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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우리 말과 나④/박재수

2023년 10월 23일 12:59 론설・콜럼

《처음》에 대한 생각

《처음》은 누구에게나 차례진다

《처음 심부름》이라는 일본 텔레비죤방송프로가 있는데 우리 가족들모두가 즐겨본다. 심부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부모들이 웃고 우는데 그것을 보면서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있다.

인생에는 《처음》이란 말을 쓸 기회가 많은것 같다.

이 세상에 처음 응아 하고 첫 고고성을 터뜨리며 태여났을 때, 처음 홀로 서서 아장아장 첫걸음마를 뗐을 때, 엄마 아빠 하고 처음 불렀을 때, 엄마 아빠와 손잡고 처음 우리 학교에 입학했을 때…

이렇듯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고 그 경험은 시간이 지나도 기억속에 오래 자리잡는다.

《처음》경험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들의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기회나 계기가 될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하다.

어언 80년의 긴긴 세월 민족교육의 화원속에서 아름다운 민족의 꽃으로 자라난 우리 동포자녀들이 우리 말과 글로 경험한 《처음》은 헤아릴수 없이 많았을것이다.

교육일군이 되여 우리 말과 글로 우리 학생들을 가르친것도, 전임일군이 되여 우리 동포집을 찾아다니면서 그들과 우리 말로 따뜻한 정을 나눈것도, 결혼하여 아빠 엄마가 되여 아이들을 키운것도 매 사람들에게는 다 처음 경험한 일들이다.

《아 야 어 여…》 하며 우리 말을 처음 배웠던 그날로부터 오늘까지 대를 이어 우리 동포들에게 차례진 《처음》은 어느것이나 소중했고 복잡다단한 환경속에서 경험하게 될 앞으로의 《처음》은 더욱 소중할것이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온 그 《처음》들이 우리 민족교육을 가꾸어왔고 우리 말과 글로 동포자녀들의 민족성을 자래워왔으며 우리 동포사회를 꿋꿋이 지켜왔다.

나에게 차례진 귀중한 《처음》

장장 80년의 자랑찬 력사를 새긴 민족교육마당에서 수많은 《처음》들을 경험한 우리 동포들이 그랬듯이 나에게도 우리 말과 글로 경험한 보람찬 《처음》들이 있었고 지금도 가끔씩 그 《처음》들을 느닷없이 떠올릴 때가 있다.

처음 일교출신생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가르쳤을 때, 처음 교육일군대표단 성원으로 조국을 방문했을 때, 처음 통신연구원(현 통신박사원) 1기생으로 김일성종합대학에 등교했을 때, 처음 국어교원대표단과 학생조국방문단을 인솔하여 조국을 방문했을 때, 처음 국어교과서편찬사업에 참가했을 때…

이처럼 대학졸업후에 우리 말과 글로 경험한 《처음》만 해도 수없이 많았고 그것은 오늘도 내 마음속 갈피갈피에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으로 소중히 간직되여있다.

그것은 그 《처음》들에 위대한 대원수님들과 경애하는 원수님의 하해같은 어버이손길이 잇닿아있었기때문일것이다.

1978년 조국을 방문한 제6차 교육일군대표단 성원들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평생 잊을수 없는 특별한 《처음》이 있다.

1978년 7월에 영광의 대표단으로 불리우는 제6차 교육일군대표단 성원으로 조국을 방문한 《처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때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30돐을 축하하는 여러 행사장에서 김일성주석님을 무려 9번이나 모시는 영광을 지니였다.

9월 8일, 김일성광장에서 난생처음 주석님을 모신 순간 저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로 두볼을 적시였다. 9월 22일 금수산의사당(현 금수산태양궁전)에서 또다시 주석님을 모시였을 때 그이께서는 환한 미소를 지우시며 300명을 넘는 총련의 여러 대표단 성원들과 한사람한사람 축배잔을 찧어주시였으며 존함시계를 선물로 주시고 기념사진까지 찍는 영광을 안겨주시였다.

10월 1일, 평양체육관에서 진행된 제8차 전국교육자대회에서 주석님께서 원고도 안 보시고 하신 연설 《사회주의교육테제를 철저히 관철하여 교육사업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자》를 접했을 때의 감동과 흥분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있다. 주석님이 그리워질 때마다 그때의 주석님의 거룩하신 영상이 떠올라 가슴이 설레인다.

그뿐이랴. 그때 조국을 처음 방문한 4명의 우리 문학부교원들은 김형직사범대학의 윤상현교원에게서 《읽기의 기초와 교수방법》을 교재로 평양문화어의 단어와 문장발음, 시와 소설, 해설글의 읽기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그것은 평양문화어의 억양을 리론실천적으로 처음으로 습득하는 귀중한 나날이였다.

그때 처음으로 오른 백두산의 모습 또한 잊혀지지 않는다. 백두산에 처음 오른 날, 하늘은 맑게 개이였고 해볕은 정수리가 따갑도록 쨍쨍 쬐였었다. 백두산 천지너머 지평선끝까지 아득히 펼쳐진 중국동북지방의 울창한 밀림을 바라보느라니 항일성전을 벌리시던 주석님의 거룩하신 영상이 눈앞에 어리여 절로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감격속에 불렀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우에

력력히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추억깊은 백두산의 해돋이

다음해에 다시 백두산에 올랐을 때는 갑자기 불어온 세찬 바람과 비에 우산은 순식간에 망가졌고 얇은 비옷은 날려 옷이 다 젖었었다. 백두산산정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아도 한치 코앞도 보기 힘들었고 천지도 구름에 가려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어느해는 백두산의 해돋이를 학생들과 함께 보기 위해 새벽 3시에 베개봉호텔을 뻐스로 출발하고 백두산에 올랐는데 공교롭게도 안개와 구름이 끼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동쪽하늘에 아침해가 뜨려는 순간 바람이 불어오면서 안개와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동쪽하늘을 빨갛게 물들인 장엄한 백두산의 해돋이를 잠간나마 기적적으로 바라볼수 있었다. 새벽하늘을 신비롭게 장식한 그때의 해돋이는 오늘도 내 마음속에 김일성-김정일민족의 정기를 지니고 솟아오른다.

그래서 그런지 하루에도 24번 변한다는 백두산을 수십번 오른 나는 어렵고 힘들 때면 늘 백두산을 마음속에 그려보군 한다.

새로울 때도 아름다울 때도 아플 때도 감격했을 때도 그리고 죽을만큼 힘들 때도 우리 말이 안겨준 수많은 《처음》들이 내게 알록달록 색다른 느낌들과 희망, 량심과 신념을 마음속에 새겨주었다.

《처음》은 도전해야 빛난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차례지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것도 마다하는것도 각자의 몫이다.

또 《처음》을 빛내일수 있는가 어떤가는 그것에 맞다든 사람들의 각오와 결심에 달렸다.

《처음》과 마주쳤을 때 용감하게 맞다들면 그것을 빛내이는 기회를 얻을수 있지만 주저앉으면 놓쳐버린다.

《처음》속에는 우리들의 마음을 높뛰게 하는 《처음》도 있고 우리들의 마음을 괴롭히는 가슴아픈 《처음》도 있다. 그것들을 받아들여 재일동포들의 가슴마다에 공화국공민의 영예와 존엄, 긍지를 키우는 힘이 우리의 량심이고 신념이며 우리 말과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추억속의 《처음》을 아직 바라지 않는다. 수많은 《처음》을 거치고 내 나이 이제는 70고개를 훨씬 넘었어도 또 다른 《처음》들이 나를 기다리고있다.

나는 아직도 나에게 《처음》이 많다는것을 느끼게 하는 칠십대의 그 《처음》들을 꿈꾸어본다.

머지않은 앞날 통일만세를 부르며 하나된 조국 위해 정과 열을 다해가는 우리 동포들의 모습도 꿈꾸어본다.

나는 수많은 《처음》들을 거치면서 앞으로의 칠십대, 팔십대, 구십대에도 나를 찾아와 빠금히 들여다보는 《처음》들을 반갑게 맞이하려고 할뿐이다.

앞으로도 그 수많은 《처음》이 내 인생의 갈피마다를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한 오색령롱한 추억으로 장식하게 될것이다.

조국의 통일로 아로새겨질 《처음》들을 맞이할 때 나는 우리 말과 글로 일해온 진짜 보람과 행복을 느끼게 되리라.

【경력】1966년 3월 교또조선중고급학교 졸업(9기생), 1970년 3월 조선대학교 문학부 졸업(12기생), 문학부 및 문학력사학부 학부장, 조선어연구소 소장 력임, 현 한글능력검정협회 상담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교수, 언어학박사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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