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시기의 서산성 발굴고증/축성기술과 당대 력사연구에 큰 의의
2013년 01월 28일 13:26 력사23일발 조선중앙통신은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의 교원, 연구사들이 고구려시기의 력사유적인 서산성(적두산성)을 발굴하고 그에 대한 과학적인 고증을 하였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산성은 지금까지 문헌자료로만 전해왔다.
16세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그 이후시기의 력사문헌들에 의하면 산성은 《묘청의 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고려시기의 봉건관리였던 김부식(1075∼1151)에 의해 쌓아진것이다.
교원, 연구사들은 산성과 관련한 력사적사실에서 여러가지 의문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명하기 위한 사업을 벌리였다.
문헌자료에 기초하여 평양시 만경대구역 선내동에서 산성을 찾아내고 2차례의 발굴을 통해 그것이 고려시기에 쌓은것이 아니라는것을 증명하였다.
유적은 대동강과 보통강합수목에서 약 800m 떨어져있고 보통강에서 약 1,000m 떨어진 서산의 92.6m되는 고지를 주봉으로 하여 그 동남쪽의 일정한 면적을 포함하고있다.
성의 모양은 장방형이고 둘레는 2,170m이다.
서쪽은 서산줄기이며 동쪽은 평지를 이루고있어 전반적으로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지세를 이루고있다.
성의 형식과 축조방법, 돌가공방법 등이 고구려시기의것과 일치한다.
형식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고로봉식산성에 가깝고 잘 가공한 4각추모양의 성돌(너비 26∼31㎝, 높이 13∼18㎝, 길이 31∼41㎝)들과 그 재질은 응회암, 응회질사암, 안산분암 등으로서 대부분 평양성에 쌓은 돌과 같았다.
발굴지점들에서는 붉은색기와들과 질그릇쪼각들, 쇠활촉을 비롯한 고구려시기의 유물들이 나왔다.
이와 함께 성안과 성벽들에서 수많은 고려기와들도 발굴된 사실에서 산성이 고구려시기에 축조되여 고려시기에도 리용되였다고 보고있다.
유물들과 사료들을 통하여 산성은 평양에 수도를 정한 고구려가 그 방위를 철저히 하기 위해 평양성앞에 보조성으로 쌓은 성이라는것이 확증되였다.
력사의 이끼속에 묻혀있던 서산성의 발굴과 그 과학적고증은 고구려시기의 높은 축성기술과 당대의 력사를 연구하는데서 커다란 학술적의의를 가진다.
표대유적에서 돌숟가락을 발굴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집단이 표대유적 고대집자리에서 돌숟가락을 새로 발굴하였다.
표대유적은 1994년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의 표대마을 앞벌에서 발견된 대규모의 부락터유적을 말한다.
이번에 고조선전기에 해당되는 표대유적 4호집자리와 6지점 밭갈이층에서 화강암을 갈아서 만든 숟가락유물이 새롭게 발굴되였다.
표대유적 4호집자리에서 나온 숟가락의 생김새는 지금의 아동숟가락과 비슷한데 자루부분이 절반정도 부러져 없어진것이다.
숟가락의 남은 길이는 6.5㎝정도인데 그중 술부분의 길이는 4.5㎝, 너비 3.1㎝, 두께 0.4∼0.8㎝이다.
6지점의 갈이층에서 나온것도 크기는 다르지만 전반적인 생김새는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뼈나 나무는 돌에 비하여 가공하기가 훨씬 쉬우며 금속재료인 경우에도 용해물을 형틀(거푸집)에 부어넣으면 각이한 형태의 물건을 쉽게 만들어낼수 있다.
그러나 화강암과 같이 굳은 돌로 숟가락과 같은 자그마한 물건을 섬세하게 가공해낸다는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힘든 일이였다.
이번 발굴은 당시 조선의 선조들이 뼈나 나무를 가공하는것은 물론 굳은 돌재료로 자그마한 물건도 섬세하게 가공해내는 높은 돌가공술을 소유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주는것과 함께 식생활에 필요한 도구제작에 얼마나 큰 의의를 부여하여왔는가를 잘 알수 있게 한다.
고고학전문가들은 선조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반도에서 살면서 자기 식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온 문명하고 재능있는 민족이라는것을 알수 있다고 말하였다.
【평양지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