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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님께서 친히 이름지어주신 김귀국동로인의 생활

2024년 09월 23일 06:10 공화국

어머니조국의 품속에서 보람찬 60여년

함흥시 성천강구역 상신흥동 116인민반에는 수십년전 김일성주석님께서 친히 이름지어주신 김귀국동로인이 살고있다. 첫 고고성을 울린 때로부터 머리에 흰서리가 내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인생은  어머니조국의 품이 사람들에게 참된 존엄과 보람차고 행복한 삶을 안겨주고 빛내여주는 은혜로운 사랑의 품이라는것을 말해주고있다.

군중들의 열광적인 환송을 받으며 귀국선이 니이가따항을 출항하였다.

1959년 12월 일본의 니이가다항을 떠난 한척의 배가 청진항으로 향하였다.

두번째 귀국선이였다. 오매에도 그립던 조국으로 향하는 귀국동포들에게 기쁨을 더해주는 또 하나의 희소식이 전해졌다. 한 녀성이 귀국하는 도중에 떡돌같은 아들을 낳았던것이다.

산모와 아기는 의료일군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조국에 도착한 다음 그들은 또다시 평양의 어느한 병원으로 후송되였다.

그때로부터 며칠후 김일성주석님께서는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2차로 귀국한 동포들을 몸가까이 불러주시였다. 그들에게 항행시간이 얼마나 걸렸는가, 이번에 몇사람이나 왔는가, 앓는 사람은 없었는가를 하나하나 물으시던 주석님께서는 한 녀성이 귀국하는 도중에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시였다.

순간 주석님께서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고 그러니 오는 도중에 귀국동포 한사람이 더 늘어난셈이라고, 우리 나라에 운이 텄다고 하시며 못내 기뻐하시였다. 이윽하여 그이께서는 어린애의 이름을 아직 짓지 않았다는것을 아시고는 여기에서 이름을 짓자고 하시면서 몸소 《귀국동》이라고 지어주시였다.

세상에 태여나서부터 주석님의 축복을 받으며 사회주의조국의 품에서 첫걸음마를 뗀 그는 이름그대로 귀국동, 행복동이가 되여 자라났다.

로동당의 은정속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희망대로 교원이 되였다. 그의 곁에서는 언제나 생활의 구석구석을 속속들이 헤아려 보살펴주는 고마운 손길이 떠날줄 몰랐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그가 가정을 이루게 되였을 때에는 번듯한 새 살림집도 안겨주었다. 그것은 그와 그의 가정이 조국에서 세번째로 받은 집이였다.

고마운 조국의 품속에서 그는 그후 당일군으로 어엿하게 성장하였다.

귀국동, 행복동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은 끝이 없었다.

김귀국동로인과 그의 가족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가 마흔번째 생일을 맞이할 때에는 은정어린 생일상과 선물을 보내주시였다.

그는 김정은원수님을 모시고 대를 두고 길이 전할 기념사진을 찍는 영광도 지니였다.

김귀국동로인은 생활을 통하여 사회주의는 자신의 생명이고 생활이라는것을 절감하였다. 그래서 자식들을 조국보위초소에 내세웠고 한생을 맡은 초소에서 성실히 일하였다.

년로보장을 받은 후에도 그는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저 자식들의 일손을 성심성의로 돕고있다.

그는 지금도 자주 자기의 인생담을 자손들에게 들려주면서 이렇게 당부하군 한다.

《내 인생이 그러했듯이 사회주의조국의 품속에서 너희들도 보람차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것이다. 이 고마운 제도를 목숨처럼 귀중히 여겨야 한다.》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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