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 료따로의 장편소설 《언덕우의 구름》을 읽고서 (6)/조희승
2017년 05월 16일 16:59 력사경사된 명치사관의 극복
《언덕우의 구름》을 읽으면 우리가 몰랐던 많은것을 알게 된다.
어떤 대목은 아주 그럴듯하게 묘사함으로써 그것이 력사적사실인지 허구인지 구분못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일일이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작가가 꾸민것인지 원서원문을 찾아다닐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소설이기때문에 재미있으면 읽는것이고 재미없으면 안읽는것이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간과할수 없이 엄중한 몇가지 측면들이 눈에 띄게 나타나므로 이에 대해 주의할점 몇가지를 제나름의 감상을 섞어서 적기로 한다.
우선은 작가 시바 료따로가 너무나도 명치시대를 우상화하던 나머지 명치《천황》제자체를 지나치게 미화분식하였다는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옳지 않다.
작가는 제정로씨야의 황제제와 일본의 《천황》제를 같은 성질의것으로 파악하는것을 무지(無知)한것으로, 잘못된것으로 단정하고 오직 로씨야 짜리제만이 나쁘다고 일방적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천황》제는 헌법이 있고 국회가 있으니 《민주주의적》이라는 식의 설명을 하는 한편 로씨야는 헌법도 없고 국회도 없으니 아주 나쁘다는것, 로씨야는 일본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식의 론리를 폈다. 그리고 명치의 황제제가 동일한것으로 보는 일부 사회학자들은 아주 잘못되였다고 비난하였다.
일본《천황》제가 얼마나 반동적이고 파쑈적이였는가 하는것을 여기서 구태여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력사적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시바는 그것을 긍정하고 미화분식하고있는것이다.
시바가 말하는 명치시대의 헌법이란 《대일본제국헌법》을 가리킨다. 그러한 헌법이 있다고 하여 짜리로씨야와 다르다는 식으로 론리를 펴는데 대하여 아연해질수밖에 없다.
1945년 8월 이전의 일본의 반동화와 파쑈통치는 바로 시바가 말하는 《대일본제국헌법》과 《교육칙어》에 따라 《법적》으로 담보된 사상최대의 억압통치였다. 그것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다니 참으로 억이 막히는 일이다.
제국헌법과 《교육칙어》가 가혹하기 짝이 없는 반동적내용으로 일관되여있었다고 하는것은 헌법에 명치《천황》을 《현인신》으로 규정한 사실 하나만 놓고 보아도 일목료연하다. 이것은 로씨야의 황제보다 더한 우상화이다.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규정한 《제국헌법》과 그에 기초하여 온갖 파쑈독재를 실현할수 있는 명치《천황》제가 로씨야 천황제와 다르다고 하는 시바의 생각이 어떤것인지 참으로 불가사의한것으로 느껴진다. 《제국헌법》이란 말그대로 일본을 제국으로 규정하고 명치《천황》을 살아있는 《신》(神)으로 만들고 만세일계의 후손,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규정한것인데 이것이야말로 허황하기 짝이 없는 넉두리에 불과한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바는 그것을 좋다고 찬양한다. 《교육칙어》를 비롯한 명치《천황》에 의해 발포된 온갖 파쑈적독재기능과 법이 제국헌법과 국회에 의해 실행되였는데 그것을 우상화하다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제국헌법은 말그대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제국을 정당화한 법이다. 그러한 반동국가를 짜리로씨야에 비해볼 때 헌법과 국회가 있으니 일본은 더 좋은 나라라고 론리를 전개하는것이야말로 사고가 경사(傾斜)되고있다.
《교육칙어》라면 최근(2017년 4월) 아베내각이 헌법과 교육기본법을 《위반하지 않는》 형식으로 《교육칙어》를 교재로 리용하는것을 허용한다고 결정한 소식이 떠오른다. 한때 수상을 한적이 있던 아소 다로가 외할애비 요시다 시게루에게서 《교육칙어》를 배웠다면서 뻐긴적이 있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자랑거리가 아니라 얼간이라는 말을 듣게 되였다는것은 세상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다 아는것처럼 《교육칙어》란 1890년 10월 30일 제1차 제국의회의 개회직전에 발표된 반동칙어로서 봉건적충효를 중핵으로 한 유교적도덕을 기초로 둔 극단한 충군애국사상을 전국민, 전국학교에 강제적으로 침투주입시킴으로써 반동적《천황》제확립에 이바지하게 한 법아닌 법이다.
이것이 반동적《천황》제의 정신도덕적지탱점으로 되였다. 제국헌법은 《교육칙어》가 나오기전인 1889년에 공포된것으로서 《천황》주권주의를 취하여 국민의 권리, 자유, 정치참여를 극력 억제한 파쑈적인 헌법이였다. 이름도 말그대로 《대일본제국헌법》이다.
이것은 《천황》의 이름으로 타국을 침략하고 지배해도 된다는 법론리로 일관되여있다. 시바는 이러한 헌법과 국회가 있으니 명치시대는 짜리로씨야와 질적으로 다르며 아주 좋다고 한다.
그러되 《교육칙어》는 내놓고 좋다고까지는 하지 않았다. 이렇게 명치시대를 덮어놓고 좋다고 하기때문에 제국주의침략전쟁인 로일전쟁 그 자체도 《조국방위전쟁》이라고까지 단정하였다. 이것은 필자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하였다.
시바는 로일전쟁에 드는 비용을 정부가 증세를 가지고 타개하려고 하였는데 《국가존망이기때문에》 국회에서 통과시켰다고 한다음 이것을 놓고 《이 전쟁이 민족적실감으로서는 조국전쟁이였던 증거의 하나》이며 《국민이 내채(빚)를 안은데다가 저금이 증가한것도 조국전쟁의 특징》이라는 황당한 론리를 폈다.
전쟁비용을 인민들의 혈세로 채우기 위해 증세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킨 다음 억지로 국민들에제 저금을 강요한것이 조국방위전쟁이라면 침략전쟁이 로골화된 태평양전쟁시기 강제로 각종 공채를 람발하면서 공채를 사들이게 강요한것도 조국방위전쟁인가 하고 묻지 않을수 없다.
로일전쟁은 철두철미 제국주의침략전쟁이였다. 구체적으로는 조선에 대한 독점적식민지지배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 벌린 전쟁이였다. 전쟁도중에 화태-싸할린을 타고앉을 야심이 꿈틀거려 압록강군을 편성하게 되였다. 소설에서는 일본륙군참모본부 차장 나가오까 가이시(長岡外史 1858~1933)가 전쟁과정에 생각해냈다고 하지만 그 사실여부는 알수 없다. 아무튼 원로이며 참모총장 야마가따 아리도모이하 대본영의 지지찬성을 받았다고 하니 정부의 방침이 틀림없었고 강화담판결과 싸할린까지 일본이 타고앉았다.
로일전쟁이 일어난것은 만주에 대한 독점적지배권과 조선에로 진출하는 로씨야에 대하여 조선과 만주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려는 일본과의 침략기도가 충돌한데서부터 일어난것이다. 거기에 그 어떤 《조국방위전쟁》이라는 따위의 딱지가 통할수 없다.
소설에서는 도처에서 온 유럽나라가 일본을 지지하며 특히 로씨야의 압제에 허덕이는 뽈스까, 핀란드, 스웨리예 등이 일본을 전적으로 지지한듯이 묘사되고 있다. 일본은 일본대로 로씨야의 침략에 의해 당장 식민지가 되는듯한 느낌이 가도록 묘사되였다.
과연 그러한가.
일본은 1868년의 《명치유신》이후 1876년의 《강화도조약》강압체결, 1895년의 명성황후살해사건인 을미사변을 일으키는 등으로 체계적으로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지지배하기 위해 온갖 모략과 책동을 감행하였다.
일본은 미국대통령 시어도 루즈벨트의 중재알선을 받아 미국의 북동해안의 군항인 포츠머스에서 1905년 9월 5일 로일전쟁의 강화조약인 《포츠머스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의 첫번째에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다는 내용이 규정되여있다. 그밖에 《관동주》 조차지와 장춘, 려순구간의 철도(남만철도)의 일본에로의 양도, 남부싸할린의 일본양도, 연해주와 로씨야령내의 어업권을 일본에게 주는 등 일본의 침략적내용들이 규정되여있다.
조약내용에서 알수 있는것처럼 로일전쟁을 벌린 첫번째목적이 바로 조선통치권문제였다.
아니나다를가 《포츠머스강화조약》이 체결된지 몇달도 못되여 그해 11월 《동양평화》의 구실밑에 당시의 《추밀원》의장이였던 이또 히로부미가 조선에 기여들었다.
11월 15일에는 조선주둔군 사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찌로 하여금 일본군대로 왕궁을 포위하게 한 다음 17일에는 《을사5조약》을 날조하였다. 이른바 《조약》문에는 국새와 황제의 수결(수표)도 없는 가짜 문서장이였다.
조선의 외교권강탈을 골자로 한 《을사5조약》으로 일본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지배가 확립되였다. 일본이 《을사5조약》을 조작날조할수 있었던것은 로일전쟁을 통하여 조선에 대한 독점적지배권을 확립할수 있었기때문이였다. 따라서 로일전쟁이 일본의 《조국방위전쟁》이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작가 시바 료따로가 로일전쟁을 《조국방위전쟁》이라면서 극구 찬양하고 일본이 핀란드나 뽈스까와 같이 외세에 의해 억압받는 존재, 나라가 로씨야에 의해 먹히우는 《국가존망》의 위기에 있었다고 말한다면 어찌하여 전쟁후 기다렸다는듯이 이또 히로부미가 조선에 기여들어 왕궁을 군대로 포위하여 《을사5조약》을 강제로 날조하였는지 납득이 될수 있는 설명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관동주》 조차지, 남만철도 등 여러 리권을 강탈한 내용에 대해서도 무슨 설명이 있어야 한다.
시바는 말한다. 로일전쟁비용을 보충하기 위해 국민들이 저금을 많이 하였고 국회에서 증세안이 통과되였기때문에 《국민적조국전쟁》이라고. 그렇다면 1905년 9월 5일 미국의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되자 왜 그날로 히비야폭동(日比谷 ?打事件)이 일어났겠는가.
아다싶이 히비야폭동은 9월 5일 《포츠머스조약》을 반대하여 들고일어난 대중적폭동이였다.
히비야공원에서 국민대회를 주최한 민중은 경관과 충돌하고 페회후 주민신문사, 내무상관저, 그리스도교회, 경찰서, 시가전차 등을 습격하였다. 경찰관주재소와 파출소의 70%를 소각하였으며 검속자 2 000명, 부상자 300명, 죽은 사람 17명, 308명이 기소되는 등의 대소동으로 번져졌다. 대부분이 전쟁의 희생자가 된 로동자와 잡부들이였고 폭동은 요꼬하마, 오사까, 나고야, 고베를 비롯한 각지에 파급되였다. 폭동은 로일전쟁이 《국민적조국전쟁》과 거리가 먼 사건이였다는것을 일목료연하게 보여주었다. 시바는 이러한 대규모사건을 몰라서 조국전쟁이니 조국방위전쟁이라고 하고있는지 과연 황당하기 그지없는 궤변이다. 로일전쟁의 결과 려순에서 약 6만, 봉천(심양)에서 약 7만명의 사상자가 나는 등 일본의 젊은이들이 값없이 죽었다. 그 희생자가족들의 슬픔과 원한은 이를데 없다. 침략전쟁을 조국방위전쟁으로 둔갑시킨 시바에게 초보적량심이 있는지 없는지.
로일전쟁이 조국방위전쟁으로 묘사되게 되면 궁극에 가서는 그것이 《백인에 의한 아시아의 지배로부터 해방독립을 이룩한다.》라는 그릇된 사상으로 떨어지게 된다.
1945년 이전부터 우가끼 가즈시게(1868-1956)를 비롯한 일본군부두목들이 줄곧 외우던 이 《백인에 의한 아시아의 지배로부터 해방독립을 이룩한다.》고 하는 이 정치적구호는 도죠내각때까지 계속되였다. 오늘에 와서는 현 일본의 집권세력에까지 계승되여 거리에서 판매되는 일본력사교과서들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수 있다. 결국 시바는 《언덕우의 구름》에서 1945년 패망전의 일본 파쑈군벌들이 외우고 오늘도 집권자민당의 정치가들이 력사교과서들에서 재현하고있는 정치사상의 선전자, 대변자로 되고있는 셈이다.
작가 시바 료따로는 명치시대를 우상화하던 나머지 인물평가에서도 나쁜놈까지도 좋게만 평하였다. 그러한 대표적실례가 아까시 모또지로(明石元次郞 1864-1919)이다.
작품에서 아까시 모또지로의 활동내용을 《대첩보》 즉 대간첩이라는 항목에서 취급하였다. 로일전쟁승리를 위한 큰 몫을 아까시가 대로씨야공작으로 이룩하였다는것이다. 사실내용을 과장하기도 하면서 아까시가 스웨리예 스톡홀름에서 로씨야망명객들을 대상으로 100만¥이라는 거액의 돈을 뿌리면서 공작한 내용을 엮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아까시가 대첩보로서 일본의 리익을 위하여, 로일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목숨도 바칠 각오로 《영웅》적인 희생성을 발휘한데 대해서는 쓰면서도 그가 조선에서 어떤짓을 감행하였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반짝반짝하는 《좋은 측면》만 잔뜩 라렬하였지만 그가 그후 조선에서 감행한 악독한 짓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기때문에 독자들은 아까시가 영웅남아로만 알게 되는 인상을 주고말았다.
아까시 모또지로는 앞에서 언급한것처럼 로일전쟁시기 스웨리예 스톡홀름에서 혁명전야의 로씨야내정에 대한 첩보활동을 한 다음 도이췰란드대사관 무관을 거쳐 1908년 조선주둔군 참모장, 1910년에는 조선주둔군 헌병대사령관, 경무장관 등을 하면서 조선의 의병투쟁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아까시의 명령하에 일본헌병들이 얼마나 많은 조선의 애국적의병들을 학살고문하였는지 모른다. 여기서는 그것이 기본이 아니기때문에 그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피한다. 시바는 왜 이러한 내용을 전혀 서술하지 않고 대만총독을 하였다고만 하는가. 일본헌병대가 조선의병에 가한 야수적만행과 탄압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만행과 탄압의 총본산이 바로 당시의 헌병대사령관 아까시 모또지로였다. 이러한 사실을 눈감고 모른척한 작가의 의도는 과연 무엇이였는지.
아까시 모또지로라면 반드시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우쯔노미야 다로(1861-1922)이다. 작품에서도 우쯔노미야 다로가 영국의 런던에 있으면서 첩보사업을 하였으며 아까시 모또지로와 밀접한 련계를 취하면서 로일전쟁시기 대로씨야 간첩질을 하였다고 썼다.
그런데 문제는 첩보활동에 종사한 이 두 간첩들이 다같이 조선의 독립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한 장본인들이였다는 사실이다.
아까시는 이미 본바와 같이 1908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인민을 탄압하는 조직적군대의 총본산이였고 우쯔노미야는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조선군(주둔군)사령관이 되여 3.1인민봉기를 류혈적으로 탄압한 인물이였다. 당시의 그의 일기가 이와나미서점에서 출판되였다는 소식도 있다.
우쯔노미야는 륙군대학을 졸업한 다음 곧 1890년에 륙군참모본부에 들어갔으며 그후 영국공사관 무관, 참모본부 제2부장을 하는 등 체계적으로 첩보활동에 종사한 전형적인 첩보전문가였다. 다시말하여 이러한 첩보활동의 전문가들인 아까시 모또지로와 우쯔노미야 다로가 다같이 조선에서 헌병대나 주둔군의 사령관이 되여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그것은 이들이 유럽에서 뽈스까나 핀란드 등 식민지지배를 받는 민족들의 감정과 심리, 사상동향 등을 잘 파악하고있었기때문에 그에 대처할 방책을 누구보다도 잘 세울줄 안다는 《고려》에서 그러한 인사사업이 진행되였을것으로 짐작된다. 실지로 아까시는 후에 식민지인 대만에서 총독을 하다가 현지에서 죄많은 한생을 끝마쳤다.
또하나 작가 시바 료따로가 명치시대를 우상화하던 나머지 력사적사실을 심히 외곡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명치시대관료들의 《청렴결백성》이다.
시바는 아까시 모또지로가 대로씨야공작을 함에 있어서 로씨야망국의 징표로 부패와 오직(汚職)을 들었다고 하면서 《이 면에서 아까시가 자주 놀란것은 로일전쟁시대의 일본의 관계(官界 -벼슬계-정계)에서는 이러한 병패가 전혀 없었기때문이다.》고 단정하였다.
로일전쟁시기라면 명치시대인데 과연 명치시대에 그러한 금전관계에서의 병패가 전혀 없었는지.
일본 명치시대의 관계-정계에서 부패가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는것이야말로 명치시대를 극도로 리상화, 우상화하는 추태로서 실로 놀라지 않을수 없다.
시바는 야마가따 아리도모에 대하여 말할 때 특출한 재간도 없고 《지사》로서의 면모는 더더욱 있는것같지 않다고 하면서도 청렴성측면에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로일전쟁당시 원로의 한명이면서도 륙군의 총수, 륙군참모총장인 야마가따 아리도모는 내각을 두번씩이나 조직하였고 공작이며 원수가 되는 등으로 이또 히로부미와 더불어 명치정부의 《최고지도자》가 되였다. 그러한 야마가따를 보면 명치시대의 정계가 어떤것이였는가를 잘 알수 있는것이다.
야마가따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것이 그의 뜨르르한 경력보다도 야마시로야사건(山城居事件)이다.
야마시로야사건의 주모자는 야마시로야 와스께(山城居和助 1836-1872)와 야마가따 아리도모이다.
와스께는 나가또(야마구찌현)출신으로서 처음 정토종의 중이 되였다가 후날 환속하여 노무라라고 칭한 다음 야마가따의 부하가 되여 기병대(奇兵隊)에 들어갔다. 1868년의 무진전쟁때 야마가따의 심복부하로서 호꾸에쯔(比越)방면에서 싸웠다.
후에 요꼬하마에 가서 상인이 되면서부터 야마시로야 와스께라고 개명하였다. 그후 곧 병부성(후에 륙군성)의 어용상인이 되여 성의 공금을 꾸어서 군납금을 바치군하였다. 와스께는 야마가따와의 밀접한 관계밑에 성의 돈을 꾸어썼는데 그 액수는 65만¥의 거액에 달하였다.
야마가따는 심복부하에게 성의 돈을 꾸어주는 대가로 뢰물을 얻어먹었다. 그러던중 그전부터 손을 대고있던 생사무역의 시세폭락으로 대손실을 입었다. 그런데 와스께는 무역시찰의 명목으로 프랑스 빠리에 가있으면서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탕망탕 사치한 유흥을 하면서 놀아댔다.
이것이 일본 공사관을 통하여 본국 외무성에 통보되였다. 이것이 정부내에서 륙군공격의 문제로 정치사건화되였다. 곤경에 빠진 야마가따는 와스께로 하여금 시급히 귀국하여 사태를 수습할것을 독촉하였다. 하지만 거액의 관비-빚돈을 반환할 길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와스께는 야마가따와 관계되는 일체 문건을 불살라버린 다음 륙군성내에서 할복자살을 하였다.
사법경 에또 신뻬이(江藤新平 1834-1874 사가번)가 문제를 추궁하였다. 사건이 정치화되면서 거기에 죠슈·사쯔마 번벌계군인들의 파벌싸움도 얽히여 결국 야마가따는 륙군대보(륙군경 다음벼슬인 차관격직책)를 사임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력사적사실은 바로 이러하였다. 금전수수관계에서 야마가따가 와스께에게서 어떻게 얼마나 얻어먹었는지 알수 없다. 왜냐하면 와스께가 모든 관계문서를 불태워버렸고 또 《죽은자 입이 없다.》는 식으로 할복자살하였기때문이다. 와스께는 야마가따를 등대고 병부성(륙군성)의 거액의 공금을 꺼내썼던것이다. 거기에 대가성이 없었다는것은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러니 시바가 작품에서 일본 명치시대는 아주 깨끗했는데 짜리로씨야만이 망국에 이어진 부패와 오직이 만연되였다고 하는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러한 엉터리없는 론리를 펴는 근원에 바로 시바 료따로의 잘못된 명치사관이 깔려있다. 그렇기때문에 시바의 명치사관은 경사되여있다고 하는것이다.
시바의 경사된 명치사관이 집약화된 《언덕우의 구름》은 오늘의 일본사회에서 대환영을 받고있다. 따라서 그만큼 영향이 크다. 그것은 소설에서, 화면에서 받는 악영향이다. 경사된 명치사관의 악영향은 반드시 극복되여야 한다.
(조선력사학학회 회장, 조선작가동맹 정맹원, 일본연구소 상급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