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예동과 더불어 반세기/허옥녀
2025년 01월 06일 12:53 동포생활세월이란 정녕 흐르는 물과 같이 빨리도 흐르는구나… 이것이 나의 숨김없는 오늘의 심정이다.
문예동결성 65돐을 축하하여 지난해 12월 14일 이곳 오사까에서 문예발표모임 《한마음》이 진행되여 나는 여기서 두편의 시를 읊었다.
하나는 올해 조선대학을 졸업하여 모교의 교단에 서게 된 큰손녀를 노래한 자작시 《이런날이 올줄이야…》, 다른 하나는 김상오의 시 《소원》을 연극구연부 맹원들과 함께 합창시로 읊었다.
랑송을 하기 시작하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나왔다. 아마 동포들은 내가 어째서 울먹거리는지 알지 못하였을것이다. 손녀의 성장과정을 노래하면서 나는 자신이 걸어온 한평생을 순간적으로 돌이켜보았는지 모른다.
내가 문예동에 가맹한것은 57년전인 1967년이였다. 문예동이 어떤 조직인지 잘 몰랐지만 고급부를 졸업하여 오사까조선가무단에 배치된 나는 자동적으로 문예동 맹원이 된것 같다. 그때 내 나이 18이였으니 실로 반세기가 넘도록 문예동조직과 함께 걸어온셈이다.
초급부시절로부터 무용부에 속하여 우리 노래, 우리 춤을 무척 좋아하던 나였지만 공화국창건 스무돐에 즈음하여 다섯개 철근교사건설운동에 떨쳐나선 동포생활현장을 돌아보면서 우리 말, 우리 글을 더 익혀 직접 동포들에게 호소하는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글재주가 특별히 있는것도 아니였지만 요구에 따라 공연대본을 만들고 스무살이 되던 해 난생처음으로 시도 짓게 되였다. 가슴을 뜨겁게 하는 동포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에게 펜을 쥐게 한것이리라.
5년 반의 가무단생활, 가정을 가진 후 배치된 녀성동맹조직에서의 2년남짓한 생활, 문예활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고마운 배치로 1981년까지 계속된 문예동지부에서의 전임활동, 막내아들이 불치의 병에 걸려 조직을 떠날수밖에 없었던 1년간, 그래도 자기가 할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성인학교 강사의 임무를 맡아 동포들과 함께 지낸 벅찬 나날…
1982년 꿈과 같이 중급부 글짓기강사의 임무를 맡게 되고 중급학교에서 30년남짓한 기간 국어교원으로 활동하면서도 빠짐없이 문예동문학부모임에 참가하여 창작발표활동을 계속한 나날…
1998년부터는 교원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문예동 오사까지부의 위원장의 중책을 맡아 일하였고 같은 해에 재능있는 연극인을 만나 문예동지부에 연극구연부를 새로 무어 활동의 폭을 넓혔다.
2010년 3월에 정년퇴직의 날을 맞이할 때까지 교원생활과 문예동활동의 량립이 계속되였지만 나는 힘든줄을 몰랐고 오히려 그 나날들이 있어 몇번이나 닥쳐온 인생의 시련과 고비를 넘어올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2010년 4월부터 비전임생활이 시작되였지만 스스로 초급학교를 찾아가 방과후학동지도원으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일본정부의 탄압과 차별을 반대하여 오사까부 부청앞에서 시작된 《화요일행동》에 매주 참가하여 그 모습을 현장에서 페이스북으로 알리고 선량한 일본사람들과 힘합쳐 블로그를 통하여 12년동안 우리 학교를 지키자고 호소해왔다.
혼자서는 결코 넘어올수 없었던 산과 강들, 만약 문예동조직이 없었더라면, 우리 동포사회가 없었더라면 나의 오늘의 보람을 어찌 생각할수 있었으랴.
아침저녁으로 뛰여다니느라 가정일을 꼼꼼히 못하였지만 고맙게도 우리 아이들은 시부모님과 남편의 도움으로 오늘은 우리 학교 교원으로, 민족학급 강사로, 음악가로 자라 부지런히 활동하고있다.
문예동결성 65돐을 기념한 공연마지막에 1958년에 김상오시인이 지은 시 《소원》을 읊으면서 나는 다시한번 생각하였다. 한평생 우리가 바라던것이 무엇이였고, 무엇을 위하여 문예동활동을 벌려왔는가고…
이역살이도 80년이 가까와지니 허무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단념했을 때가 끝이라는것을 뼈저리게 느껴온 나는 계속 발버둥치자고 생각하고있다.
날이 갈수록 불어나는 하얀 머리도 주름도 인생의 훈장이라 여기고 젊은이들과 함께 문예동조직에서 인생의 끝까지 시를 짓고 우리 말 구연을 즐기면서 살아가자고 마음 먹고있다.
(문예동오사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