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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련의 힘〉애국의 열성자들을 배출한 모범분회창조운동

2023년 07월 07일 07:39 총련

데시로 제1분회는 총련분회열성자 제1차대회에서 《총련모범분회》칭호와 기발을 수여받았다.

 

정이 넘치고 활기에 찬 《우리 동네》

《우리 분회 마을은 해방전에는 <말집골목>이라고 불리웠습니다. 당시 동포들이 일본<오야가다(親方)>집에서 <마차군(馬夫)>으로 고된 생활을 강요당하였고 <마구간(馬小屋)>주위에서 말과 함께 생활한데서 불러진 실로 모욕적인 호칭이였습니다.》

총련분회열성자 제1차대회(1961년 10월 3~4일)에서 토론한 미나미오사까 니시나리기다지부 데시로(出城) 제1분회 리태학분회장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그 순간 이 근방에서 맨처음에 조련분회가 결성되였다.》며  자기가 사는 동네의 력사를 소개하였다.

《무엇이든 모두가 함께 하는 곳》

박남양씨(72살)가 부친을 따라 기다규슈 도바따에서 이 동네로 이사온것은 대회가 열린 해이다. 나이는 10살이였다. 경기도 수원이 고향인 부친 박제준씨는 살길을 찾아 식구들보다 먼저 오사까로 왔다. 글을 읽거나 쓸줄 몰랐던 그는 구두닦기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면서 자기 가족을 동포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불렀다.

박남양씨가 데시로에 온 당시, 이 지역에는 《마구간》이 아직도 있었다.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동네의 첫인상은 《좋은 일이든 그러지 않은 일이든 모두가 함께 하는 곳》이였다.

대회에서 토론한 리태학분회장은 해방후 동포들이 정상적인 직업에 대한 희망이 짓밟히고 결국 먹고 살기 위해 부득이 비정상적인 직업도 하지 않으면 안되였고 그래서 동포들사이에 서로 눈을 피하여 불신이 조성된 시기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1954년이 전환점이 되였다. 동네가 화재로 삽시간에 전소당하였다. 곤경에 빠지자 동포들은 비로소 눈을 번쩍 뜨고 협조하게 되였으며 동네재건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다. 《말집골목》은 《평화부락》이라고 불리우면서 총련결성, 귀국사업 등의 사변을 거쳐 《데시로 제1분회》로 변모하였다. 동포들은 열성을 모아 동네의 한복판에 분회사무소도 마련하였다.

박남양씨에게 있어서 분회사무소는 《동네아이들이 모여앉아 공부하는 곳》이였다.

《어른들은 매일 사무소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회상기>학습의 광경도 기억납니다. 낮이면 사무소 앞마당에서 동네아이들이 뛰놀고 저녁이면 남녀 조청원들이 모여서 포크단스도 하고… 건물 정면에 기발대가 있었으니 명절날이면 국기도 게양했습니다.》

당시 데시로 제1분회관하에는 50호, 259명의 동포들이 살았다. 그중 총련회원은 42호, 208명이며 분회위원은 10명이였다. 민단은 4호, 19명이고 미조직은 4호, 32명. 리태학분회장이 토론에서 밝힌 수자이다.

《남조선에서 일본으로 밀항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시대였고 아마도 우리 동네에도 그러한 동포가 있었을텐데 그들도 총련이 하는 일을 반대하지는 않았고 총련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만큼 힘이 셌지요. 어른들이 <조선신보>의 론조를 따라 외우며 론쟁도 하고… 바로 그런 동네였습니다.》

동포들은 한동네에서 의지하고 협조하면서 살았다.

영향을 주고받는 친밀한 관계

총련의 모범분회창조운동은 1961년 1월에 일본 각 지방의 몇개 분회들이 《조국을 향하여 배우자!》는 구호를 들고 벌린 자각적인 운동으로 시작되였다. 데시로 제1분회는 맨처음에 운동을 시작한 분회의 하나다. 총련 제6차 전체대회(1961년 5월)에서 모든 분회들이 이 운동에 떨쳐나서도록 할것이 방침화되고 3개월 남짓한 기간에 336개의 분회들이 참가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총련분회열성자 제1차대회가 열리여 데시로 제1분회를 비롯한 12개 분회들에 《총련모범분회》칭호와 기발이 수여되였다.

재일동포들이 당시 조국에서 벌어지던 천리마작업반운동에 고무되여 일으킨 모범분회창조운동은 생활의 마당인 분회에서 동포들을 《교양개조》하는 《대중적혁신운동》이였다. 총련의 전임일군이 아닌 분회의 열성자들이 자진하여 분공을 수행하였다. 《사람과의 사업》을 통해 《공화국공민으로서의 긍지》를 안기고 《총련애국사업의 주인된 자각》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를 분회사업과 결부시키면서 학습하였다. 례컨대 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수 없는것과 같이 유격대는 인민을 떠나서 살수 없다는 김일성장군의 교시를 실천하였다.  동포들의 집집을 방문한 분회위원들이 그들의 생활상 고민을 풀어주면서 조국과 총련조직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니시나리지부통합대회(1964년 8월)

《돌이켜보면 우리 아버지도 교양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느날 분회사무소에서 돌아오더니 수령님의 혁명일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아버지가 글을 읽지 못했으니 누군가 책을 읽고 그 이야기를 들려준겁니다. 어머니도 사무소에서 열리는 성인학교에 다니게 된 다음부터는 집에서 공화국의 노래를 부르곤 했지요. 사람은 배우면서 성장합니다. 돼지를 길러 생계를 유지하던 아저씨가 분회장을 맡은 시기가 있었는데 <종전에는 상반신 알몸으로 동네를 걸어다니던 사람이 총련학원에서 강습받다가 돌아온 다음부터 겉옷을 걸쳐 입게 되였다.>며 분회장의 성장을 나의 어머니가 평가하더구만요. 우리 동네에는 누가 먼저라 할것없이 허물없이 말을 건네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그러한 친밀한 인간관계가 있었습니다. 》

부친은 자기 집에 동네의 동포를 데려다 놓고 시간 가는줄 모르게 말을 나누게 되였다. 조국통일문제나 일본의 정치정세가 화제거리가 되였다. 때로는 아들에게 말을 건네고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어린아이도 자기 나름의 생각을 말했다.

박남양씨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조선학교를 다녔다.

《총련모범분회》기발

《<왜 우리 학교에 편입하게 되였는가.>고 묻는 교원에게 난 이렇게 답했지요. <지금 나라가 분단되여있는데 통일이 되여야 하며 그러자면 누구나 다 배워야 합니다.> 어린것들도 어느새 그 동네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난겁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교원들이 편입생인 나를 떳떳한 조선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열정을 쏟았지요.》

《글을 배워 일군이 된 아버지》

총련분회열성자대회에서 보고를 한 총련중앙 한덕수의장은 참가자들을 향해 《동무들은 수령이 맡겨준 과업을 책임성있게 수행하는 영예로운 총련활동가, 재일동포들을 총단결시키며 조국통일을 위하여 용감히 싸우는 애국적인 일군》이라고 말했다.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고 박남양씨는 말한다. 《보통사람들도 그런 긍지를 안고 살았다.》고 한다.

《망국노의 설음을 아는 1세들은 통일을 간절히 바랬고 총련이 하는 일은 옳다며 하나로 뭉쳐 힘을 모았습니다. 그 배경에는 극심한 차별이 있습니다. 중학교시절, 총련중앙학원의 실습생들이 우리 동네에 와서 하던 실태조사에 동행한바 있는데 일본에 건너와서 당한 일들에 대한 1세들의 증언을 들으며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

박남양씨는 중학교시절에 벌써 총련의 전임일군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학교에 온 조청본부 일군에게 자기 결심을 이야기하니 《직업적 일군이 되는구나.》고 하면서 반가와했다.

1970년 박남양씨는 조선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아들이 《민족교육의 최고학당》에서 배우게 된것을 부친은 커다란 긍지로 여겼다고 한다.

《방학기간에 집에 갔는데 아버지가 그해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의 보고문을 읽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입니다. 그때는 글을 읽을줄 알았던것입니다. 그후 아버지는 데시로 제1분회의 분회장을 맡아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것은 1974년인데 생전에 분회장을 하면서부터는 구두닦기를 그만두고 총련의 어느 기관에서 사무원으로 일했습니다. 결국 난 총련일군의 자제가 된셈이지요.》

아들은 그러한 부친이 자랑스러웠다. 박남양씨는 조대를 졸업하고 조청 오사까부본부에 배치되였다. 그후 가족과 동네의 추억이 깃든 니시나리에서도 일했다.

《총련의 전임일군으로서 한생을 살아왔는데 동포들의 정이 오가고 생활상담도 정치론의도 일상다반사였던 그 동네가 나를 일군으로 키운겁니다. 1960년대의 모범분회창조운동, 총련에 관한 문헌들에 새겨져있는 그 력사는 오늘과 잇닿아있는 나의 삶의 체험, 영원히 바래지 않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김지영기자)

련재 《총련의 힘》에서 취급할 동포사회의 사변과 일화들, 증언과 자료들을 모집합니다. 기자가 현장을 찾아 당사자, 관계자들을 취재합니다.  조선신보사 편집국  03 (6820) 0103    E메일 sinbo@korea-np.c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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