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니화를 재생시켜 형상리론을 확립한 화가
2025년 08월 19일 05:58 공화국인민예술가 황병호씨, 첫 작품은 《백두산의 학》
인민예술가인 황병호씨는 금니화화가로 이름난 인물이다.
금니화는 순금박막(금 100%)을 화면전반에 붙이고 황금색을 살리면서 카드미움접착안료로 다양하게 형상하는 새롭고 독특한 회화형식이다. 광선에 따라 특이한 화면효과를 나타내며 종이, 천, 금속, 콩크리트벽체에 이르기까지 영구보존할수 있는 재질에 마음대로 창작할수 있는 우월성을 가지고있다.
그러한 금니화가 일제의 식민지통치시기 민족문화말살책동으로 하여 사라져버렸다.

금니화화가로 이름난 황병호씨
황병호씨는 처음부터 금니화화가가 된것은 아니다.
1968년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하면서 황병호씨는 조선화 《기통수》를 창작하여 내놓았다.
조국해방전쟁시기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하여 끊어진 다리우로 말을 타고 용감무쌍하게 내달리는 인민군기통수를 생동하게 형상한 작품은 조선화의 기본인 몰골법과 선묘법, 우림법을 잘 배합한것으로 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후 제11차 국가미술전람회에서 상을 받고 국가소장품으로 등록되였다.
그때부터 조선화화가로서의 황병호씨의 생이 시작되였다.
황병호씨는 나라의 이름있는 미술창작기지인 만수대창작사에서 창작가로 활동하면서 《백두산의 아침》, 《박연폭포》, 《구름우의 금강산》 등 국보적가치가 있는 조선화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그 과정에 그는 개성이 뚜렷하고 독특하면서도 생동하고 진실한 묘사력을 소유한 화가로 이름날리게 되였다.
1980년대중엽 어느날 조선미술박물관을 참관할 때 조선봉건왕조(1392년-1910년)시기의 화가 리징이 그린 금니화 《공작》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크지 않은 자그마한 그림이 5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퇴색되지 않고 은근한 빛을 발산하며 내뿜는 모습은 그로 하여금 금니화의 세계에 빠져들게 하였다. 박물관강사의 말에 의하면 박물관을 참관하는 사람들이 꼭 한참이나 지켜서서 보고가는 그림인데 현재까지 조선에서 이런 회화형식이 출현하지 않고있다는것이다.
그는 일제의 식민지통치시기 민족문화말살책동으로 하여 사라져버렸던 금니화를 자기가 꼭 개척하리라 마음먹고 재료연구와 학술연구에 달라붙었다. 10여년간의 고심어린 탐구끝에 그는 자취를 감추었던 금니화를 발굴하였으며 그 전통적기법들을 시대적미감에 맞게 발전완성시켜 세상에 내놓았다. 그 첫 작품이 금니화 《백두산의 학》(1998년 창작, 2 500×1 000㎜)이다.
국가적인 미술전람회는 물론 일본, 중국, 도이췰란드, 이딸리아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진행된 미술전람회들에서 그의 금니화작품들은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세계미술계에서는 금니화가 오직 조선에만 있는 작품, 독특하고 새로운 회화형식, 영원히 변치 않는 그림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금니화형상리론을 내놓은 황병호씨에게 예술학박사칭호를 수여하였다.
2014년에 황병호, 원영선 2인미술전람회가 진행되였는데 그때 황병호씨가 출품한 《소백수의 아침》, 《달밤의 기러기》, 《밀림의 호랑이》, 《룡과 선녀》, 《현무》 등 60점의 금니화가 참관자들의 깊은 감동을 자아냈다.
올해 4월에 진행된 김일성주석님 탄생 113돐경축 로화가들의 미술전람회에 그는 금니화 《만경봉의 소나무와 학》과 《2월의 소백수》를 출품하였다.
그가 지금까지 창작한 조선화와 금니화작품은 모두 1,000여건에 달한다. 그중 수십점이 국보작품으로 등록되였다.
황병호씨는 오늘도 로당익장하며 작품창작에 열정을 바쳐가고있다.
(조선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