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신보》창간 80돐〉《조선신보》로 이어진 동포언론의 궤적
2025년 10월 10일 11:00 총련재일조선인운동사와 더불어 걸어론 80년
조국해방의 환희가 여전히 이어지고있던 1945년 10월 10일 도꾜에서 발행이 시작된 《민중신문》이 바로 《조선신보》의 전신이다.
총련의 결성과 신문의 역할
1946년 8월 15일 《민중신문》을 당시 오사까에서 발간되고있던 《대중신문》과 통합하여 제호를 《우리 신문》으로 바꾸었다. 《우리 신문》으로 발간된것은 2호만이였으며 그해 9월 1일호부터 제호를 《해방신문》으로 바꾸었다.
당시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일본에서 조선글의 활자를 구할수도 없었고 조선말과 글을 잘쓰는 경험있는 기자들도 없었다. 그러나 창간당시부터 이어진 활자난, 인재난, 자금난의 2중, 3중의 애로와 난관을 이겨내면서 기자들은 재일동포들의 대변자로서 애족애국의 필봉을 추켜들고 언론활동을 벌렸다.
조선반도에서 전쟁의 먹구름이 짙어지는 속에서 미강점군사령부(GHQ)는 일본반동들을 내몰아 1949년 10월 재일본조선인련맹(조련)해산과 조선학교페쇄를 강행하였다. 그리고 조선전쟁발발부터 37일만인 1950년 8월 2일 《해방신문》을 강제정간시켰다.
신문복간을 위한 투쟁과정은 당시에 그릇되게 나가고있었던 재일조선인운동을 바로잡기 위한 투쟁과정이기도 하였다. 조련해산후 1951년에 결성된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의 사대주의, 민족허무주의자들은 일본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재일조선인운동을 종속시키는 로선을 추구하고 동포들을 좌경모험주의의 길로 끌고가면서 신문의 복간마저 방해하였다.

조국소식, 동포소식을 전하는 신문이 애족애국운동을 크게 고무추동하였다.
당시 애국적활동가들과 재일동포들은 한덕수동지가 무은 《〈해방신문〉복간 준비위원회》의 지도밑에 신문복간을 위한 투쟁을 완강히 벌렸으며 그 결과1952년 5월 20일에 신문이 복간발행되게 되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인 1952년 12월 2일, 전쟁의 중하를 한몸에 지니신 김일성주석님께서 일본에서 온 재일조선인련락원을 최고사령부 작전실에서 만나주시고 재일동포들은 일본땅에 살고있지만 일본혁명을 위하여 싸울것이 아니라 조선혁명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는 주체적로선전환방침을 제시하시였다.
애국적활동가들은 주석님께서 제시하신 로선전환방침을 받들고 좌경모험주의를 범한 민전의 로선상오유를 비판하면서 새 조직건설을 준비해나갔으며 기자들 또한 자신에게 부과된 시대적사명을 다해나갔다. 《해방신문》은 주체적인 재일조선인운동의 방향에 대하여 일관하게 론진을 폈다. 민전 제19차 중앙위원회(1955년 3월11-12일)에서 로선전환방침에 기초하여 작성된 연설 《재일조선인운동의 전환에 대하여》를 신문에 전문 싣고 광범히 보급함으로써 동포들을 로선전환을 위한 투쟁에로 힘차게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민전이 해산되고 1955년 5월 25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총련)이 결성되였다. 총련의 결성을 계기로 《해방신문》은 총련중앙상임위원회 기관지로서 김일성주석님의 사상을 재일조선인운동에 구현해나가는데서 더 큰 역할을 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