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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우리 말과 나②/박재수

2023년 08월 11일 08:05 론설・콜럼

우리 말로 쌓아놓은 《재산》

갓 깐 완두콩을 바구니에 담은 사진이 제자에게서 보내여왔다.

제자의 《재산》

페이스북을 보다가 갓 깐 완두콩을 바구니에 담은 사진밑에 남쪽에 시집간 제자가 쓴 짤막한 글이 한눈에 안겨왔다.

제자는 지금 남쪽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산다. 그것을 본 길손과 제자가 주고받은 말을 쓴 글이다.

길손이 묻는다. 《남는것 있어?》

제자는 농사는 남조선에서 대농이 아니면 남는것이 없다고 하면서 말을 잇는다.

《농번기는 주말도 놀러 가지 못해서 돈 안 쓴다. 농산물의 모양이 나쁜것들은 집에서 먹거나 이웃사람들에게 나누어주니 서로 식비를 줄일수 있다. 돈없이도 일하는게 무언지를 아이들에게 보여줄수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씨앗을 뿌리고 키우는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면서 농경문화를 이어온 우리 민족의 전통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것들을 땀흘리며 배우니 잊지 않을것이고 몸에 배인다. 이만하면 남는것이 너무도 많지요.》

얼마나 기특하고 훌륭한 생각인가!

늘 자기 생각을 똑똑히 말하며 행동으로 옮기던 대학생시절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제자는 대학생시절 학생조국방문단 성원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동무들과 함께 우리 말과 글, 화술을 배우던 즐거운 나날들을 오늘도 잊지 못해 한다.

평양에서 배운 우리 말이 잡탕말로 변해버린 서울말보다 훨씬 좋다고 하면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에 아름다운 우리 말을 쓰려고 신경을 쓴다고 한다.

오늘도 농사일을 하는 틈틈에 남쪽에서 배운 창작판소리를 구수한 우리 말로 창작하고 공연하며 동네 아이들에게 우리 춤을 배워주느라 여념이 없다.

올해 2월달에 부친의 병문안도 할겸 가족들과 함께 일본에 왔었다.

그동안 친정에 있으면서 자신이 창작한 판소리 《내 똥 땅이 되다》를 일본에서 처음으로 공연하였다.

바다건너 고향땅에 시집간 재일조선인 3세인 주인공이 남쪽땅에 뿌리내려 조선사람으로 떳떳이 살아가는 모습을 1세와 2세의 추억과 삶의 모습을 통하여 보여주는 작품이였다.

나도 도꾜 고다이라(小平)에서 한 공연을 보러 갔다. 판소리라 하니 쉰 목소리로 노래하는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웃음도 있고 눈물도 있는 훌륭한 공연이였다.

제자의 소리스승과 남편의 장단에 맞추어 제자가 소리를 하고 딸 둘이 춤을 추는 공연을 보면서 학생조국방문단으로 조국에 함께 갔을 때 《돌배 딴 이야기》를 재치있는 화술로 보여준 그때의 모습이 떠올라 저절로 얼굴에 보름달같은 웃음꽃이 활짝 피였다.

오늘도 우리 말과 글을 빛내이는 길에서 우리 민족의 존엄을 지키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제자가 자랑스러웠다.

우리 말과 함께 살아온 나날들

나는 제자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 말과 글이 나에게 남겨준것이 과연 무엇일가.) 하는 생각이 문득 났다.

생각이 깊어졌다. 우리 말과 글을 배우고 가르치던 지난날의 추억의 토막들이 나의 머리속에 언뜻언뜻 스쳐지나면서 나와 60여년을 함께 해온 우리 말과 글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되였다.

중급부에 입학한 그날, 처음으로 우리 말로 불리운 나의 이름이 내가 조선사람임을 자각하게 했다. 우리 말과 글로 수업을 받고 조청소년단생활을 보내는 과정에 평생 잊을수 없는 스승들과 동무들을 만났다.

조선말전문가 될 희망을 안고 조선대학교 문학부에서 배우던 나날은 얼마나 벅찼던가.

대학시절에 배운 김일성주석님의 교시 《조선어를 발전시키기 위한 몇가지 문제》(1964.1.3)와 《조선어의 민족적특성을 옳게 살려나갈데 대하여》(1966.5.14)는 나의 꿈을 실현하고 오늘까지 우리 말과 운명을 함께 해오는데서 삶의 라침판으로 되였다.

김정일장군님께서 《언어는 민족의 기본표징의 하나이며 언어생활은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고 민족성을 고수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합니다.》라고 하신 교시는 나의 마음의 기둥으로 되였고 김정은원수님께서 총련에 주신 강령적5.28서한에서 《조국 멀리 이역땅에서 사는 동포들에게 있어서 민족의 혈통을 고수하는데 애국의 참모습이 있으며 우리 말을 하는 시간은 곧 애국으로 사는 시간입니다.》라고 하신 말씀은 나의 좌우명으로 되였다.

대학졸업후 교단에 서게 된 나는 학생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게 되였다. 아니, 가르치기 위하여 하루하루 필사의 힘을 다해 배웠다.

1978년 7월 제6차 교육일군대표단 성원으로 조국을 방문하여 국어강의를 받은 때로부터 오늘까지 56번의 조국방문은 조국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우리 말 교육자, 연구자로 자라나는 보람찬 배움의 나날이였다.

이 배움의 나날이 있어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더 잘 배워줄수 있었고 우리 말 연구도 해올수 있었다.

나의 《재산》

조국은 나에게 우리 말과 글, 조선어학으로 민족교육과 재일동포사회를 위하여 이바지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조국방문의 나날에 우리를 가르쳐주고 이끌어준 고마운분들의 이름과 얼굴이 머리속에 그리운 모습으로 떠오른다.

우리 학생들과 국어교원들의 조국강습을 지도해준 김형직사범대학 김영일선생님, 화술지도를 해준 국립연극단 박경혜지도원, 글짓기를 지도해준 김형직사범대학 강선규작가.

《천금처럼 귀한 마음 래일에 바쳐 머리는 백발되고 주름은 늘어도 한생을 젊음속에 함께 웃는 나의 벗!》. 생전에 그가 나에게 남겨준 글이다.

내가 학사론문을 변론할 때 론문강평을 해주신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최정후선생님(후보원사, 교수, 박사)과 김일성종합대학의 김영황선생님(공훈과학자, 원사, 교수, 박사), 박사론문을 지도해주신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정순기선생님(원사, 교수, 박사)들은 잊을수 없는 나의 스승들이시다.

조국방문의 나날에 만난 고마운분들(왼쪽으로부터 최정후선생, 정순기선생, 김영황선생)

주체의 언어리론건설에서 많은 업적을 남기신 최정후선생님은 생전에 나에게 《언어의 복무적역할을 기본으로 언어의 본질을 보시고 언어가 인간에게 복무하도록 하신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언어리론을 깊이 연구하고 널리 소개선전하는 훌륭한 해외언어학자가 되여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나의 주체적언어리론연구에 힘을 실어주시였다.

김일성종합대학 김영황선생님은 나를 언어학연구의 길에서 한몫 하도록 지난 40여년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올해 93살이 되시는 김영황선생님은 나에게 늘 《조국과 민족에 이바지하는 교육자, 연구자가 되려면 평생 공부를 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오늘도 연구활동에 정열을 다하시는 모습으로 나에게 교육자, 연구자의 참모습을 보여주고계신다.

조선어문법과 사전편찬의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있는 나의 박사론문지도교수이신 정순기선생님 역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진정한 교육자, 연구자가 되려면 시간을 아껴가면서 책을 읽고 사색하는 습관을 키워야 한다.》라고 하시며 지금도 나를 이끌어주신다.

스승과 제자사이의 옛정은 오늘도 이렇게 끊임없이 이어지고있다.

우리 말과 글은 나에게 민족의 넋을 심어주고 긍지와 자부심, 자존심을 키워주었다.

우리 말과 글은 나에게 이국땅 일본에서 대를 이어 민족성을 계승해나가는 후대들을 키우는 보람과 기쁨을 안겨주었으며 조국과 민족의 번영, 통일을 위한 곧바른 길을 걷게 해주었다.

우리 말과 글로 재일동포들과 인연을 맺었고 북과 남, 해외동포들과 이어졌다.

우리 말과 글은 나에게 천금과도 바꿀수 없는 귀중한 《재산》을 남겨주었다.

그렇다. 우리 말과 글은 애국과 애족을 함께 하는 나의 친근한 벗이자 사랑하는 동지이다.

【경력】1966년 3월 교또조선중고급학교 졸업(9기생), 1970년 3월 조선대학교 문학부 졸업(12기생), 문학부 및 문학력사학부 학부장, 조선어연구소 소장 력임, 현 한글능력검정협회 상담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교수, 언어학박사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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