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련결성 70돐/ 자랑찬 력사를 더듬어⑥〉한신아와지대진재에서 과시된 조직력, 청상회의 결성
2025년 05월 12일 09:15 총련 기고오는 5월 25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략칭 총련)의 결성 70돐을 맞이하게 된다.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은 김일성대원수님과 김정일대원수님, 김정은원수님의 천재적예지와 현명한 령도에 의해 결성되고 강화발전되여온 총련의 70년의 로정을 감회깊이 돌이켜보며 은혜로운 사랑과 배려에 감사드리고 총련사업을 보다 높은 단계로 올려세워나갈 열의에 충만되여있다. 총련결성 70돐에 즈음한 이 련재글에서는 총련의 결성과 그 이후의 기간을 10년씩으로 나누어 그 기간의 특징적활동과 사변, 사건중의 몇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8번에 걸쳐 서술한다. 집필은 재일조선인력사연구소 오규상소장이 담당한다.(매주 한번 게재)
1995-2004년

동포청년들로 무어진 구원대가 신속하고 능숙하게 활동하였다.
총련의 70년간의 로정에서 재일동포들이 조국의 사랑과 조직의 귀중함을 체험한 기회는 부지기수이다. 그중에서도 한신아와지대진재당시의 경험은 각별했을것이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1995년 1월 17일 오전 5시 46분, 효고현 남부지역에 M7.3의 대지진이 발생하였으며 피해지역에 거주한 일본사람과 함께 우리 동포들도 막심한 인적, 물적피해를 입었다. 재일동포만 하여도 125명이 희생되였으며 1,500명의 동포들이 부상을 입었고 1,990호를 넘는 동포가옥들이 소실 또는 붕괴되였으며 4,500여명이 피난생활을 하지 않을수밖에 없었다. 이 지진에 대하여 생생하게 기억하고있는 동포들이 있는 반면에 말이나 영상으로만 듣고 아는 세대가 이제 년령으로 30대에 들어서고있다.
무엇보다도 조국의 고마움을 강렬하게 체험한것은 김정일장군님께서 위문전문과 100만딸라의 위문금을 보내주시여 피해동포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쳐주시고 모든 재일동포들을 크게 고무해주신것이였다.
총련중앙은 지진 당일 《효고현남부지진피해동포구원 총련중앙대책위원회》(후에 한신아와지대진재로 개칭)를 신속히 조직하고 총련조직의 힘으로 피해상황을 제때에 포착해나갔다. 동시에 그날 아침 즉시로 선발대를 파견하는 한편 각급 기관을 총발동하였으며 동포청년들로 무어진 구원대를 당일 밤 현지에 파견하였다. 이튿날 새벽 2시에는 피해동포들의 피난소의 하나였던 히가시고베조선초중급학교(당시)에 지원대 제1진으로 긴급지원물자를 가득 실은 화물자동차와 본고차가 도착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신속하고 능숙하게 활동하였는지 상상이나 되겠는가.
구원대는 구원물자를 가지고 자동차로 갈수 있는 장소까지 가고 자동차가 못가면 단차로, 단차로도 못가면 자전거로, 자전거도 사용할수 없다면 도보로 물자를 싣고 동포들을 찾아 구원활동을 벌리였다. 그 이후는 일본각지에서 구원물자가 련일 련속적으로 피해현지에 도착하여 동포들에게 가닿았다.

일본각지에서 수많은 구원물자가 련일 피해지에 도착하였다.
현지 동포들도 자기 가족을 돌보는것을 뒤로 미루고 피해동포들을 구원하는데 필사적으로 달라붙었으며 서로 돕고 이끄는 상부상조의 미풍이 최고도로 발휘되였다. 일본의 어느 단체나 지원기관도 총련조직의 지원의 속도나 물자량에 관해서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후에 널리 퍼졌다.
피해상황을 회복하고 마음의 상처를 가시는데는 적지 않은 시간을 요하였으나 전 기관적, 전 동포적구원사업을 통하여 총련조직의 잠재력, 동포들의 뉴대와 단결력은 더욱 굳세여졌다.
구원사업을 통하여 일군들과 동포들속에서 자기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보다 두터워졌으며 총련조직과 함께 동포사회를 더욱더 견고하고 동포들자신을 위한 조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를 굳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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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상회가 주최하는 《우리 민족포럼》이 혹가이도에서 처음으로 진행되였다.(1996.6.26)
이제 재일본조선청년상공회(략칭 청상회)결성의 의의나 그 활약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일군이나 동포는 거의 없을것이다. 청상회는 올해 9월에 결성 30돐을 맞이하게 된다.
총련에서 젊은상공인조직을 내올데 대한 문제는 청년들은 대를 이어 혁명을 계속하여야 한다는 김일성주석님의 심오한 사상과 김정일장군님께서 젊은 상공인조직을 내올데 대한 가르치심을 구현함으로써 실현된것이다.
청상회결성까지의 경위를 집약하면 1970년 8월에 가진 재일본조선젊은상공인모임을 출발로 하여 세대교체, 세대변화에 대처할 문제가 구체화되여나갔다.
1974년 4월의 일본법무성통계에 의하면 1세, 조선에서 태여났다는 재일동포구성의 비률은 24.1%였다. 그 이후에 젊은상공인대회 등을 거처 젊은상공인협의회운동이 크게 벌어지고 1980년대 후반으로부터 1990년대초에 들어서서는 통일적인 조직체로서의 활동이 요구되여 새 조직건설을 모색한것이다. 사실 조청을 필맹한 청년들이 꼭 총련분회나 각급 기관, 단체에서 마음놓고 활동하기에는 년령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동시에 협의회형태로서는 통일적으로 활동하기는 어렵고 하나의 사업체계에 따라 활동하여야 그 역할도 커진다는 인식도 점차 협의회 역원들속에서 공유하게 되였다. 즉 조청을 필맹한 대체로 20대후반 또는 30대초로부터 40살정도의 젊은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조직이 요구된것이였다.
그리하여 1995년 9월 6일, 총련과 동포들의 커다란 관심속에서 재일본조선청년상공회 결성대회를 가지고 그 결성을 선포하게 되였다.
청상회는 결성초기에 든 구호 《유족한 동포사회를 위하여》, 《꽃봉오리들의 찬란한 미래를 위하여》를 변함없이 들고 계속 활동하고있다.
청상회는 역원들의 역할을 높이고 많은 회원들을 망라하는 등 자기 조직의 체모를 갖추어나가는데 선차적힘을 돌리면서 민족교육사업을 다방면적으로 지원하고 회원들의 경제생활방조사업도 벌리면서 동포사회발전에 기여하고있다. 특히 청상회가 현단위의 실행위원회를 뭇고 해마다 개최하고있는 《민족포럼》은 청상회의 조직만이 아니라 전 기관적, 전 동포적관심속에서 진행되는 일대 동포행사로 전변되고있으며 동포들의 단결력을 과시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는 민족문화축전으로 되고있다. 청상회의 존재와 활동은 총련과 동포사회의 대를 이어나가는 귀중한 보물이며 재산으로 될것이다. (재일조선인력사연구소 소장 오규상)
주요년표 1995-2004
1995.1.19 | 장군님께서 효고지진피해지역동포들에게 위문전문을 보내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중앙모임 진행 |
1995.1.19 | 총련중앙상임위원회 지진피해동포들을 구원하는 일대 대중적운동에 한결같이 떨쳐나서자고 《전체 70만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 발표 |
1995.1.20 | 장군님께서 효고지진피해동포들에게 보내주신 위문전문을 전달하는 효고동포들의 모임 |
1995.1.27 | 한신아와지대진재 피해동포들에게 위문금을 보내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재일본조선인중앙대회 진행 |
1995.9.6 | 재일본조선청년상공회(청상회) 결성대회 |
1996.6.15 | 동포대중정보잡지 《이어》창간 |
1996.6.26 | 《우리 민족포럼 1996 in 혹가이도》처음으로 진행, 이후 거의 해마다 진행 |
【해설】이 기간은 효고지진피해에 대한 장군님의 동포애적시책에 고무되여 총련이 조국을 대신하는 어머니품, 동포조직으로서의 잠재력과 저력을 발휘하였으며 새로운 동포조직을 내오고 그 생활력이 점차적으로 과시된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