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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과거죄행 추궁할 결의 굳혀/조대생들이 히따찌광산에서 야외학습

2025년 06월 11일 09:20 력사

히따지광산의 갱도규모에 대한 설명을 듣는 참가자들

조선대학교의 강제련행진상규명소조가 주최하는 《히따찌광산 야외학습》이 8일 이바라기현내에서 진행되였다. 여기에 5개 학부에서 22명이 참가하였다.

이바라기현 북부에 위치하는 히따찌광산은 일제식민지시기 약4000명의 동포가 강제련행되여 노예로동을 강요당한 곳이다.

茨城県朝鮮人慰霊塔 관리위원회 장영조사무국장(79살)이 일행을 안내하였다.

일행은 먼저 히따찌광산을 운영한 日本鉱業의 력사자료가 전시된 日鉱記念館을 돌아보았다. 장영조사무국장은 《이곳은 광산을 운영한 기업의 력사를 전하는 기념관인데 조선인강제련행, 강제로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고 강조하였다.

실상을 전하는 장영조사무국장(사진 오른쪽)

그후 장영조사무국장이 학생들에게 히따찌광산에서의 강제로동의 실상을 설명하였다.

그는 당시의 사진자료를 보여주면서 《안전대책이 없는 지하막장은 위험하고 무더운 장소였다. 락반에 인한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로동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는 동포들이 많았다. 어느 증언에 의하면 약 700명이 도망쳤다고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김안나학생(리공학부 3학년)은 《기념관에는 일본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기여했다는 찬사만이 있는데 그 력사에는 조선인강제련행과 희생이라는 사실이 숨겨져있다는것을 다시 확인하여 분한 마음을 억누를수 없다.》고 이야기하였다.

학생들은 당시 동포들이 탈출의 표식으로 한 삼나무와 고향을 그리며 심었다고 전해지는 무궁화, 희생자들의 유골이 안치되던 本山寺를 찾았다. 本山寺에 린접한 광산희생자의 화장터에서는 묵상을 올렸다.

다음으로 일행은 日立平和台霊園에 있는 茨城県朝鮮人慰霊塔을 찾았다.

채굴에 리용된 갱도

희생된 동포들이 원한을 안고 재가 된 화장터

茨城県朝鮮人慰霊塔을 찾았다.

慰霊塔은1979년에 세워졌으며 납골당에는 本山寺에 있었던 조선인유골 54주가 안치되여있다.

학생들은 망국의 설음을 겪은 선대들을 추모하여 소향을 하고 향피리의 연주에 맞추어 《아리랑》을 합창하였다.

장영조사무국장은 《당시 동포들은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아리랑〉의 노래를 불렀을것이다. 그 노래를 학생들이 불러주니 원한을 안고 희생된 동포들도 기뻐할것이다.》며 《조국이 해방된지 80년이 지나도 식민지지배의 연장인 차별이 계속되고있다. 그 과제를 풀기 위해 더잘 배워달라.》고 말하였다.

히따찌광산에 끌려온 약 4000명의 동포들의 약 절반은 해방직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본에 머문 동포들은 이바라기현내 동포들과 함께 민족교육의 력사를 써나갔다.

일행은 이날 오후에 이바라기초중고 력사자료실《뜻》을 찾아 그들이 새긴 자욱을 배웠다.

이바라기초중고 력사자료실에서 선대가 남긴 자욱을 학습하였다.

소조책임자인 리지호학생(교육학부 4학년)은 《강제련행의 현장에 이어 력사자료실을 찾으니 선대들이 갈망한 조선사람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귀한것인가를 실감하였고 후대들에게 선대들의 력사를 배워주는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날 학생들에 동행한 조선문제연구쎈터 김철수소장은 《이번 야외학습은 선대들의 쓰라린 력사를 새세대가 똑똑히 기억하고 일본의 과거죄행을 끝까지 추궁해나갈 각오와 결의를 가다듬는 계기가 되였을것이다.》고 이야기하였다.

(고성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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