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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들의 발걸음을 더듬다-1

2024년 06월 21일 10:17 력사

이역땅 일본에 건너온 1세동포들은 일제식민지시기는 물론 해방후 온갖 고생속에서도 조국을 위해, 조직을 위해, 동포들을 위해 꿋꿋이 살아왔다. 재일조선인 1세들의 목소리를 소개한다.

부모를 대신하여 동생을 돌봐

박순조씨/효고

박순조씨

1933년 12월 15일 경상남도 창녕의 농가에서 태여난 박순조씨(90살)는 부모와 오빠, 남동생과 함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생활하였다.

《당시 살던 집의 마당은 운동장처럼 넓고 입구에는 누에의 나무가 있었다. 어머니가 누에고치를 남비에 넣어 실을 빼내고는 남은 벌레를 근처에 사는 아이들에게 먹여주었다. 그것이 아주 맛이 있었다.》

겨울에는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강이 얼어붙었는데 줄을 맨 함을 타고 강우에서 놀았다.

이는 박순조씨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고향에서의 추억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본 고베로 간 아버지를 찾아 5, 6살무렵에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후 조국이 해방되는 1945년까지 일본소학교를 다녔다. 당시는 차별이 일상적인 일이였다고 한다. 소학교에서 그가 쓴 서예작품이 평가되여 교실에 나붙었을 때 일본아이들이 자꾸 《조선년의것이 붙어있다.》고 하면서 그를 괴롭히였다. 그 광경은 지금도 쓰디쓴 추억으로서 기억되고있다고 한다.

일본의 패전후 가족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있었지만 교또 마이주르에서 조선사람을 태운 배가 폭침된 소식을 듣고 단념하였다.

그는 《친척이 모두 조선에 살았으니 아버지는 단신으로 고독했을것이다.》고 부모의 인생을 회고하였다.

해방후 그는 《東垂水에 세워진 조선학교》를 다니게 되였으나 장녀로서 동생들을 돌보느라 1년만 다니고 단념하였다. 16살이 되여 민청활동에 종사하였으며 4.24교육투쟁시에는 항의집회에 참가하는 부모를 대신하여 집을 지켰다.

박순조씨는 동네동포들이 일감을 서로 소개해주면서 의좋게 살았다고 회고하면서 《민족적뿌리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마이즈루에서 조국해방의 날을

한갑식씨/효고

한갑식씨

고 한갑식씨는 1934년 부산 감천리의 빈농에서 태여났다.

부모와 한갑식씨를 포함한 3명형제의 5식구로 살았지만 소학교 1학년이 되기전인 42년에 부모를 갑자기 잃었다. 일본에서 사는 어머니의 친척을 찾아 혼자 관부련락선에 탔다. 그후 이모의 딸이 사는 교또 호리까와에 간 한갑식씨는 이역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로부터 필사적으로 공부를 배웠다.

2년후 히가시마이즈루에 이사하였다. 애당초 공부할수 있다고 듣고 갔는데 거기서의 생활은 그런 환경은커녕 힘든 로동의 나날이 기다리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동포어르신이 《집에 와서 공부하라.》고 말을 건네주었다. 살붙이  아이처럼 보살펴준 그 동포덕분에 그는 학교에 다녀 공부할수 있게 되였다.

식민지지배하에서 어릴 때부터 일본어에 접하는 기회가 많았던 그는 일본에서 단신으로 사는데 있어서 언어측면에서는 어려움은 없었다. 《부산에서는 집에서 우리 말, 밖에서는 일본말을 썼다. 우리 말을 밖에서 쓰면 구타당하였다.》

11살때 히가시마이즈루 오오바에서 조국해방을 맞이하였다. 근처에 살고있었던 동포들은 집을 팔고 우끼시마마루를 타고 조선으로 귀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끼시마마루 폭침의 소식을 듣고 동포들은 일자리를 찾아 각지에 흩어졌다. 한갑식씨는 당시 마이즈루에서 돌을 깨는 업자가 로동자를 모집하고있어 거기서 일하게 되였다. 14살때 현재 살고있는 효고 다까라즈까로 이사하여 그후로부터 43년간 이 업종에 종사하였다.

30대부터 총련 나마제분회 분회장, 다까라즈까지부 부위원장을 약 10년간 력임하면서 지역동포사회의 활성화에 이바지하였다.

단신으로 이역땅에 와서 꿋꿋이 살아온 그의 원동력은 《조선사람들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들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신념이였다.

한갑식씨는 2023년, 우끼시마마루가 폭침된 날인 8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쓰라린 교훈을 잊으면 안된다》

정태중씨/에히메

정태중씨

정태중씨(92살)는 1932년 4월 24일 경상북도 경주군에서 태여났다.

1910년대에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의 영향으로 정태중씨네 집의 논밭과 토지도 빼앗겨 《먹지 못해 매일 힘들었다. 죽지 않았던것이 신기할 정도》라고 그는 돌이켜본다.

43년 11살때, 5년전에 일본에 간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왔다. 히로시마와 시마네의 경계에 있는 산골의 제철소에서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였다. 《아버지의 일은 강제로동이나 마찬가지였다.》

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였는데 산골에서 살고있었던 정태중씨가 이 소식을 들은것은 1달후였다. 그때는 이제 조선에 돌아가는 방법이 없어 일본에서 계속 생활하게 되였다.

46년에 조련의 초등학원에 입학하였으나 재학중인 48년 1월 24일에 련합군총사령부(GHQ)의 지시로 조선인학교를 강제페쇄시킬 방침이 나왔다. 그는 당시 학생들과 함께 반대투쟁에 나섰으나 10월에 학원은 페쇄되였다.

조련이 강제해산(49년 9월)된 후 《재일조선해방구원회》에서 활동하였는데 50년 5월 3일 조선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에 참가하고있을 때 체포되여 8년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출옥후 총련의 지부와 분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전임일군으로서 활동하였다.

95년 63살때 고문이 되여 일선에서 물러났는데 그동안 총련 히로시마현본부, 에히메현본부에서 본부위원장의 중책을 맡는 등 조직과 함께 인생을 걸어왔다.

《한생을 바쳐 열심히 사업해왔기때문에 아무런 후회도 없다.》

그는 《새세대들에게 식민지지배의 쓰라린 교훈을 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고싶다. 우리는 나라도, 말도, 땅도 빼앗겨 불안정한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이 고통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보다 괴로운 일이 없다는것을 전하고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재일동포들의 운명은 새세대들에게 달려있다. 우리 1세가 빼앗긴것들을 되찾기 위해서 세운 우리 학교를 지켜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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