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고】졸본과 국내성탐방기(중)/손문규
2012년 11월 02일 17:35 문화・력사고구려의 옛 수도를 찾아서
천연요새 集安의 고구려유적
3일째 오후 桓仁을 출발한 우리는 장백산줄기의 하나인 로야령의 높고 깊은 산과 계곡을 넘고넘어 4시간후에 集安땅에 도착하였다.
눈앞에 유유히 압록강이 흐른다. 강 건너편에는 조국땅 만포시가 보인다.
이전에는 通溝라 불리우던 集安은 압록강연안에 있는 평지가운데 가장 넓은 곳이다. 북쪽으로 로야령의 높은 산을 등지고있어 북쪽에서 오는 적과 북풍을 막으며 험준하면서도 양지바르며 비옥한 곳이 바로 集安땅이다.
고구려의 옛 수도 国内城이 자리잡은 이 일대는 발굴된 고구려무덤만 하여도 1만 3,000여개나 되며 禹山, 麻線溝, 山城下 및 七星山 등 여러곳에 분포되여있다.
사신무덤과 태왕무덤
集安의 중심지로부터 동북쪽으로 6km 떨어진 禹山지구에서 대표적인 고구려무덤과 광개토왕릉비(広開土王陵碑)를 참관하였다.
입구에서 걸어서 500m가량의 지점에 있는 사신무덤(다섯무덤중 5호무덤)부터 시작하여 태왕무덤, 광개토왕릉비, 자료전시장, 장군무덤을 유심히 돌아보았다.
벽화가 그려진 사신무덤에서 백호, 청룡, 현무, 주작 등을 보고 감동을 금할수가 없었다.
언덕길을 올라간 곳에 커다란 바위돌을 다듬어 밑단 한변의 길이 63m, 높이가 30m나 되는 커다란 바위돌을 얹어서 만든 태왕무덤도 찬찬히 보았다. 우리 고고학계에서는 굉장히 큰 규모의 이 태왕릉으로부터 동북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 광개도왕릉비가 있는것으로 미루어 이 무덤이 広開土王의 무덤으로 추정하고있다.(《조선전사》(3) 제2판 351페지)
우뚝 서있는 광개토왕릉비
태왕무덤에서부터 푸른 주단같은 잔디길을 얼마간 걸어가면 광개토왕릉비가 우뚝 서있다. 414년, 長寿王에 의해 세워진 이 비에는 1,800여개의 문자가 새겨져있다. 높이 6.34m, 사방이 1.43∼1.9m의 4각주로 된 커다란 비석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경탄의 목소리를 올리며 떠날줄 모른다. 우리 일행도 그랬음은 두말할것도 없다.
새겨진 글에 담겨진 풍부한 사료적가치, 간결하고도 웅심깊은 문장, 엄정하고도 원숙한 예서체글씨는 명필이다. 독특한 색갈, 웅장한 크기, 형태미로도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해방후 우리 력사학계에서는 이 릉비에 주목하여 학술토론을 여러번 진행하였으며 1963년 가을에는 공화국의 력사학자와 고고학자 집단이 현지에서 광개토왕릉비 재조사사업을 벌려 비면과 비문을 다시 심중히 검토하고 정밀한 탁본과 실척도를 작성하였다.
그후 1966년에 드디여 박시형저 《광개토왕릉비》가 발간되였다.고전적의의를 갖는 이 책이 나온 후 릉비연구에 대한 내외학자들의 관심은 급격히 높아졌고 동아시아고대사론쟁의 초점으로 되고 고구려사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2014년은 광개토왕릉비 건립 1600년이 되는 해이므로 내외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킬것이 예상된다.
1987년 12월 조국에서 《고구려문화전》을 진행할 때 똑같이 정밀하게 제작된 릉비모형이 조선대학교 박물관 앞에 전시되여있다.
웅장하고 견고한 장군무덤
이어 돌칸돌각담무덤인 장군무덤을 참관하였다. 높이 13m, 기단아래부분의 한변 길이 34m, 7단의 계단모양으로 쌓여진 이 무덤은 견고하고 안정감이 있다. 매개 층에는 잘 다듬은 화강석을 포개여 쌓고 무덤 4면에 각각 3개씩 큰 자연돌을 기대여세워서 계단돌이 밀려나가지 않게 하였다. 마치 에짚트의 피라미드를 방불케 한다.
네모난 장군무덤의 겉모양의 웅장함과 조화로운 균형미, 잘 맞물려 쌓은 견고한 돌단 등 그 건축양식의 아름다움에 누구나 경탄을 금할수 없었다.
山城子山城유적
우리는 集安의 중심지에서 4km 떨어진 곳에 있는 대표적인 고구려산성의 하나인 山城子山城유적도 찾아갔다. 입구에는 《丸都城유적지》라는 큰 표식이 있다. 그러나 우리 력사학계는 이 산성은 尉那厳城으로 추정하고 수도 국내성의 방위역할을 수행하는 수도방위성이며 이 시기 부수도인 丸都城은 중국의 사서에도 기록이 있듯이 卒本城보다 더 서쪽지방에 있는것으로 보고있다.
国内城과 다시 山城子山城
4일째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는 산성유적을 찾을 차비를 서둘렀다.
우리가 머문 숙소앞이 바로 국내성의 중심지이며 왕궁터자리였다. 둘러보니 여기는 《高句麗遊地公園》으로 훌륭히 꾸려져있었다. 공원안에는 왕궁건물에 사용된 커다란 주추돌들과 발굴된 기와쪼각들이 여러개 전시되여있다.이 주추돌을 통하여 웅장하게 꾸려졌던 国内城왕궁을 상상할수 있었다.
자료에 의하면 두번째 수도 国内城(일명 不耐城 또는 不而城이라고 함)은 방형으로 쌓은 편지성으로서 성벽의 길이가 동쪽 554.7m, 서쪽 664.6m, 남쪽 751.5m, 북쪽 715.2m이며 둘레는 2,686m이다. 성안에는 남북과 동서의 문을 련결하는 도로에 의하여 정연하게 구획되여있다. 내성에는 왕궁과 관청, 지하배수시설이 꾸려져있고 성밖은 해자(濠)로 둘러싸여있다.
国内城은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한 후에도 고구려북방의 가장 큰 정치경제적중심지였고 고구려 3경의 하나였다. 동방에 그 위력을 과시하던 고구려의 수도로서 참으로 넓고 웅대하였다. 성곽과 도시배치정형 등의 꾸림새와 건축미는 평양의 大城山과 長安城건설에 계승되였다.
우리는 山城子山城유적을 다시 찾아갔다.
외성의 성벽을 넘어 40∼50m 올라간 곳에 돌을 쌓아 만든 전망대유적에 올라갔다. 우리는 외성 성벽과 산성으로 구성된 내부구조를 한눈으로 볼수가 있었다. 여러 산봉우리를 련결하여 견고하게 만든 고구려산성형식인 고로봉식산성이라는것을 확인할수 있었다.
그 옛날 424년동안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였던 国内城. 고구려인민들은 수십차례에 걸친 漢, 魏, 燕 등 외래침략자들과의 치렬한 전쟁을 이겨내였다. 특히 広開土王의 시대에는 고구려의 전성기를 맞이한 동방강국의 이름난 수도였다.
우리는 集安땅의 유적들을 돌아보면서 세계에 그 이름을 떨친 고구려의 기상을 온몸으로 느꼈다. 광개토왕릉비,장군릉,태왕릉 그리고 세계미술사의 보물고를 풍부히 한 고구려벽화고분군들이 많이 있는 이곳은 고대사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한번은 꼭 찾고싶은 고장이다.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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