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학동 80년의 궤적③1970년대〉연극창작, 상연활동 활발, 《재일스파이단사건》을 계기로
2025년 08월 02일 14:25 단체・사업체재일본조선류학생동맹(이하 류학동)은 올해 9월에 결성 80돐을 맞이한다. 류학동은 일본의 대학과 전문학교에 다니는 재일조선인학생들을 위한 단체로서 그 원류는 일제식민지시기에 일본으로 류학하여 일본땅에서 조선독립을 웨치며 투쟁한 조선류학생들의 활동에 있다. 총련의 산하단체들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력사를 가진 류학동은 이 조선류학생들의 뜻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관하게 조국과 민족, 동포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재일동포들과 조선류학생들의 민주주의적민족권리옹호를 위하여 활동해왔다. 80년의 력사를 되돌아보는 이번 련재의 집필은 류학동중앙이 맡는다.(월1번 게재)
1970년대 류학동은 신입생환영모임, 우리 말학습회, 하기강습회, 대학에서의 강연회 등 대학생답게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70년 10월에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가 열린것을 기념하여 6개 대학에서 조선의 력사, 문화, 정치, 경제 등을 소개하는 사진전시회를 개최하고 6,000여명의 일본학생들에게 이웃 나라인 조선을 널리 알려나갔다.
한편 60년대에 이어 박정희에 의해 날로 강화되는 파쇼독재체제에 반대하고 민주화실현, 국가보안법철페를 요구하며 투쟁하는 한국의 청년학생들을 지지하는 강연회, 시위투쟁 등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 동맹원들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 발생했다. 소위 《재일스파이단사건》이다.
1970년대, 박정희는 《북의 위협》을 부추기며 민중에 대한 야수적인 탄압을 정당화해나갔다. 이러한 군사독재정권하에서 한국으로 류학한 많은 재일조선인학생들이 《북조선》의 간첩혐의로 투옥되고 고문을 받으며 사형판결을 받게 되였다.
같은 세대의 재일조선인학생들이 군사독재정권의 피해자가 되여 고문을 당하고있다는 사실은 동맹원들을 더욱 거세찬 반파쇼운동으로 몰아넣았다.
류학동은 이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연극공연을 통한 여론환기운동을 시작했다.
1976년 12월 7일, 류학동간또에 의해 창작극 《침묵》이 처음으로 상연되였다. 《재일스파이단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이다.

1976년 상연된 창작극 《침묵》의 한 장면
일본학교를 다니던 주인공 영철과 그의 친구 충남은 일본어린이들로부터 조선인이라는 리유로 조롱을 당한 경험을 가지고있다. 대학생이 되자 영철은 농업을 배우기 위해 한국으로 류학할 결심을 하게 되지만 충남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돈을 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류학초기 한국의 학생운동에 부정적이였던 영철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민중의 참상과 그러한 현실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민중을 탄압하는 박정희정권을 고발하기 위해 항의의 죽음을 선택한 동급생 성길의 삶을 보고 생각을 바꾸게 된다. 영철은 성길의 장례식중에 당국에 의해 체포되고 간첩으로 몰리게 된다.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으며 영철은 자신의 민족의식을 고양시켜간다. 사형판결을 받아도 영철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나는 똑똑히 깨달았습니다. 과연 누가 재일교포들에게 온갖 불행을 들씌우고있으며 나아가선 온 민족에게 분렬의 아픔을 겪게 하고있는가를! 비록 우리는 이역땅에서 나서자라도 적극적인 민족의식을 똑똑히 확립하고 온 겨레와 한덩어리가 되여 민족적비극의 원흉과 싸워야 한다는것을. 오직 그것만이 현시대에 사는 우리들의 필연적인 길입니다!》

1976년 상연된 창작극 《침묵》의 한 장면
재판을 지켜보던 충남은 사형판결을 받아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 친구의 모습에 참을수 없어 웨친다.
《그렇게 너는 죽임을 당할거다!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겠느냐!》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야 처음으로 진정한 내 자신의 삶을 살고있어!》
《자신의 삶이라니!》
《그래, 제발 정신을 차려라! 충남이!》
영철구원운동속에서 충남도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며 귀화신청을 취소하고 우리 말을 배우기 시작한다.
창작극 《침묵》은 간또만이 아니라 일본전역에서 거듭 상연되였다. 류학동맹원들에게 있어서 영철과 충남은 바로 자기자신들이였다.
【류학동중앙】
류학동과 연극
류학동은 《침묵》상연 이후에도 많은 창작극을 상연해왔다. 80년대에는 부산미국문화쎈터방화사건을 소재로 한 《응징》을 상연하는 등 당대의 사변, 사건들에 대하여 재일조선인학생들이 어떻게 호응할것인지를 펼쳐보였다.
이러한 연극문화는 현재까지 계승되고있다. 중앙, 블로크, 지방단위에서 수많은 연극이 창작되고 상연되여왔다. 출연자들은 때로는 자신과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인물이나 자신이 모르는 시대에 살았던 인물을 형상하기 위해 갈등과 학습을 거듭하면서 참된 삶에 대하여 생각을 깊여나갔다. 류학동과 연극활동은 끊을래야 끊을수 없는 관계에 있다.
류학동은 결성 80돐을 기념하여 래년 2월 28일에 연극을 포함한 종합문화공연을 오사까에서 개최하게 된다. 간사이지역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실행위원회를 조직하고 현재 공연준비를 다그치고있다.

현재도 연극활동이 활발하다.(사진은 2022년 종합문화공연)
년표
1970.5 | 《조일청년학생들의 친선을 위한 조선영화특별감상회》 개최(도꾜, 나고야, 오사까) |
1973.5.18 | 《출입국관리법》에 반대하는 재일각국류학생들의 모임 개최, 37개국 332명의 련명으로 공동성명발표 |
1975.12.26 | 박정희정권이 《스파이단사건》을 날조한 모략행위를 규탄하는 재일본청년학생대회 개최 |
1979.5~6 | 류학동교또, 오사까, 효고가 《일본의 대학에서 배우는 재일동포조선인학생 앙케트조사》를 실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