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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들의 발걸음을 더듬다-4

2024년 10월 18일 09:00 주요뉴스

이역땅 일본에 건너온 1세동포들은 일제식민지시기는 물론 해방후 온갖 고생속에서도 조국을 위해, 조직을 위해, 동포들을 위해 꿋꿋이 살아왔다. 재일조선인 1세들의 목소리를 소개한다.

온갖 차별을 이겨 되찾은 긍지

전재홍씨/효고

전재홍씨

총련효고 가잉(加印)지부와 가꼬가와(加古川)상공회의 고문인 전재홍씨(92살)는 경상남도 통영군(당시)에서 태여나 5살때, 일본으로 먼저 건너간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배와 전차를 타고 효고현 다까사고쬬(高砂町)(당시)에서 살게 되였다. 바다와 린접한 다까사고에서는 일본륙군의 공장부지조성을 위하여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동원되고있었다.

고문에 의하면 일본의 패전당시 조선사람들이 모여사는 동네에는4~5천명이 살고있었다고 한다.

한편 8살나이에 이곳 일본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나는 조선이름으로 다녔는데 동창생들로부터는 〈오뎅〉이라는 별명으로 놀림을 받았다. 력사수업시간이면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죠센세이바쯔(조선토벌)〉라고 배웠다. 그때 교실안에 있는 일본학생들이 나를 흘깃흘깃 보니까 다투었는데 다시 〈죠센, 죠센〉이라고 조롱하였다. 교원들은 싸움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면서 〈이자는 나쁜 놈이다.〉고 교실밖으로 내쫓았다.》

당시 차별을 당하는것은 일상이였다고 한다. 교실에서 비품이 없어질 때면 그들에게 추궁의 화살이 날아갔다.

《그외에도 설명절에 집에서 제사가 있어 지각하면 조선인학생들은 모두 욕을 먹었다. 지역별로 소방훈련이 있었는데 우리 집 지붕을 향해 물을 뿌렸다. 조선사람이니까 문제없다는 생각이지요. 솔직히 소학교시절은 좋은 추억이 별로 없다.》

조국해방후 고문이 사는 다까사고지역에서도 동포들은 조련조직을 뭇기 위해 활동하였다. 조련회관은 우리 말을 가르치는 거점이 되였으며 고문 또한 그곳을 거쳐 효고조선청년학원을 다니게 되였다.

《나는 학원 5기생이였는데 거기서는 40대까지 폭넓은 동포청년들이 배우고있었다. 학원에서 처음으로 일본제국주의가 어떻게 발생하고 어째서 조선이 식민지가 되였는가 에 대하여 알고 정치나 력사에 대하여 인식을 깊이게 되였다.》(전재홍고문)

조선사람으로서 각성된 그는 그후 철학을 공부하고 조직일군으로서 사업하였으며 결혼을 계기로 경영활동에 달라붙었다.

경영활동이 안착되면서 그는 총련지부위원장(비전임), 다까사고초급(당시) 교육회 회장, 지역상공회 회장을 력임하였다. 그 활동의 원동력이 된것은 《조선사람으로서의 긍지》였다고 하는 고문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조선사람으로 태여나서 좋았다는 마음, 조선사람답게 살아나가야 한다는 마음을 간직하고 인생길을 걸어왔다. 현재 동포동네의 과소화가 촉진되고있는데 그럴수록 우리 조직이 민족적뿌리를 함께 하는 폭넓은 동포들을 하나로 묶어세워야 한다.》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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