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로서 우리 학교와 맺은 귀중한 인연
2023년 12월 14일 07:49 총련동포서예가 강민자씨가 이야기하는 《학생인입에 열정을 바친 사람들》
1980년대 중엽부터 도꾜를 비롯한 간또지방의 초,중,고급학교와 조선대학교 학생들은 과외수업, 선택수업, 정규과목에서 서예를 배웠다. 강사는 서예교실 《금산숙(錦山塾)》을 운영하는 강민자씨(72살). 우리 학교를 통해 맺은 귀중한 인연과 자신의 인생행로에 대하여 회고할 때면 그는 《나는 사람복을 지니며 살아왔다.》며 마음속 진정을 토로하군 한다.
《우리 집에 찾아온 일군, 교원들》
강민자씨는 일본소학교에 다니다가 6학년시절에 도꾜제1초중에 편입하였다. 1세 아버지의 결정을 따랐다. 도꾜중고에서는 민족기악부에서 저대를 연주하면서 재일동포자녀들을 위해 악기를 보내준 조국과의 뉴대를 귀중히 여기였다.
그런데 조선학교를 졸업한 그가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서 조선학교와 인연을 맺기까지의 과정에는 숱한 사람들의 심혈과 로고가 어리여있다.
도꾜중고를 졸업하고 한때 총련일군으로서 사업한 강민자씨는 그후 결혼하고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아이들이 어릴적에 리혼하였다. 생활을 위해 하루에도 몇개의 일터를 다니는 나날을 보내면서도 아이키우기와 함께 녀성동맹 분회사업에도 열성을 다했다.
거주지는 도꾜 기다구 아까바네. 학생시절에 약 2년간 서예를 배웠던 강민자씨는 1984년 《금산숙》의 간판을 걸고 낡은 아빠트의 자그마한 방에서 서예교실을 시작하였지만 수강생들은 많지 않았고 생활형편은 여전히 어려웠다.
1986년 아들이 학교에 다니는 나이가 되였다. 강민자씨는 일본의 공립소학교에 아들을 보내기로 하였다.
《고통스러운 결단이였습니다. 당시의 생활비를 가지고서는 아무리 절약해도 아이를 우리 학교에 보내기 위한 학비와 식비, 교통비를 마련할수 없었습니다. 》
《분회열성자》인 강민자씨는 당연히 아들을 우리 학교에 보낼것이라 믿어의심치 않았던 아까바네분회 역원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를 설복하기 위한 가정방문이 이어졌다.
《우리 아이를 위해 찾아오는데 만나야지요. 돈은 없었지만 어떻게든 음식을 장만하여 손님들을 대접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우리 학교에서 공부시키자는 호소에 수긍하지는 못했어요.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저 시간이 흐르기를 바랄수밖에 없었습니다.》
분회역원들에 이어 총련지부위원장이 나섰다. 그래도 설복하지 못하자 총련본부의 일군들이 찾아왔다. 한명의 아이를 우리 학교에 편입시키기 위해 그의 아빠트를 방문한 사람들속에는 총련중앙 일군도 있었다.
그동안 강민자씨는 《아들을 우리 학교에 보내지 않는 진짜 리유》를 밝히지 않았다. 아무도 해결할수 없는 문제로 알고있었다.
그런데 한 녀교원의 꺾이지 않는 열정이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 선생은 몸을 바르고 단정하게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오랜시간 그 자세로 아들을 우리 학교에서 공부시키자고 호소하는데 내가 답을 내주지 않았어요. 그가 오늘은 이만 가겠다고 일어나려는데 다리가 저려서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이 선생에게는 내가 마음속에 품은것들을 솔직하게 말해야겠다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
그후 도꾜제3초급의 교장이 찾아왔다. 아들의 편입문제를 론의하였다.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도 서예를 배워주었으면 한다는 교장의 권유도 받았다.
아들은 1학년 3학기부터 도꾜제3초급을 다니게 되고 강민자씨도 이곳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서예를 가르치게 되였다. 서예교실의 반향은 다른 지역들에도 순식간에 번졌다. 강민자씨는 도꼬도내의 학교뿐만아니라 사이다마초중, 지바초중, 군마초중 등 거주지에서 떨어진 학교에도 발걸음을 옮겼다. 서예강사로서의 활동이 분주해지면서 가정생활도 안정되여나갔다.
우리 학교에서 서예를 배우는 학생수는 계속 늘었다. 강민자씨가 가르치는 학생이 많을 때는 500명에 달하였다.
총련본부가 조직한 《특별반》의 활동
도꾜제3초급 교장이 강민자씨에게 서예교실에 관한 권유의 말을 건넨것은 우연이 아니였다.
1986년 12월 총련 도꾜도본부에서 《학생인입특별반》이 조직되였다. 본부와 단체, 사업체 일군들로 꾸려진 《특별반》이 이른바 《어려운 대상》을 각기 담당하고 년말까지 집중행동을 벌렸다.
《특별반》에 망라되여 활동한 이전 일군에 의하면 《당시로 말하면 학생인입에서 실적을 내야만 비로서 총련일군으로서 제 몫을 하였다고 인정되는 그런 기풍이 서고있었다.》고 한다.
학생인입은 년간을 통한 사업이였다. 도꾜도내 초급학교들에서 입학식이 끝나면 4월부터 총련본부가 매월 사업의 추진정형을 확인하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본부위원장이 누구보다 학생인입에 관심을 돌리고 책임일군회의가 진행될 때마다 미진된 사업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고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료해장악하였다.
그 연장선에서 《특별반》이 조직되였다. 《〈어려운 대상〉이 안고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처방을 찾고 그것을 실행하는것이 사명》이였다. 《아래단위에 일을 내맡기지 말고 본부의 책임하에 사업을 끝장내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대상을 만났다.》고 한다.
아까바네에 사는 모자가정이 안고있는 생활상애로를 풀기 위한 방도도 모색되였다. 녀교원, 학교에서 보고를 받아 실정은 사전에 알고있었다. 2명의 아이를 키우는 강민자씨가 경제적고충을 겪는데 그는 자택에서 서예교실을 운영하며 당시는 우리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서예를 배워주고싶다는 기운이 있었다. 《특별반》 성원들은 도꾜제3초급의 교장을 만나 의논하여 그의 동의를 받았다. 그래서 교장이 강민자씨의 아빠트를 찾았던것이다.
총련본부가 주관하는 《어려운 대상》과의 사업에는 말그대로 《전 조직이 달라붙었다.》고 한다. 대상이 안고있는 애로를 풀기 위해 상공회, 동포금융기관이 한몫 하는 경우도 있었다. 민족교육의 필요성, 우월성을 잘 리해하지 못한 대상을 설복하는 방도를 찾는데서도 집체주의가 발휘되였다.
그후 총련 도꾜도본부는 해마다 12월에 《학생인입특별반》을 조직하고 사업을 벌리게 되였다.
《후대들에게 무엇을 남길것인가》
그동안 학생들과 수많은 동포들에게 서예를 가르쳐온 《금산숙》은 일본의 전국청소(全国清書)콩클에서 최고상을 8번 수상하였다. 일본에서 서예전시회가 30차례 열리고 미국, 뽈스까를 비롯한 외국에서도 전시회가 개최되였다.
활동의 령역을 부단히 넓혀나가는 강민자씨는 현재 일본서도미술관(日本書道美術館) 부관장의 직함을 가지며 《금산숙》뿐만아니라 일본시민, 동포들과 함께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유지의 모임》을 뭇고 그 사업에도 힘을 기울이고있다.
최근에는 재일조선인으로서 후대들에게 무엇을 남길것인가를 자신의 테마로 삼고 활동을 벌린다는 강민자씨에게 있어서 우리 학교 서예교실을 통해 맺어진 인연은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귀중한 재부이다.
그는 서예를 배운 학생들의 명단이 기록된 관리대장을 간수하고있다. 두툼한 대장을 펼칠 때면 어린 제자들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한다. 그들속에는 국가대표로서 월드컵에 출전한 축구선수, 국제경기에서 우승한 태권도선수가 있고 이름난 예술인도 있다. 어린시절의 추억을 잊지 않고 오늘도 《금산숙》의 간판이 걸린 그의 자택을 불쑥 찾아오는 중년나이의 제자도 있다.
아들의 편입을 계기로 어머니로서 우리 학교와 인연을 맺게 된 강민자씨는 어느새 학생들에게 서예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였고 교실에서 수많은 아들딸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어머니》가 되였다.
아이를 우리 학교에 보내여 조선사람으로 키우는 과정에 새로운 만남이 생긴다. 뉴대가 깊어져 뜨거운 정이 오간다. 동포사회의 맥은 그렇게 하여 면면히 이어져왔다.
37년전의 그때 그 장면, 한명의 학생을 우리 학교에 받아들이기 위해 그토록 정열을 바친 일군, 교원들의 모습을 감회깊이 돌이켜보며 강민자씨는 말한다.
《주어진 기회를 놓침없이 잡았으니 나는 행운아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오늘도 그들의 헌신에 고마움을 금할수 없습니다.》
(김지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