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아카운트

리동규, 《축구해설의 제일인자》가 가슴속에 품은 공화국기

2023년 10월 26일 07:42 공화국

《통일신보》에 실린 둘째아들이 기고글

조선에서 《축구해설의 제일인자》로 일러진 리동규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8년이 되여간다. 그는 도꾜조선중고급학교와 도꾜교육대학(쯔꾸바대학의 전신) 체육학부에서 8년간의 선수생활을 마치고 24살에 도꾜조선인체육협회에서 사업하다가 1960년 10월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기였다. 《통일신보》(10월 14일부)에 리동규선생의 둘째아들 리학철씨의 기고글 《영원히 안겨살 위대한 어머니품》이 실렸다. 전문을 소개한다.

 

경사로운 10월의 명절이 왔다.

이 땅에 사는 그 누구나의 가슴속에 어머니당에 대한 한없는 감사의 정이 차넘치고 몸과 맘 다 바쳐 따르고 받들 심장의 맹세가 가을의 단풍처럼 붉게 타는 10월이다.

이날을 맞으니 이역의 차디찬 하늘아래 설음많던 나의 아버지(리동규)를 따사로운 한품에 안아 어버이손길로 보살피며 가장 값높은 인생의 영광에로 이끌어준 고마운 우리 당의 어머니사랑이 가슴뜨겁게 돌이켜진다.

우리 인민들속에 《축구경기해설원》, 《축구박사》로 널리 알려진 아버지의 긍지롭고 보람넘친 삶은 그대로 절세의 위인들을 대를 이어 높이 모시여 민족의 존엄도 있고 인생의 영광도 빛난다는 고귀한 진리를 다시금 깊이 새겨주고있다.

하기에 나는 대를 이어 불러도 다함이 없는 어머니의 노래,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가장 위대하고 따사로운 어머니 우리당에 대한 찬가를 아버지의 마음까지 합쳐 세상에 소리높이 터치고싶은 충동을 안고 미숙하나마 펜을 들었다.

조국의 사랑은 따사로워라

이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변함이 없으며 열렬한 사랑은 아마도 어머니의 사랑일것이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온몸을 깡그리 바치며 열과 정을 다하는것이 어머니이기때문이다.

리동규선생

하기에 아버지가 없으면 절반고아, 어머니가 없으면 완전고아라는 말도 있는것이다.

이 어머니의 사랑을 두고 말할 때 나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나군 한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어쩌면 그렇게 축구에 박식한가고, 리동규선생의 해설을 들으니 축구경기가 더 재미난다고 할때마다 시뭇이 웃군 하던 아버지.

축구와 함께 사람들과 친숙해지고 누구나 행복자라고 부러워하던 나의 아버지는 일본땅에서 살 때 어머니의 사랑을 얼마 받지 못하고 살았다. 어머니가 없어서가 아니였다.

경상남도 마산에서 부모들을 따라 현해탄을 건너간 아버지는 소년시절부터 이름난 축구선수가 될 꿈을 가지고있었다.

했으나 조선사람들을 개, 돼지보다 못한 무지렁이로 멸시하고 배척하는 왜나라의 현실은 소년의 무지개꿈을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게다가 감옥살이를 한 후과로 병을 앓고있던 아버지를 돌보느라 어머니는 아들의 꿈은 고사하고 하루 두끼밥도 먹여주기 힘들어했다.

그런 어머니가 아들의 머리우에 떨어지는 민족적차별과 멸시를 어떻게 가리워줄수 있었으랴. 그야말로 아버지는 불모지에 떨어진 불행의 작은 씨앗이였다.

인간증오사상이 공기처럼 꽉 들어찬 일본땅에서 속절없이 시들어가던 연약한 아버지에게 낳아준 어머니도 줄수 없었던 크나큰 사랑이 바다건너 멀리에 있는 조국에서 꿈만 같이 와닿았다.

나의 아버지가 도꾜교육대학 체육학부(당시)에 다니던 1950년대중엽이였다. 대학시절 아버지는 누가 뭐라고 해도 부모가 지어준 리동규라는 조선이름을 절대로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출석부와 성적부에는 《리동규》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있었다.

그것으로 하여 아버지에게는 갖은 모욕과 천대가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그칠새없이 떨어졌다.

그 날벼락은 대학에서 장학금(당시 도꾜교육대학에서는 후날 교원이 된 다음에 반환한다는 조건부로 일본인대학생들에게 돈을 내주었다.)을 타는 날이면 더욱 세차게 쏟아지군 하였다.

장학금도 못타는게 무슨 대학생인가, 너같은 《죠센징》에게는 그런 행운이 차례질리가 만무하다는것이 일본인학생들의 모멸찬 조소였고 싸늘한 랭대였다.

그때마다 아버지의 가슴속에선 울분이 치솟았고 분노의 피가 끓었으며 그에 못지 않는 고통과 괴로움이 대못처럼 아프게 깊이 박혀들었다.

(아, 나도 장학금을 타보았으면…)

그러나 이 소원과 갈망을 아버지는 풀수 없었다.

하기에 아버지는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막벌이로동과 우유배달, 가정교사 등 별의별 일을 다하였다.

그러던 1957년 4월 어느날 뜻밖에 총련일군이 도꾜교육대학에 찾아왔다.

《동규학생, 기뻐하오. 조국에서 학생한테 장학금을 보내주었소.》

(아니, 조국에서 나한테 장학금을 보내주다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버지는 가슴이 뻐근해지고 일순 눈앞이 흐려져 몸을 지탱하기조차 힘들었다고 후날에 회상한적이 있었다.

장학금! 간절히 바라던 소원이였어도 속깊이 묻어두어야 했고 열망이 강렬할수록 포기해야만 했던 그 장학금은 결코 아버지에게 돈이 아니라 부러움이였고 꿈을 꽃피울수 있는 유일한 자양분이 아니였으랴.

아버지도 공화국에서 재일조선동포자녀들을 위하여 많은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주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으나 일본대학에 다니는 자기한테까지 장학금이 차례지리라고는 정말 생각지 못했었다.

장학금봉투를 손에 쥐는 순간 아버지의 가슴속에서 격정의 뚝이 왈칵 터져나갔다.

《축구박사》로 널리 알려진 아버지의 긍지롭고 보람넘친 삶은 그대로 절세의 위인들을 대를 이어 높이 모시여 민족의 존엄도 있고 인생의 영광도 빛난다는 고귀한 진리를 다시금 깊이 새겨주고있다.

하기에 나는 대를 이어 불러도 다함이 없는 어머니의 노래,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가장 위대하고 따사로운 어머니 우리당에 대한 찬가를 아버지의 마음까지 합쳐 세상에 소리높이 터치고싶은 충동을 안고 미숙하나마 펜을 들었다.

자식을 끔찍이 위한다는 어머니의 사랑도 대학생인 아들의 손에 기껏 쥐여줘야 푼전 몇잎이 고작이였다.

그러나 조국은 비단 아버지만이 아닌 일본학교에 다니는 조선학생들에게 모두 꼭같이 장학금을 안겨주었으니 나서 처음 받아보는 그 장학금봉투에 얼굴을 묻고 아버지는 《어머니!》 하고 목메여 오열을 터치였다고 한다.

어머니! 그것은 아버지가 조국을 두고 터친 첫 부름이였다.

자본주의땅에서 자식의 꿈과 소원을 이루어줄수 없어 이 어머니를 원망해라하며 가슴두드리던 한 녀인에 대한 부름이 아니라 이역의 아들딸들을 다 품어 극진한 정을 부어준 위대한 조국이 사무쳐와 저도 몰래 터친 격정의 분출이였다.

그 눈물젖은 장학금봉투를 쥐고 아버지는 강의실에 달려가 일본인대학생들에게 땅땅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보라. 조선의 리동규도 장학금을 받았다. 우리 조국에서 이 아들에게 장학금을 보내주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일본학생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였고 그후에도 아버지앞에 서 더는 장학금자랑을 하면서 으시대지못하였다고 한다.

그날의 기쁨이 얼마나 잊혀지지 않았던지 아버지는 나에게 1957년 4월의 그날은 이역땅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조선사람으로서 떳떳이 머리를 쳐든 날이였다고 말하군 하였다.

사랑을 주고 존엄을 안겨준 공화국에 대한 한없는 고마움으로 가슴들먹이며 대학정문을 나선 아버지는 조선회관의 지붕우에 펄펄 나붓기는 공화국기를 오래도록 보고 또 보았다고 한다.

대학으로 오고가면서도 무심히 보았던 기발, 자기 인생과 그 기발이 어떻게 눈물겹게 얽혀지겠는지를 상상조차 해보지못했던 아버지였다.

그 공화국기야말로 아버지의 설음과 울분을 닦아준 어머니의 옷자락이였고 믿고 의지하고픈 따뜻한 삶의 품이 아니였던가.

이렇게 조국에서 보내준 장학금으로 아버지는 조국과 첫 인연을 맺게 되였으며 비로소 조국을 알게 되고 따르는 운명의 전환적계기를 맞게 되였다.

아버지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겨 펄펄 나붓기는 공화국기발아래 들어섰다. 언제인가 아버지는 그때 장학금봉투를 소중히 받쳐들고 공화국기발아래 들어서니 마치도 어머니가 행복에 겨운 자식을 굽어보는것같았다고 나에게 진솔한 고백을 터놓은적이 있다.

그후 《조국의 사랑은 따사로워라》노래가 나오자 아버지는 그 람홍색공화국기를 바라보며 노래의 구절구절을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불러보았다고 한다.

나라에서 나라에서 돈을 보낼줄은

꿈결에도 꿈결에도 생각을 못했지요

교육 원조비 장학 금의 많고많은

귀한 돈을

바다너머 저 멀리 조국에서 보내왔 어요

부를수록 가슴쩌릿이 울려주는 그 노래는 단순히 노래가 아니였다.

아버지가 위대한 어머니조국에 드리는 고마움에 넘친 진정이였고 그 품에 인생을 맡기고 살려는 심중의 뜨거운 고백이였다.

그날 아버지는 공화국기를 마련하였고 그 기발을 일생동안 애지중지하였다.

그 기발은 아버지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 제일 강렬하다고 하는 어머니의 사랑도 꽃피워주지 못한 꿈, 지켜주지 못한 존엄, 안겨주지 못한 행복을 다 안겨준 위대한 어머니조국의 모습으로, 자애롭고 친근하신 어버이수령님의 영상으로 안겨왔다.

아마도 조국에서 보내준 장학금을 받아안은 극적인 인생의 그날이 없었다면 아버지는 참되고 진정한 어머니를 알수 없었을것이고 꿈도 꽃피워보지 못했을것이며 일생 참다운 사랑과

행복을 느껴보지도 간직하지도 못하였을것이다.

아버지가 물려준 공화국기발을 때없이 들여다보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따뜻이 안아 품어주는 어머니조국의 품이 없다면 인간은 언제나 불행해지고 가련해진다는것을, 어머니라 부르는 조국이 있을 때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최고의 긍지로 되고 최대의 행복으로 된다는것을.

나에게는 조국이 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것만이 자식이 아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지키고 어머니란 부름을 더욱 빛내이기 위해 도리를 다하는것이야말로 나는 참된 자식의 본분이라고 생각한다.

확신하건대 나의 아버지가 축구에 그리도 뿌리깊은 애착을 가지고 조국의 축구발전을 위해 나름대로의 심혈을 기울여온것은 축구 그자체보다도 축구로써 조국을 지키고 빛내이기 위해 모지름을 써온 고민과 열정의 집중적인 표현이라고 본다.

일본잡지 《축구비평》 2012년 58호에 실린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쯔꾸바대학의 축구부는 고등사범학교로 창립된 후 올해까지 116돐을 맞이하지만 한번도 관동지구 대학련맹전에서 2부류로 떨어진적이 없다. 그러나 단 한번 떨어질번한 위기일발의 순간이 있었다. 그 최대위기를 구원한 인물이 바로 지금 북조선의 평양에 있다. 쯔꾸바대학 축구부의 100년사를 종합하여 수록한 도서 〈메이께이 축구 100년〉에는… 〈구세주〉라는 표현으로 그의 이름 〈리동규〉가 기록되여있다. …》

아버지가 조국으로 귀국한지 수십여년이 지나도록 일본인들이 잊지 못하고있는 그날의 광경을 나는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펼쳐보고저 한다.

1950년대중엽, 일본에서는 대학들사이의 축구련맹전이 해마다 치렬하게 벌어지군 하였다. 그중에서 늘 우승하는 대학은 아버지가 공부하던 도꾜교육대학(쯔꾸바대학의 전신)이였다. 그런데 어느해의 축구련맹전에서 대학은 거듭패하여 1부류팀에서 2부류팀으로 떨어질 처지에 놓였다.

력사가 오랜 명문대학이라고 자처하는 도꾜교육대학으로서는 대학의 명예와 관련되는 중대한 문제인지라 축구선수들에게 최후의 기대를 걸었고 바빠맞은 감독과 선수들은 이구동성으로 리동규가 있어야 이길수 있다고 떠들었다.

그럴만도 하였다. 아버지는 도꾜교육대학에 입학한 날부터 기둥선수로 활약하여 일본의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에서 대학이 우승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기때문이였다.

그러나 당시 아버지는 경기에 출전할 형편이 못되였다. 강의와 훈련이 끝나면 학비를 마련하느라고 육체를 혹사했던것으로 하여 그만 병에 걸려 김만유선생이 운영하던 병원에 입원하고있었던것이다.

감독과 일본선수들은 병원으로 우르르 밀려갔다. 약삭바른 왜나라족속들은 평시에는 조선사람이라고 하여 곁을 주지 않고 멸시하던 아버지한테 언제 그랬던가싶게 제발 경기에 나가달라고, 모교의 명예를 세워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모교의 명예?! 그럼 조선사람의 명예를 너희들은 과연 생각이나 해보았는가? 조선사람에 대한 모욕은 곧 우리 공화국에 대한 용납 못할 모욕이라는것을 모른단 말인가!

생각 같아선 그것들을 쳐갈기고싶었으나 아버지는 그보다 경기장에서, 만사람앞에서 실력으로 왜나라것들에게 조선사람의 본때를 보여주고싶었고 조선사람이 존엄을 얼마나 목숨처럼 여기는지 똑똑히 느끼게 해주고싶었다.

《좋다. 날 업으라!》

왜놈들은 할수없이 아버지를 둘쳐업고 경기장을 향해 헐떡거리며 뛰여갔다.

일본에서 축구선수생활을 할 때의 리동규선생

그때의 축구상황을 일본잡지 《축구비평》은 이렇게 해설하였다.

《…전후반 0 : 0으로 주심시간이 되였을 때였다. 맹공격을 하던 교육대학이 상대편 꼴문앞에서 11m벌차기를 얻었다. 경기를 보고있던 모리오까의 말에 의하면 상대편 꼴문구역에서 반칙을 당하여 넘어진것은 병원에서 나온 리동규였으며 11m벌차기를 한것도 역시 그였다고 한다. 병치료로 입원중이던 환자가 보기 좋게 11m벌차기를 성공시켰다. 이로써 도꾜교육대학은 간신히 1부류강급을 면하게 되였다. …》

안도의 숨을 내쉰 선수들과 응원자들이 와와- 기세를 올리고있을 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기운이 진하여 경기장바닥에 주저앉았던 아버지가 가까스로 일어나더니 품속에서 공화국기를 꺼내들었던것이다.

순간 조금전까지만 해도 열띤 경기열기로 끓어번지던 경기장이 축구명수가 다름아닌 조선사람이라는 현실앞에 얼음덩어리처럼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바로 그때 문득 응원석에서 한 처녀가 달려나왔다. 그리고는 공화국기를 높이 추켜든 조선청년을 부축하고 경기장을 돌기 시작하였다.

경기장 한복판에 나붓기는 공화국기발. 이 상상도 못할 광경앞에 왜나라것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수 없었다.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아츠러운 휘파람소리와 날아드는 험악한 욕질소리…

그러나 주눅이 들리 없는 아버지였고 주춤거리지 않은 처녀였다.

오히려 공화국기발을 더 높이 추켜들었다. 얼마쯤 달리였을 때 키가 훤칠하고 체격이 그쯘한 청년이 끼여들었다.

《동규, 장해. 나도 같이 뛰자!》

그가 바로 아버지의 상급생이였던 허종만(그는 현재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상임위원회 의장으로 사업하고있는데 조국에 올 때면 꼭꼭 아버지를 찾아서 그날의 일을 감회깊이 회상하군 하였다.)선생이였다.

도꾜교육대학에서 공부하는 조선청년들은 물론이고 경기를 관람하러 왔던 재일동포들도 너도나도 환성을 지르며 합세하는 바람에 대렬은 점점 더 늘어났다.

그때 아버지는 공화국기를 휘날린것이 신상에 위험을 초래할수 있다는것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것이 조선사람의 존엄이 였다고 말하였다.

조선사람을 차별하고 깔보며 지어 탄압도 서슴지 않는 왜놈족속들에 게 굴하지 않는 조선사람의 기상을 보여주고싶었고 허위날조와 비방으로 감히 공화국의 영상에 먹칠을 하는 저렬한것들을 공화국기발을 추켜들고 짓눌러버리고싶었다는것이 그때의 아버지의 심경이였다.

공화국기발, 그것은 아버지에게 있어서 단순히 사랑을 주는 정겨운 어머니의 모습만이 아니였다.

한목숨바쳐 지켜야 할 어머니였고 빛내여야 할 어머니의 이름이였다.

그래 어느 자식이 어머니를 욕되게 함을 용서할수 있으며 광풍에 어머니의 옷자락이 찢기는것을 참을수 있단 말인가.

공화국기발, 그것은 또한 아버지가 이역에서도 떳떳하게 가슴펴고 살수 있게 하는 자존심의 상징이였고 비록 일본대학에서 공부를 해도 왜나라물이 들지 않게 한 민족적자부심의 뿌리였다.

결국 아버지는 도꾜교육대학의 《명예》를 위해 축구장에 뛰여든것이 아니라 조선사람의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생사를 거는 결전장에 뛰여든것이 였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조국이 있다!》

아버지의 이 웨침에 동포들도 다같이 목소리를 합치였다.

마치 일본땅 한복판의 경기장이 아니라 조선땅 한복판의 경기장을 방불케 하는 이 광경에 이를 갈며 험담과 욕설을 퍼붓던 왜나라것들은 기가 질려 황급히 경기장밖을 빠져나갔다.

썩 후날 조국에 와서 자서전을 처음 쓸 때 아버지는 그날의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새겨넣었다.

《공화국기발은 나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어머니인 동시에 아들로서 지켜야 할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 기발은 떠나선 못살 어버이수령님의 품이였다.》

나는 아버지가 정말 지당한 말을 써넣었다고 본다.

위대한 수령님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아버지와 같은 해외동포들에게 조국이 있을수 있으며 이역의 하늘가에 떳떳하게 휘날릴 제 나라 국기가 있을수 있었겠는가.

온 세계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명명한 귀국의 배길이 열리자 아버지는 조국에서 보내준 장학금을 받아안고 격정에 겨워 마련했고 경기장에도 띄웠던 그 사연깊은 공화국기를 날리며 귀국선에 올랐다.

언제인가 나는 아버지에게 어째서 조국으로 귀국한 후 축구선수가 되지 않고 체육과학연구사가 되였는가고 물었었다.

《그때 난 20대초반이였으니 축구선수로 활약하였다면 아마 명성을 떨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축구선수로서의 명예만이 아니라 인간의 명예와 존엄을 찾아준 어머니조국의 명예가 더 소중하더구나. 조국의 명예를 세계에 떨치는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조국을 지키고 빛내이는 길이라고 생각되여 축구연구사의 길을 선택했던거란다.》

이것이 한생 거짓말이란 할줄 모른 순백한 아버지의 마음이였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나라의 축구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구사업에 한생을 묵묵히 바쳐왔다. 그리고 우리 축구선수들이 국제경기들마다에서 공화국기를 띄울 때면 흥분과 격정을 금치 못하며 우리 수령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 하고 소리없는 눈물도 짓군 하였다.

아버지의 인생체험을 더듬어보며 나는 확신있게 말한다.

사랑에는 보답이 따라야 한다.

그 보답은 과연 어떤것으로 되여야 하겠는가. 그것은 사랑을 준 품을 지키고 빛내이는것이다.

그 품이야말로 안기면 무한히 행복하고 떠나면 그 순간부터 살아도 죽은 목숨인 어머니조국의 품, 위대한 수령님의 품이라고.

《통일신보》에 게재된 리동규선생의 둘째아들 리학철씨의 기고글

대를 이어 안겨잘 영생의 품

누군가는 세상에 영원한것이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부정한다.

신미리애국렬사릉에 안치되여있는 아버지의 묘비앞에 설 때마다 나는 어머니조국의 사랑속에 영생하는 아버지를 보며 위대한 수령의 품이야말로 영원한 사랑을 안겨주는 가장 뜨겁고 열렬한 품임을 가슴깊이 절감하군 한다.

위대한 수령, 위대한 당의 품에 안긴 그날부터 아버지는 값높은 삶의 자욱을 새겨왔고 오늘도 영생의 언덕에서 빛나는 생을 살고있지 않은가.

온 나라가 고난의 행군을 하고있던 1990년대말에 있은 일이였다.

그때 아버지는 며칠밤을 새워가며 국기술도서를 번역하는데 집념하였다. 의료일군인 나의 견지에서 본다면 아버지의 몸상태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를 시중드느라 어머니는 무척 고생을 많이 하였다.

도꾜의 경기장에서 아버지를 부축하여 공화국기를 함께 휘날렸던 그 시절처럼 네 자식의 어머니가 된 날에도 변함없이 아버지를 리해해주고 떠밀어준 어머니였다.

나는 병석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않고 축구기술에 대해 연구하는 아버지에게 왜 그렇게 무리하게 일하는가고 물은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몸을 일으켜 책장으로 다가가더니 수십년전 귀국의 길에 오를 때 가지고 온 공화국기발을 꺼내들었다.

《내 언젠가도 말한적도 있지만 이 기발은 내게 첫사랑이였고 나의 유일한 힘이기도 하다. 인생을 돌이켜보느라니 정말 이 몸을 지탱해주고 떠받쳐준 힘은 조국의 사랑이였구나.》

나는 가슴이 뭉클 젖어들었다. 아버지가 때없이 그 기발을 꺼내들 때마다 그저 지나온 인생행로를 돌이켜본다고 생각하였는데 국기는 단순히 추억의 돛이 아니였다. 아버지가 품고 사는 평생의 사랑이였고 평생의 힘이였다.

또한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베푸신 사랑에 충성다해 보답하려는 아버지의 의지였고 신념이기도 하였다.

사실 축구연구사업으로 당과 조국을 받들려는 아버지의 그 심정을 누구보다 깊이 헤아려주시고 한량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신분은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주체62(1973)년 10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아버지를 자신께서 몸소 무어주신 4.25축구선수단의 과학지도원(당시)으로 사업하도록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아버지가 늘 이야기했듯이 위대한 장군님은 아버지에게 있어 뜨거운 사랑을 베풀어주신 삶의 은인인 동시에 나라의 축구를 우리 식으로 발전시키도록 방향과 방도를 환히 밝혀주시며 걸음걸음 이끌어주신 위대한 은사이기도 하시였다.

주체63(1974)년 3월 일본에서 진행한 4차례의 원정경기에서 모두 우승하고 돌아온 축구선수단을 몸소 만나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아버지에게 일을 잘하였다고 높이 평가해주시며 축배를 부어주시고 영광의 기념사진도 찍어주시였다.

그후에도 위대한 장 군님께서는 아버지에게 교수, 박사의 값높은 영예를 안겨주시고 일흔돐생일상까지 보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한량없는 사랑과 은정에 아버지는 공화국의 축구발전의 밑뿌리가 될 일념으로 연구사업에 혼신을 다 바쳤다.

하지만 병마는 끝내 아버지를 쓰러뜨리고야말았고 아버지는 2012년 여름부터 축구경기해설마저 할수 없었다.

사람들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차츰 희미해져가던 그때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값높이 평가해주신분은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이시였다.

주체101(2012)년 10월말 제30차 올림픽경기대회에서 우승한 선수, 감독들과 체육부문 일군들을 만나주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체육과학연구소 연구사 리동규동무는 축구와 관련하여 모르는것이 없다고, 그는 세계적인 축구선수들의 개별자료와 가정일화 같은것들까지 다 알고있으며 자료연구를 위해 자습으로 두개 나라 말까지 소유하고있다고 하시며 아버지를 높이 내세워주시였다. 그 말씀을 전달받고 아버지는 놀랍게도 병석에서 일어났다.

절세위인의 사랑은 정말 강하고 기적을 주는 힘이였다.

두차례의 대수술을 이겨낸 아버지는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부어주신 크나큰 사랑을 안고 축구기술과 관련한 연구사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그런 아버지를 언제나 잊지 않으시고 최상의 영광과 행복을 안겨주시였다.

주체102(2013)년 8월 14일 아버지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을 모시고 김일성경기장에서 진행하는 국내 최우수축구선수들이 망라된 룡악산팀과 보통강팀사이의 남자축구경기를 그이의 옆자리에 앉아 해설해드리는 무상의 영광을 지니였다.

그날은 아버지가 일흔일곱번째 생일을 맞는 날이기도 하였다.

병상태가 너무 심해 침상에 그냥 누워있는 아버지여서 우리 집에서는 생일상을 차릴념도 못한채 침울한 분위기에 쌓여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 아버지를 찾으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버지는 앓고있던 사람같지 않게 벌떡 일어났다.

나와 어머니가 부축하려 하자 아버지는 벌컥 성을 내면서 《우리 원수님앞에 어떻게 부축을 받으면서 나선단 말이요? 내 힘으로 갈테니 걱정마오.》라고 하는것이였다.

그날 아버지가 받아안은 사랑과 은정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TV와 신문에 널리 소개되였으므로 나는 한가지 사실만을 더 전하려고 한다.

경애하는 원수님을 모시고 축구경기해설을 해드린 후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오늘은 내 일생에서 제일 기쁜 날이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나의 축구경기해설을 친히 들어주셨으니 이처럼 큰 생일선물이 어디 있겠니. 만약 내가 일본땅에 있었더라면 이런 꿈같은 영광을 받아안지 못했을게다.》

아버지모습이 TV화면에 나타나자 축구애호가들은 물론이고 온 나라 인민들은 평범한 체육과학연구사가 받아안은 영광을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를 보내왔다.

그로부터 두주일이 지난 8월 28일 아버지는 경애하는 원수님을 모시고 진행한 《홰불컵》 1급 남자축구 선봉팀과 4.25팀사이의 축구경기해설을 또다시 맡아하였다.

절세위인의 사랑은 정녕 마를줄 모르는 샘이였고 생의 활력을 더해주는 따사로운 해빛이였다.

그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였는지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눈물을 걷잡지 못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로부터 몇달후 림종을 앞둔 아버지는 나를 곁으로 불렀다.

손을 쳐들 기운도 없는 아버지가 눈빛으로 가리킨것은 조국으로 귀국할 때 가져온 공화국기였다.

내가 기발을 가져다주자 아버지는 그 기폭에 볼을 대이고 엷은 미소를 짓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께서는 장례를 잘 치르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으며 아버지의 령전에 화환까지 보내주시고 유해를 신미리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지도 어느덧 8년세월이 가까와온다.

비록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돌아갔지만 공화국기발에 볼을 대이던 아버지의 그 심정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있다.

우리의 조국이시고 운명의 태양이신경애하는 원수님의 품을 죽어도 결코 떠나지 않으려는 그 열렬하고 강렬한 진정을 말없이 터쳐놓은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자손들에게 인간의 삶을 꽃피워주고 빛내여주는 경애하는 원수님을 길이 받들어 공화국을 심장을 바쳐 사랑하고 받들라는 무언의 절절한 당부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땅에서도 살아보고 사회주의조국의 품에서도 살아본 아버지는 자기의 인생체험을 통하여 자식들에게, 아니 우리 인민들에게 똑똑히 새겨주고있다.

위대한 수령을 모실 때라야 진정한 조국도 있고 그 조국의 품에 안겨살 때에 한 인간의 운명은 물론이고 우리 조선민족의 운명과 그 장래가 아름답고 창창하다는것을.

위대하고 영원한 사랑속에 영생의 삶을 사는 아버지는 오늘도 나에게 말해주고있다.

사회주의조선의 영상이신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을 충성다해 받들라!

내 나라, 내 조국을 목숨다해 사랑하라!

아버지의 그 마음을 담아싣고 또 우리의 운명이고 미래이시며 영광과 행복의 전부이신 경애하는 원수님을 이 세상 끝까지 따르려는 나와 온 가족, 아니 우리 인민모두의 억척불변의 신념을 싣고 뜻깊은 10월의 하늘가에 우리의 붉은 당기와 국기가 세차게 휘날리고있다.

(조선신보)

Facebook にシェア
LINEで送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