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학동 80년의 궤적①1945-1955〉조국해방직후에 결성된 조학동
2025년 06월 13일 16:20 단체・사업체재일본조선류학생동맹(이하 류학동)은 올해 9월에 결성 80돐을 맞이한다. 류학동은 일본의 대학과 전문학교에 다니는 재일조선인학생들을 위한 단체로서 그 원류는 일제식민지시기에 일본으로 류학하여 일본땅에서 조선독립을 웨치며 투쟁한 조선류학생들의 활동에 있다. 총련의 산하단체들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력사를 가진 류학동은 이 조선류학생들의 뜻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관하게 조국과 민족, 동포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재일동포들과 조선류학생들의 민주주의적민족권리옹호를 위하여 활동해왔다. 80년의 력사를 되돌아보는 이번 련재의 집필은 류학동중앙이 맡는다.(월1번 게재)
광범하고 일본전국적인 동포학생조직의 활동

1945년 9월 23일, 교또 만수사에서 《교또조선인류학생회》가 결성되였다.

조학동 간사이본부 성원들(1945년 만수사)
류학동의 전신인 재일본조선학생동맹(이하 조학동)은 조국해방직후인 9월 14일, 도꾜에서 진행된 《긴급조선인학생대회》를 계기로 결성되였다.
한편 같은해 9월 23일, 교또의 만수사(萬寿寺)에서 《교또조선인류학생회》(후에 조학동 간사이본부로 됨)가 결성되였다. 조학동은 이를 포괄하는 등 보다 광범하고 일본전국적인 동포학생조직의 면모를 갖추고 활동하였다.
조학동결성당시의 중앙본부는 도꾜도 신쥬꾸구(新宿区)에 위치한 조선장학회의 건물에 있었다. 그후 간또, 도호꾸, 간사이에 지방본부들이 설치되였으며 쥬시고꾸, 규슈에로 확대되였다.
교또에서 조학동활동에 헌신한 고 백종원씨는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고하였다.
《해방직후 류학생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당시 류학생들은 (고향에 있는) 가족의 송금으로 생활하고있었고 일본에 의지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전쟁말기에 가족과의 련락이 끊어졌습니다. 겨울이 와도 입을 옷이 없고 이불도 없었습니다. 먹을것도 돈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해결할수 없는 문제였기에 우리는 조직을 꾸릴것을 서둘렀습니다.》(《류학동결성 70돐기념지〜70년의 력사를 새기며〜》에서)
당시 GHQ와 일본정부는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류학생을 비롯한 재일외국인들에게는 식량 등 특별배급을 실시하고있었지만 재일조선인들은 여기에서도 제외되였다. 조학동은 각지에서 지방행정기관들에 호소하여 이불과 통졸임의 배급이 이루어지도록 교섭하였으며 이것을 많은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조학동 중앙본부 건물앞에서(1948년 7월 11일)
조학동은 1947년 5월에 진행된 제3차총회에서 일제의 노예적교육의 잔재를 쓸어버리고 민주주의적교육을 실현할것, 과학적학문과 기술을 단련하여 민주조국건설에 이바지할것 등을 새로 내걸고 재일본조선인련맹(조련)과의 련계를 깊여나갔다. 이후 조학동은 재일동포들의 생활권쟁취운동, 고향귀환실현운동, 국어강습소활동 등을 적극 벌려나갔으나 시련도 많았다. 남조선단독선거의 강행과 48년 4.24교육투쟁, 같은해 10월의 조학동국기게양사건도 그렇거니와 특히 《조학동5.8사건》은 그 대표적사례일것이다. 조학동내부에서 좌우대립이 격화되는 속에서 49년 5월 8일에 조직된 제5차총회를 우파학생들이 방해하였다. 이날 우파학생 150여명이 조학동 중앙본부를 습격하였다. 좌파학생 3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장학회건물의 사용이 금지되였다.
49년 9월 조련이 강제해산될 때 조학동은 해산을 면하고 그후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산하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조선학생신문》의 복간, 조학동 제1차 전국대회개최 등을 통해 동포학생들의 생활권옹호, 학문연구, 지부확대 등의 사업들을 벌려나갔다.

1955년 조학동으로부터 류학동에로의 개편을 알리는 기관지
55년 5월 25일, 김일성주석의 로선전환방침에 따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총련)가 결성된 후 조학동은 그해 6월 18일, 제4차 림시전국대회를 열고 총련의 산하단체로 가입할것을 결정하고 류학동으로 조직개편을 실시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년표
1945.9.14 | 재일본조선학생동맹(조학동) 결성(도꾜) |
1945.9.23 | 교또조선인류학생회(조학동 간사이본부의 전신)결성(교또 만수사) |
1948.10.11 | 《조학동국기게양사건》. 조학동주최로 진행된 공화국창건경축 대운동회에서 공화국기게양을 리유로 두명이 체포되여 군사재판을 통해 중로동 3년의 실형판결 |
1949.5.8 | 《조학동5.8사건》 |
1950.5.21 | 《조학동法大사건》. 조학동 간또지방본부 제6차총회(法政大学)를 우파학생들과 폭력단이 습격, 조학동맹원 1명이 사망 |
1951.8.14 | 기관지《조선학생신문》이 발간금지로(52년 9월 8일에 복간) |
1953.12.25〜27 | 조학동 제1차 전국대회(京都市堀川朝鮮人小学校). 재일조선학생의 생활과 학문연구, 반조직확대강화에 관한 문제들을 토의 |
1954.4.18 | 조학동《사회과학연구소》를 설치 |
1955.6.18 | 조학동 제4차 림시전국대회(明治大学강당)에서 조학동을 재일본조선류학생동맹(류학동)으로 개편하고 총련산하에 들어감 |
(조선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