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의 마음에 아로새겨진 장군님의 마지막 강행군


부강조국을 위해 끊임없이 달린 야전렬차의 궤도

한평생 위민헌신의 한길을 걸으신 야전복차림의 위대한 령도자. 그 생애의 마지막시기를 상징하는 어휘는  바로 《강행군》이다. 그 나날의 영상들은 오늘도 조선인민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있다.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제끼기 위한 총진군의 진두에서 강행군을 단행하시였다. (2011년 4월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서)

2012년에 기어이 대문을 열자

2008년 12월 24일 천리마제강련합기업소(이전 강선제강소)를 찾으신 김정일장군님께서 전당, 전군, 전민이 새로운 혁명적대고조의 불길을 지펴올림으로써 2012년까지 기어이 강성대국의 대문을 활짝 열어제끼자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2012년은 김일성주석님의 탄생 100돐을 맞이하는 해이다. 2009년 정초에 발표된 3지(《로동신문》, 《청년전위》, 《조선인민군》) 공동사설은 그 현지지도가 《어버이수령님께서 천리마운동의 위대한 발단을 열어놓으신 1956년 12월의 그때와 같이 우리 당과 혁명발전의 일대 전환기를 안아온 특기할 사변》으로 된다고 강조하였다.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천리마제강련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시면서 새로운 혁명적대고조의 봉화를 지피시였다. (2009년 12월 24일)

2012년을 향한 총진군을 호소하신 그날, 기업소에서 새로 건설한 초고전력전기로를 보시고 생산실태를 료해하신 장군님께서는 천리마의 고향인 강선이 끓어야 온 나라가 들끓고 강선의 로동계급이 소리치며 내달려야 전국의 로동계급의 발걸음이 더 빨라질수 있다고 하시면서 이곳에서 대고조의 불길을 세차게 지펴올릴것을 호소하시였다. 그런데 이날을 계기로 누구보다 더 발걸음의 속도를 올리신 분은 장군님이시였다.

2009년의 1월부터 3월사이에 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된 공개활동회수는 42번, 그 단위는 58에 이르렀다. 전해의 같은 시기(회수 10, 단위 15)에 비하면 무려 4배에 달하였다. 언론들은 과

2009년 4월 5일 《광명성-2》호가 발사되였다.

거에도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진행된 현지지도를 《삼복철강행군》, 《눈보라강행군》이라고 불렀는데 당시 《로동신문》은 《강행군중의 초강행군》,《일대 공격전》이라고 표현하고있었다.

경제단위들에 대한 장군님의 현지지도소식이 련일 전해지는 가운데 시험통신위성 《광명성-2》호를 국산 로케트 《은하-2》호로 쏘아올리기 위한 준비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있다는 발표가 있었다. 1998년 조선의 첫 인공지구위성 《광명성-1》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되였을 때 장군님께서는 여기에 공헌한 과학자들에게 보내신 감사문에서 주체의 강성대국을 일떠세울데 대하여 언명하시였다. 인민들은 두번째로  인공위성이 발사되게 된다는 소식을 2012년을 향한 《초강행군》,《공격전》과 결부하여 접수하였다. 그것이 강성대국건설의 새로운 리정표, 조선의 경제부흥전략인 선진과학기술에 기초한 자력갱생의 실효성을 증명하는 일대사변으로 될것이기때문이였다.

적대세력들은  조선이 《미싸일발사를 준비》하고있다고 헛정보를 내돌려 압력을 가하고서는 《요격》을 운운하며 정세를 긴장격화에로 몰아갔다.

그때 김정은원수님께서 반타격사령관으로서 륙해공군을 지휘하시였다. 만약 적들이 위성을 요격한다면 적들의 아성까지도 무자비하게 답새기겠다는 의지를 온 세계앞에 선포하도록 하시고 적들이 덤벼든다면 그 함선집단과 요격체계를 가차없이 짓뭉개버리라는 명령을 하달하신것이다.

2009년 4월 5일 《광명성-2》호가 발사된 날, 장군님과 함께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찾으시여 그 성공을 지켜보신 후 원수님께서는 오늘 각오를 하고 그곳에 갔다 왔다, 적들이 요격으로 나오면 진짜 전쟁을 하자고 결심하였댔다고 하시였다. 장군님께서도 후날 만약 적들이 우리 위성을 요격했더라면 우리 대장의 반타격전에 큰일 날번했다고 회고하시였다.

《광명성-2》호의 궤도진입은 2012년을 향한 어길수 없는 시간표를 재확인케 하였다. 5월에는 조선로동당이 전당, 전군, 전민이 더욱 분발해 150일전투를 벌려 새로운 대고조진군속도를 창조할것을 호소하였다. 150일전투가 끝나자 련이어 100일전투가 시작되였다.

장군님께서는 야전렬차를 타시고 기술혁신과 증산의 성과로 들끊는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들에 대한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였다. 이해 장군님께서 렬차를 타고 달리신 거리는 지난 10년동안 렬차행군을 하신 거리를 릉가하였다. 당시 장군님의 현지지도를 받은 현장의 일군, 로동자, 농민들은 《조선신보》기자의 취재에 응하여 《강성대국건설의 진두지휘자는 우리 장군님》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있었다.

선린우호의 전통과 평화외교

이 시기 국내언론들은 장군님의 활동에 대하여 《전면적이며 립체적인 공격전》이라는 표현도 썼다.

경제부흥과 인민생활향상을 위해서는 나라의 평화적환경을 마련하는것이 중요하다.

《광명성-2》호의 발사를 《불법시》하여 유엔안보리에서의 제재결의채택을 주도한 미국은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제2차 핵시험(2009. 5. 25)을 단행하는 조선의 단호한 립장, 초강경의 대응방식을 보았다.  그 석달후인 2009년 8월 이전 대통령 클린톤이 현직 대통령 오바마의 구두친서를 가지고  평양을 방문, 최고령도자의 접견을 받는 사변이 일어났다.

해가 바뀌여 2010년 1월, 조선외무성은 《위임에 따라》 조선전쟁발발 60년이 되는 이해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회담을 시작할것을 정전협정당사국들인 중국과 미국에 정식으로 제의하였다. 그런데 3월 조선서해에서 《천안》호침몰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은 《북소행》설을 내돌리며 조선반도에 첨예한 대결구도를 조성하고 이를 대중국압박에도 리용하였다.

그해 6월 당의 최고지도기관선거를 위한 조선로동당대표자회를 소집할데 대한 결정이 내외에 공표되였다.

8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야전렬차를 타시고 중국을 비공식방문하시였다. 찾으신 곳은 중국의 동북지방인 길림성과 혹룡강성이였다. 김일성주석님께서 1920년대부터 항일투쟁을 벌리신 고장이며 일제를 반대하는 공동전선이 형성되여 조중친선의 력사적뿌리가 마련된 곳이다. 주석님께서는 생전에 이곳을 다시 찾지 못하시였다.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야전렬차를 타시고 이웃 나라들에서 대외활동을 정력적으로 벌리시였다.

그것은 조중친선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을 잇는 방중길이였다. 장군님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호금도총서기는 이 지역 어디에나 김일성주석동지의 발자취가 어려있다고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후 조선의 《항장원화(抗蒋援華)》(장개석세력을 반대하고 중국인민의 해방투쟁을 지원)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 등을 념두에 두면서 주석동지께서는 중국혁명승리에도 커다란 기여를 하시였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조선로동당대표자회가 원만한 성과를 거둘것을 축원하였다.

9월 28일 평양에서 당대표자회가 열리였다. 김정은원수님께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시였다.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위업을 전면적으로 실현하는 투쟁》(당대표자회 개회사)을 더욱 줄기차게 벌려나갈수 있는 체제가 갖추어졌다.

2010년 9월 28일 평양에서 당대표자회가 열리였다.(조선중앙통신)

당대표자회로부터 약 2개월후인 11월 23일 남조선군이 서해 연평도에서 북측령해를 향해 포사격하는 무모한 도발을 감행하자 조선인민군은 즉시적이며 강력한 물리적타격으로 대응하였다. 군사적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닷새후에는 미국이 서해에 핵항공모함까지 끌어들여 남조선과의 합동군사연습을 개시하였다.

그날 장군님께서는 김정은원수님과 인민군 지휘관들, 당과 국가의 간부들과 함께 국립교향악단의 공연을 관람하시였다. 평화의 수호자가 누구인가를 똑똑히 보여주는 그 광경은 막강한 국방력을 틀어쥐시고 내 나라의 푸른 하늘을 굳건히 지켜나가시는 선군령장의 담력과 배짱이 낳은 력사의 한토막이였다.

11월말부터 12월에 걸쳐 미국과 남조선이 서해에서 전쟁연습을 감행하고있는 바로 그 시기에 인민들은 장군님께서 동해안 함경남북도의 공장, 광산들에 대한 현지지도를 이어가시는 소식에 접하고있었다. 령도자의 강행군에 이끌리여 국내의 원료, 연료에 기초한 주체철(김책제철련합기업소에서의 비콕스제철 성공), 주체비료(남흥청년화학련합기업소의 무연탄가스화공정 신설), 주체섬유(2.8비날론련합기업소에서의 비날론생산 재개)부문에서 혁신이 일어나 조선의 경제잠재력이 크게 과시된 2010년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더 많은것을 해놓아야 하겠는데…

2011년 정초에 발표된 3지공동사설은 《격동하는 21세기의 첫 10년》을 승리의 년대로 빛내이고 2011년을 맞이하였다고 썼다.

조선이 걸어온 로정을 10년기간으로 총화한다면 20세기 마지막 10년은 피눈물과 시련의 시대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전사, 위대한 수령님의 제자답게 내 나라, 내 조국을 더욱 부강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모두 한마음한뜻으로 힘차게 일해나아갑시다.》라고 호소하신 야전복차림의 장군님께서 고난의 행군의 진두에 서시였다.

세기의 교차기에 전대미문의 역경을 뚫고 더욱 다져진 일심단결의 힘으로 2012년의 태양절에 강성대국의 대문을 기어이 열어제낀다는 인민의 여론이 고조되는 가운데 전화위복의 선군외교술이 남김없이 발휘되여나갔다.

연평도포격전은 유명무실한 정전체제의 한계점을 드러내보이고 조선반도에서 《전쟁과 평화》의 주제를 다시 부각시켰다. 각측의 리해관계가 엉킨 서해에서 조선의 철벽의 국방의지를 보게 된 미국은 더 이상 군사적대결을 고취할수가 없었다.  2011년 1월 워싱톤에서 열린 중미수뇌회담에서는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한 대화의 필요성이 강조되였다.

미국은 국무장관의 명의로 성명을 발표하여 조선대표단을 공식으로 초청하였다. 외무성 제1부상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뉴욕에 도착한것은 7월 27일, 그날 평양에서는 장군님을 모시고 전승절경축 공연과 연회가 진행되였다. 뉴욕에서 진행된 조미고위급회담에서는 두 나라의 관계개선 등이 심도있게 다루어졌으며 그 론의는 10월 제네바에 자리를 옮겨 계속되였다. 다음 회담은 12월에 가질것을 예견하였다.

장군님께서는 이해 5월 중국을 비공식방문하신데 이어 8월에는 로씨야를 방문하시였다. 조로수뇌회담에서 론의된 북남을 종단하는 가스수송관의 설치나 철도련결 등의 계획도 조선반도의 대결구도가 바뀌는것을 전제로 세워진것들이였다.

강성대국의 대문을 향한 로정에는 총련과 재일동포들도 함께 있었다. 천리마의 고향인 강선땅을 찾으신  그날, 장군님께서는 강성국가건설의 설계도에 총련의 새 전성기에 관한 령도구상도 함께 밝히시였다.

2011년 3월 일본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지진과 해일로 동포들이 피해를 당하였을 때에는 피해동포들에게 위문금을 보내주시여 화를 복으로 전환시키며 일심단결을 다져나가는 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을 크게 고무해주시였다.

2011년 평양에서는 주석님의 동상을 모신 만수대지구를 비롯한 곳곳에서 2012년을 향한 건설사업에 마지막 박차가 가해지고있었다.

모든것이 장군님의 구상과 의도대로 되여가고있었다.

이해 10월 나라의 경제발전과 인민생활향상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화학, 금속, 기계공업기지들이 집결한 함경남도에서 성과들이 이룩되고 언론매체들을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전해졌다. 온 나라에 타번지는 《함남의 불길》에서 공로를 세운 일군, 혁신자들이 평양에 초청되여 그들을 위한 성대한 연회가 준비되였다.

강선땅에서 새로운 대고조의 불길을 지피신 이후 전국 각지를 동분서주하신 장군님께서는 함경남도 대표들을 위한 연회에도 몸소 참석하시고 성과를 이룩한 그들을 축하하시였다. 그러시고서는 강원도와 황해남도, 함경남도와 평양의 여러 단위들에 대한 현지지도를 계속하시였다.

더 많은것을 해놓아야 하겠는데 시간이 한초한초 흐르는것이 안타깝다, 천금보다 귀중한것이 시간이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강행군을 이어가시였다고 한다.

김정일장군님의 마지막 현지지도(평양의 광복지구상업업중심)에는 김정은원수님께서도 동행하시였다.

12월 15일, 평양의 하나음악정보쎈터와 광복지구상업중심에 대한 현지지도에는 김정은원수님께서도 동행하시였다.

그후 일군들은 로고로 침습한 무거운 병상태를 걱정하면서 강행군을 삼가해달라고, 더는 찬눈길을 걷지 마시라고 간절히 아뢰였었지만 장군님께서는 또다시 조국의 북변으로 향한 야전렬차에 몸을 실으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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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대문이 열리는 그날을 보시지 못하고 너무도 갑자기, 너무도 애석하게 인민의 곁을 떠나시였지만 장군님께서 마련하신 토대우에 사회주의강성국가를 일떠세우기 위한 총진군이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였다. 장군님의 뜻을 한치의 드팀도 없이 관철해나가시는 김정은원수님께서 진두에 서시였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 흘렀지만 인민의 가슴속에 간직된 장군님의 야전렬차는 오늘도 부강발전하는 조국의 대지를 끊임없이 달리고있다.

(김지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