서 다음 세대에 충성과 애국의 바통을 억세게 이어 우리 자녀들의 밝은 미래를 담보하자면 나이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애국사업은 혼자서 하는것이 아니고 한세대에 끝나는것도 아니기때문이다.

그런데 자기 나이와 후대에 대한 생각이 모자란 사람들을 더러 보게 된다.

건강하게 일흔살, 여든살까지 현역으로 일하겠다는 마음은 소중하다. 그러나 나이들어도 제자리에 눌러앉아서 후대들에게 넘겨주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후대사랑, 미래사랑과 전혀 인연이 없을것이다.

오늘의 현실은 실력있고 덕이 있는 젊은 일군들이 제자리를 차지하여 총련애국사업의 대를 이어가기를 절박하게 요구하고있다.

총련애국사업과 민족교육의 질은 인재의 질에 의하여 결정된다. 내 나이 비록 많았어도 남은 인생을 대학교육의 질을 보장하며 애국의 대, 민족의 대를 이어나갈 인재를 키우는 영예로운 사업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였으면 좋겠다는것이 나의 소박한 소망이다.

조선대학교는 민족인재양성의 원종장

태양의 빛발이 흘러넘치는 민족교육의 최고전당, 과학연구의 중심, 민족성고수의 보루에서 사업한다는 긍지드높이 조선대학교에서 사업하던 나날들이 그리운 추억으로 떠오른다.

김정일대원수님의 배려로 1978년부터 실시된 김일성종합대학 통신박사원(당시 통신연구원) 1기생으로 조국에서 배우던 나날은 나로 하여금 대학사업의 대를 이어나갈 국어교육자, 조선어연구자를 키우는것으로 그 은덕에 보답하도록 나를 떠밀어주었다.

오늘도 후비양성에 헌신한 잊지 못할 나날들이 눈앞에 아름다운 화폭으로 펼쳐진다.

문력학부, 문학부, 력지학부동창회가 주최한 모임에 참가한 문력학부 교원, 학생들과 졸업생 대표들

조선대학교는 애국위업의 대를 이을 계승자들을 키워내는 총련의 유일한 신진핵심육성기지이며 원종장이다. 조선대학교사업이 잘되는가 못되는가에 따라 총련의 민족교육과 새 세기 재일조선인운동의 미래가 크게 좌우되게 된다.

원종장을 잘 꾸려야 충실한 열매가 달리는 좋은 종자를 육종할수 있듯이 조선대학교를 잘 꾸리고 강화하여야 인재육성에 절실히 필요한 유능한 교원들을 양성할수 있다. 나는 이것을 신념으로 삼아 살아온것을 자부한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존함과 더불어 빛나는 조선대학교의 미래는 밝고 창창하며 총련핵심육성의 원종장에서 자라나는 미더운 계승자들이 있기에 재일조선인운동의 백년대계는 억척같이 담보된다.

아름다운 추억속에 내 가슴을 울리는 노래가 되살아난다. 1998년 6월에 동평양대극장에서 우리 문학부학생들이 공연한 연극 《피줄기》의 주제가 《못 잊어》이다.

 

세월이 세월이 흘러도 끝없이 흘러간대도

영원히 영원히 못 잊어 영원히 잊지를 말자

인생의 참된 걸음 떼여준 그대를 우린 못 잊어

정다운 교정을 못 잊어 아- 우린 못 잊어

 

이국의 하늘에 비바람 세차게 몰아쳐와도

애국의 피줄기 영원히 영원히 이어가리라

장군님 받드는 전사로 전사로 우릴 키워준

수령님 대학을 못 잊어 아- 우린 못 잊어

 

대학을 떠나는 우리의 초소는 서로 달라도

장군님 따르는 한마음 영원히 변치를 말자

우리 말 우리 글로 조국을 받드는 우릴 믿어준

한없는 사랑을 못 잊어 아- 우린 못 잊어

 

황금만능의 이역땅에서 누구나 쉽게 선택할수 없는 애국의 한길을 변함없이 꿋꿋이 걸으며 오로지 민족교육과 총련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분투하고있는 미더운 후대들이 있기에 총련애국위업의 바통이 굳건히 이어지고있다.

세계에 유일무이한 해외교포대학인 조선대학교, 절세위인들의 은혜로운 손길이 뜨겁게 어려있는 민족인재양성의 원종장인 조선대학교야말로 우리 조국과 민족의 크나큰 자랑이고 긍지이며 총련과 재일동포들의 귀중한 재부이다.

【경력】1966년 3월 교또조선중고급학교 졸업(9기생), 1970년 3월 조선대학교 문학부 졸업(12기생), 문학부 및 문학력사학부 학부장, 조선어연구소 소장 력임, 현 한글능력검정협회 상담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교수, 언어학박사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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