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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련결성 70돐/ 자랑찬 력사를 더듬어⑤〉평양축전, 합영사업과 《전국대회》에서의 활약

2025년 05월 07일 13:00 총련 기고

오는 5월 25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략칭 총련)의 결성 70돐을 맞이하게 된다.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은 김일성대원수님과 김정일대원수님, 김정은원수님의 천재적예지와 현명한 령도에 의해 결성되고 강화발전되여온 총련의 70년의 로정을 감회깊이 돌이켜보며 은혜로운 사랑과 배려에 감사드리고 총련사업을 보다 높은 단계로 올려세워나갈 열의에 충만되여있다. 총련결성 70돐에 즈음한 이 련재글에서는 총련의 결성과 그 이후의 기간을 10년씩으로 나누어 그 기간의 특징적활동과 사변, 사건중의 몇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8번에 걸쳐 서술한다. 집필은 재일조선인력사연구소 오규상소장이 담당한다.(매주 한번 게재)

1985-1994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1989.7)의 성공에 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 청년학생들이 크게 기여하였다.

세계청년학생축전이라 하면 특히 70대후반 동포들은 1965년 알제리에서 예정했다가 중단된 축전도 있을것이며 재일동포들이 제3국에로의 려행의 권리를 획득한 다음해인 1973년에 재일조선청년학생대표단 30명이 공화국의 대표들과 함께 베를린에서 진행된 제10차 축전에 참가했던 기억이 있을것이다.

그러나 1989년 7월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처럼 규모로 보나 그 질적내용으로 보나 그처럼 성대하게 진행된 축전은 보지 못했을것이며 주최국의 한 성원된 립장에서 직접 평양에 간 일군들과 동포, 청년학생들, 일본에서 각종 준비사업에 종사한 일군들과 동포, 청년학생들이 그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들끓었던 때는 전무후무할것이다.

축전문제가 제기된 당초부터 우리 민족사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세계적축전이라는것으로 하여 총련과 재일동포들은 대내외적인 소개선전사업과 지원사업을 전 동포적으로 벌렸고 축전성공에 힘과 지혜를 다 바쳤다.

축전에는 총련의장일행과 재일조선청년학생대표단, 대외봉사단, 기자단, 참관단으로 3,043명이 참가하였다. 참가인원수만 하여도 놀라운 수이다. 축전의 주인공들인 청년학생들이 맡은바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한것은 명확한데 상업봉사매대활동을 맡은 청년상공인들은 시간도 돈도 재능도 다 바쳤다고 말할수 있을것이고 야외식료매대활동을 맡은 녀성들은 자녀들의 일상생활을 비롯한 집안일을 며칠씩이나 내맡긴채 희생적으로 사업한것은 특기할 일이였다. 《조국을 위해 복무》했다는 자부심이 참가자들의 일치된 감정이였을것이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축전에 참가한 총련중앙 의장일행, 청년학생대표단과 상공인들, 봉사사업에 참가한 청년상공인들과 조선대학교 학생들, 동포녀성들을 접견하시고 기념사진을 찍어주시는 영광을 베풀어주시였다.

호평을 받은 총련의 봉사대

주석님의 접견(1973.5.26)을 받고 《애국적상공인》, 《진보적상공인》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아안은 동포상공인들은 지난 시기도 조국건설에 여러 형태로 기여해왔으나 더 잘 기여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고있었다. 이러한 때인 1984년 9월 8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합영법》이 시행(그 이후 련달아 법의 수정보충, 세칙이 나옴)되였다.

주석님께서는 1986년 2월 28일에 상공련합회결성 40돐 재일조선상공인감사단을 접견해주신 석상에서 상공인들이 조국과 합영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를 위한 방도도 밝혀주시였다.

총련과 동포상공인들은 조국과의 합영사업을 위하여 1986년 6월 16일에는 《합영연구회》를 발족시켰으며 그 이후 10월에는 조국측과 《조선국제합영회사》를 창설하고 합영사업을 본격적인 추진단계에 들어서게 하였다.

합영연구회 제2차리사회(1987.4.25)에서는 19개 합영대상과 합의, 계약을 맺었다는것이 보고되고 합영연구회를 총련합영사업추진위원회로 개편하여 사업을 보다 힘있게 밀고나갔다. 자료에 의하면 착수한지 10년이 되는 1996년에 합영회사는 40사, 합작회사와 가공무역회사는 35사까지 확대되였다고 한다.

합영사업은 조국에 선진기술, 현대적설비의 도입과 과학기술발전에 도움을 주었으며 조국의 대외적신용을 높이고 경제무역사업에도 적지 않게 이바지하였다. 동포상공인들도 조국에 의거하여 자기 사업을 발전시킬수 있는 전망을 내다보게 되였으며 방법문제까지 포함하여 합영사업의 경험과 교훈을 축적하게 되였다.

처음으로 참가한 인터하이에서 도꾜조고 권투부 3명이 3위에 입상하고 학교별종합순위 6위의 성적을 남겼다.(1994.8)

《자기의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일본사회에도 통하는 수준인가.》, 《자기 실력을 대비하는 마당이 없는가.》

이러한 소박한 의문은 체육경기를 하는 선수라면 당연히 가지는 생각일것이다. 이것은 우리 학교 체육소조생들의 공통된 생각이였을것이고 학생을 지도하는 교원이나 졸업생들의 소원이기도 하였다. 또 반면에 해결하자고 해도 무리하다는 체념감이 있었던것도 사실일것이다.

이러한 희망이 풀리기 시작한 직접적계기는 1990년 4월에 있었던 오사까부 高等学校体育連盟가 주최한 경기에서 오사까조고 녀자배구부가 1차예선을 통과하였는데 《사무적인 실패》란 리유로 그 이후의 경기에 못나가게 된것이였다.

이후에 조선고교 교장회의 성명(1990.11.28)을 비롯하여 우리 학교측의 요구가 일본사회에도 알려지고 그 이후 《아사히신문》의 1면 코람 《天声人語》(1991.3.4)나 여러 신문보도를 통하여 조고생을 참가시키지 않는데 대하여 의문시하는 여론이 점차 높아가고 日本高等学校野球連盟 간부가 말했듯이 규정이 있다면 그것을 수정하면 되지 않느냐 하는 목소리가 오르게 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94년 8월의 인타하이에 처음으로 참가한 도꾜조고 권투부 학생중 3명이 3위에 입상, 종합 6위의 성적을 올렸다. 그 이후 오사까조고 축구부가 《전국대회》 8강, 투구부가 2년련속 4강, 《전국》선발대회 준우승 등 우수한 성적을 올리게 되였고 중급부 학생도 《전국》대회에 참가할수 있게 되였다.

경기에 참가한 우리 학생들의 름름한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앞이 훤히 트이는가. 지난 시기 없었던 새 력사를 창조한것이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전국》대회에 참가할수 있게 된 요인은 우리 학교와 조직이 응당한 요구를 내걸고 주동적으로 사업한 결과이며 동시에 일본의 광범한 사람들과 여론의 지지를 받았기때문이라고 할수 있다.(재일조선인력사연구소 소장 오규상)

주요년표 1985-1994

1985.8.24∼9.4  제13차 고베유니버시아드 축구경기에서 공화국이 우승, 재일동포선수 2명이 우승에 공헌
1986.9.25 새 조선회관(총련중앙회관) 준공
1987.4.25  합영연구회를 총련합영사업추진위원회로 개칭
1989.7.1∼8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재일동포참가 및 참관
1994.3.8  전국고체련리사회 조선고급학교 등 각종학교의 전국고등학교종합체육대회(인터하이) 참가승인
1994.8.2∼7 조고학생선수, 인터하이 첫 참가, 입상

【해설】이 기간은 일부 사회주의국가의 붕괴, 일본의 바블경제와 그 붕괴 등 총련을 둘러싼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여 새로운 환경에 맞게 총련사업을 강화발전시키기 위하여 활동한 기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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