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 전승의 세계사적의의 ① 새로운 세계대전을 막아낸 영웅조선
2023년 07월 31일 06:49 조국・정세조선의 군대와 인민은 1950년대의 조국해방전쟁에서 침략자를 물리쳐 자기의 존엄과 자주권을 지켜내고 세계《최강》을 뽐내던 미국의 내리막길의 시초를 열어놓았다. 랭전의 시작과 함께 조선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의 국제적성격, 조선이 쟁취한 전승의 세계사적의의를 되새겨본다.
저지파탄된 미국의 패권전략
《조선전쟁은 창건된지 불과 2년도 안되였던 청소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요람기에 없애버리고 아시아를 포함한 전세계를 제패하려는 흉심밑에 미국이 계획적으로 준비하고 도발한 철두철미 침략전쟁이였다.》- 조선외무성 미국연구소가 전쟁발발 73년에 즈음하여 발표한 연구보고서(2023.6.25)의 한구절이다.
아시아침략을 위한 교두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남조선을 비법강점한 미국이 아시아대륙의 갑문인 조선반도를 저들의 패권실현을 위한 교두보로 삼으려고 흉심을 품고있었음을 방증하는 력사적자료들이 있다.
례컨대 당시 에드원 폴리를 비롯한 대통령특사들은 남조선을 행각하여 트루맨에게 제출한 보고서들에서 《조선은 아시아에서 미국이 성공하는가 못하는가 하는것이 걸려있는 리념상의 싸움터이다.》,《조선의 통일과 독립은 미국의 전반적리익에 있어서 중대한 위협으로 되기때문에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되며 군사점령의 범위도 전 조선으로 넓혀야 한다.》고 력설했었다.
세계를 제패하려면 아시아를 정복해야 하며 아시아를 정복하려면 조선을 예속시켜야 한다는 관점에서 작성된 침략전쟁계획은 애당초 새로운 세계대전으로 확대될수 있는 엄중한 위험성을 내포하고있었다.
미국은 맥아더사령부(GHQ)의 《G-2》,《G-3》 등 정보 및 작전부서들은 물론 전 일본군 고급장교들로 조직된 《력사반》과 《카토》기관까지 인입시켜 조선과 만주, 씨비리를 점령할것을 예견한 《A, B, C계획》을 연구완성하였다. 그중 《A》계획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침공하기 위한 《북벌》군사행동계획이였다.
그후 미국은 조선전쟁을 도발한 즉시 일본주둔 미군을 투입할데 대한 내용을 새롭게 수정보충하여 《AL-3》이라는 계획을 완성하였으며 극비문건 《NSC-68》에는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미국과 추종국가군대까지 투입한다는것을 쪼아박았다.
이러한 속에서 미국무성 특별고문 덜레스가 1950년 6월 17일 남조선에 날아들어 38도선 현지를 시찰하였다. 이튿날에 리승만과의 비밀회담이 있었다. 이 회담의 내용에 대하여 해방후 미군정청의 책임고문 서재필의 1등서기관으로 있다가 그후 유엔주재 남조선대사, 뉴욕주립대학 명예교수였던 림창영이 다음과 같이 증언한바 있다.
《내가 이전에 인간적으로 가까이 지낸바 있는 전 국군중장 최덕신의 말에 의하면 덜레스는 리승만에게 공산주의와 싸울 각오가 되여있는 나라에 대해서는 미국이 언제나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확언하였다고 한다. 덜레스는 …리승만에게 공산북조선을 공격할 준비가 되여있다면 미국은 유엔을 통하여 도와주겠다고 시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리승만에게 남조선이 먼저 공격을 받았다는것을 세계가 인식하도록 해야 할 필요성과 그에 따라 행동계획을 짜야 한다는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결국 비밀회담의 일주일 후인 6월 25일, 전쟁의 포성이 울렸다.
《신공세》와 핵무기사용
덜레스가 시사한대로 미국이 주도하여 채택한 유엔《결의》에 따라 조선전쟁에 참전하는 《유엔군》이 조작되고 미극동군 사령관 맥아더가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였다. 미국은 조선전선의 좁은 지역에 자기 나라 륙군의 3분의 1, 공군의 5분의 1, 태평양함대의 대부분 그리고 15개의 추종국가군대들과 남조선군을 포함하여 무려 200여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미국이 방대한 추종국가군대를 투입하면서 저들의 수적, 기술적우세를 광고한 그 사실자체가 조선전쟁의 국제적성격을 보여주는것이다.
해제된 미국무성의 비밀문서에 의하면 백악관은 전쟁발발 이튿날에 벌써 핵무기사용계획을 론의하였다. 미국의 시각으로 1950년 6월 25일 저녁(조선시각 6월 26일 아침), 대통령과 국무장관, 국방장관, 합참의장 등이 참가한 비밀회의의 내용을 기록한 《조선의 상황(Korean Situation)》이라는 문서에는 《원자폭탄(A-bomb》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1950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이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후 미국대통령 트루맨은 기자회견에서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겠다.》고 공언하고 현지의 군총사령관의 책임아래 핵무기가 사용될것이라고 하였다. 핵탄두를 탑재한 B-29 전술핵폭격기가 미본토를 떠나 태평양 괌도에 배치되고 전략공군사령부의 핵무기지휘팀이 도꾜에 파견되였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를 하던 조선인민군이 중국인민지원군과 함께 적들을 다시 38도선이남으로 격퇴하고 서울을 점령한것은 1951년 1월이다. 미국이 정치군사적곤경에 빠져든 가운데 4월에는 북진과 확전을 주장했던 현지 군총사령관 맥아더가 트루맨에 의해 해임되였다. 6월, 적아쌍방이 38도선일대를 경계로 대치상태에 들어서자 미국은 저들의 군사적인 페패를 만회할 시간을 얻기 위해 정전회담의 개최를 제의하고 그 막뒤에서 새로운 군사적공세를 벌릴것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1951년의 이른바 《하기 및 추기공세》는 《유엔군》의 참패로 막을 내리였다.
1952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조선전선을 시찰한 아이젠하워는 핵무기사용까지 념두에 둔 《신공세》로 전쟁판세를 역전시켜보려고 하였다. 조선과 같은 작은 나라와의 전쟁에서 사용할수 있는 새로운 핵폭탄의 필요성을 느끼던 미국이 핵대포(Atomic Cannon)라는 전술핵무기의 개발에 성공한것은 1952년 여름이다. 전쟁발발 당시 292개였던 미국의 핵무기는 3년사이에 1천개까지 치솟았다. 정전회담이 교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는 가운데 미국이 또 하나의 핵보유국 쏘련을 억제하면서 조선반도나 중국에서 사용할수 있을 정도로 핵무기의 수량을 늘인것은 조선전쟁이 핵전쟁으로 비화될 요인으로 될수 있었다.
실제로 아이젠하워는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의 핵사용계획을 구체화하였다. 1953년 5월 20일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조선반도 중부지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의 개시와 중국본토에 대한 해공군 합동작전을 승인하고 여기에 핵무기사용도 포함시켰다. 실행일(D-day)은 1년후인 1954년 5월로 잡았다.
인민군의 공세와 정전협정체결
조국방위자들은 수적, 기술적우세를 자랑하던 침략자를 정치사상적우월성과 전략적우세로 제압하였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적들의 《신공세》를 격파분쇄하기 위한 대담한 군사작전을 펼치시였다. 1953년 5월 13일부터 7월 27일까지의 기간은 세차례에 걸쳐 조선인민군이 강력한 타격전을 전개하도록 하시였다.
전투에서의 승리는 정전담판에서 거두는 성과로 이어졌다. 조선을 일거에 병탄하고 자기의 지배권을 확대하려던 미국의 야망은 조선의 반격과 용감성에 부딪쳐 3년간의 고전끝에 정전협정의 조인으로써 좌절되고말았다.
7. 27의 전승이 없었더라면 6.25의 충돌은 핵무기사용을 동반한 새로운 세계대전으로 비화될수 있었다. 조선의 군대와 인민은 《보병총과 원자탄의 대결》이라고 일컬어진 조국방위전에서 미국의 패권전략실행을 저지파탄시키고 세계의 평화를 수호하였다. 바로 여기에 조선의 력사에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는 7. 27전승의 또 하나의 거대한 의의가 있다.
(김지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