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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우리 말과 나⑨/박재수

2024년 05월 01일 09:38 론설・콜럼

《사랑》에 대한 생각

졸업생들의 모교사랑

3월말에 《조선대학교 문학력사학부창설 20돐기념 대동창회》가 도꾜 우에노(上野)에서 있었다. 문력학부 초대 학부장이였던 나는 이 모임에 초대되여 졸업생들 234명과 자리를 같이하였다.

회장에 모인 졸업생들은 오랜만에 만난 스승들과 동창생들을 보고는 서로 기쁨의 인사를 나누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조선대학교 문학력사학부창설 20돐기념 대동창회》 참가자들(3월 24일)

모임에 참가한 나는 민족성을 고수하기 위한 학부사명을 가슴에 새기고 애국운동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문력학부 졸업생들의 긍지에 넘친 얼굴들을 바라보면서 창설당시에 있은 일들을 감회깊이 떠올렸다.

문력학부를 창설한다는 결정이 나온것은 2002년 9월이였다. 문력학부로서 새 출발을 할 때까지 반년밖에 없었다. 학부창설을 위한 준비시간이 너무 짧아서 나의 마음은 어수선하였다. 그렇지만 힘들어도 해야 할 일이라고 마음을 다잡고 창설준비에 나섰다.

우리 교원들은 민족성고수학부의 사명에 맞는 학부상을 토론하며 학부인재양성을 위한 교육과정안작성에 달라붙었다. 한편 학생들속에 나타난 불안을 가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강연도 하고 토론도 함께 하였다.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우리 교원들과 학생들만을 믿고 밀고나갔다.

우리는 3년안으로 학부체모를 갖출 계획을 세워 학부건설에 나섰다. 학생들도 조청지부와 반조직을 처음부터 하나로 하여 활동할것을 마음먹고 문력학부 조청지부건설에 나섰다.

이렇게 학부내부의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학부를 창설하였으나 고급학교에 대한 학부선전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으로 첫 신입생은 13명밖에 되지 않았다. 전해의 절반도 받아들이지 못한것이다.

우리의 실망은 컸다. 그러나 주저앉을수는 없었다. 우리 교원들은 학부건설3개년계획에 따라 과정안의 완성과 교수내용의 개선을 위하여 힘쓰는 한편 학생인입을 위한 년간계획을 세워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다.

학생인입을 위한 문력학부의 선전용안내장을 만들고 각 조고와의 사업을 짜고들었다. 우리 교원들은 조고에 나가서 설명회도 하고 대상학생을 만나 담화도 하였다.

이 사업에 2기생들을 중심으로 한 우리 학생들이 호응해나섰다. 그들은 학생인입사업을 조청지부사업의 중심과업으로 내세우고 방학을 리용하여 자기 출신학교에 가서 조고생들을 대상한 해설선전사업을 벌렸다. 이런 노력의 결과 다음해부터 해마다 우수한 학생들이 문력학부에 수많이 들어오게 되였다.

이때부터 조청 조대위원회사업에서 문력학부지부가 핵심조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학부창설 2년째에는 문력학부 조청지부가 조청중앙의 선구자지부상을 수여받았으며 2~4학년 조청반들도 선구자반으로 표창받았다. 학생들의 하늘을 찌를듯 높은 기세는 2년련속의 표창으로 이어졌다.

우리 말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며 조청사업도 잘하는 문력학부 조청사업의 전통은 이렇게 학부창설과 더불어 창조되였고 그 바통은 오늘도 이어지고있다.

나는 문력학부의 력사에 우리 교원들과 사랑하는 학생들의 발자취가 뚜렷이 새겨져있는것을 크나큰 자랑으로 여긴다.

오늘 문력학부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의 학부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한것은 바로 이런 전통이 있기때문이리라. 나는 그것을 대동창회에서 부르던 《문학력사학부의 노래》를 들으면서 절감하였다.

반만년 민족사와 찬란한 민족문화

우리의 젊은 심장 불길로 타오른다

장군님의 력사를 대를 이어 받드는

애국의 혈통이 우리 손에 달렸다

아 민족성을 떨쳐가는 해외투사들

영광차다 그 이름 문학력사학부

나의 교원생활에서 보면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은 비록 길지 않았지만 나의 자긍심이 이다지도 큰것은 그들과 같은 사랑스럽고 훌륭한 학생들의 모습을 나의 인생기록장에 영원히 새길수 있었기때문이다.

어머니의 후대사랑

대동창회가 끝나고 흐뭇한 마음으로 귀로에 오른 나는 30여년전에 만나뵙던 제자의 어머니모습을 추억하고있었다.

지난해 여름이다. 모교 《교또조선중고급학교창립 70돐기념 동포대축제》에 참가한 다음날에 어머니를 만나려고 제자에게 련락을 했더니 래일은 어머니가 볼일이 있기때문에 만나기 힘들것이라고 하였다. 아쉬운대로 제자만이라도 만나려고 다음날 아침 교또역에서 전화를 하니 《어머니가 선생님을 만났다가 볼일을 보겠대요.》라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오사까에서 만난 어머니와 제자

어머니가 지금도 쓰고있는 자

《브라이다르 금강》에서 30여년만에 어머니를 본 순간 반가움으로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머니는 반갑다고 나를 방안으로 안내해주었다. 오랜만에 만나는데도 어색함이 없이 대해주시는 어머니의 마음이 고마왔다.

80고개를 넘은데도 현역으로 일한다는 어머니. 그 모습은 젊은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나의 눈에 테프를 감은 자가 보였다.

《어머니, 그 테프 감긴 자는 뭡니까.》

《아, 이거요. 이건 저고리옷감을 재는 자다.》

《아니, 새 자를 안 쓰고 왜 그런 낡은 자를 씁니까.》

《이건 내 젊을 때에 있은 가슴아픈 일을 잊지 않으려고 그런다.》

어머니는 그 사연을 때로는 조용하게, 때로는 격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둘째가 어릴 때에 있은 일이다. 내가 우리 집에 온 손님들에게 고맙다고 인사삼아 선물을 주군 했었는데 둘째가 그걸 보고 나도 주겠다고 돈달라고 졸라대는것이 아니요. 하도 귀찮게 구는 바람에 그만 화가 나서 이 자로 정아리를 때렸지요.》

그때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자가 동강이 나고 아들의 정아리가 순식간에 부어올랐다고 한다. 지금도 아들의 정아리에는 그때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그때의 후회를 평생 잊지 않으려고 이렇게 테프로 감고 지금도 쓴다는것이다. 언뜻 어머니의 눈굽이 젖는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말을 이어갔다.

《둘째가 초급학교때에 있은 일이다. 오사까에 입항한 <만경봉-92>호를 보러 갔다가 그 기쁨과 흥분을 시에 <조국이 왔다>고 썼는데 선생이 그걸 보고 어른스러운 표현이니 고쳐오라고 했다는거요. 의기소침해진 아들은 그후 글을 잘 쓰려 하지 않았지요.》

어머니는 아들이 문학가가 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은근히 가졌었는데 그 꿈이 깨진것이 아쉬웠다고 했다.

어머니는 《작가로는 키우지 못했지만 지금은 동포들의 사랑과 믿음속에 총련 나까니시(中西)지부위원장으로서 동포들을 위하여 보람있게 일하고있으니 후회는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여주면 한이 없어요.》라고 하는것이였다.

제자 민애도 맞장구를 쳤다.

《보람차게 일하고있는것은 동생이 잘나서가 아니라 거주지역동포들이 잘 도와주니까 그런거죠.》

어머니와 제자의 말에 나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고마운 존재가 되였던 많은 사람들처럼 동포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여 도움과 사랑을 전달하고싶은 어머니와 딸, 아들의 마음을 나의 가슴속에 보시시 얹어본다.

나는 그제야 가슴저리도록 느꼈다. 가족을 위하여 저고리가게를 경영하면서 아들딸 넷을 키우느라 자기를 깡그리 바쳐온 어머니의 헌신이 있었기에 총련애국사업이 떠받들리우고있다는것을.

자식들을 위해서는 자기의 온 넋을 초불처럼 깡그리 태우는것이 바로 우리의 애국적인 동포어머니들인것이다.

그 품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총련일군으로, 교육자로, 예술가로, 체육인으로 자라고있는것이다.

진실한 사랑과 믿음은 위대한 창조와 변혁을 낳는 힘의 원천이다.

【경력】1966년 3월 교또조선중고급학교 졸업(9기생), 1970년 3월 조선대학교 문학부 졸업(12기생), 문학부 및 문학력사학부 학부장, 조선어연구소 소장 력임, 현 한글능력검정협회 상담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교수, 언어학박사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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