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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자들・새로운 전성기를 향하여 10〉《당사자》로서의 자각, 끈질긴 실천 /《유보무상화를 요구하는 조선유치반보호자련락회》・송혜숙대표

2021년 05월 22일 12:27 도전자들 민족교육

제도시행에 앞서 각지 학교들에서는 보호자들을 대상으로 긴급설명회가 진행되였다. (사진은 사이다마초중 부속유치반, 19년 8월 31일)

조선유치반에 대한 유보무상화의 적용을 요구한 운동이 시작된지 1년 반이 지나갔다. 동포들은 물론 일본사람, 해외동포들까지 합세한 이 운동은 지금 민족교육권을 옹호고수해나가는데서 중요한 지점에 서있다. 이 운동의 《당사자》가 누구인가를 모색하면서 맨 선두에서 견인해온 《유보무상화를 요구하는 조선유치반보호자련락회》(이하 《보호자련락회》) 송혜숙대표를 소개한다.

조고생들의 존재

유보무상화제도가 실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기 시작한 2017년, 현재《보호자련락회》에서 대표직을 맞는 송혜숙씨는 이번 제도가 조선유치반에도 적용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날마다 뉴스를 주시하고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2010년에 민주당정권이 내온 고등학교무상화제도에서 유독 조선고급학교만이 부당하게 제외된 선례가 있었고 17년당시만 하여도 한창 무상화재판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의 머리속에는 《이번에도 우리 민족교육이 전면적으로 부정될수 있다.》는 우려와 위기감이 애당초부터 맴돌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유치반이 소재하는 17도부현에서 요청활동에 참가한 보호자들(19년9월26일)

그러한 상황속에서 그는 조선유치반의 교원들을 비롯해 관계자들과 함께 유보무상화제도에 대해 정기적으로 연구를 깊이고있었다.

그런데 그의 우려는 현실로 되였다.

2019년 5월 10일, 제도의 근거법의 성립과 더불어 조선유치반이 무상화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것이 기존사실화되였다.

《내가 무엇을 할수 있을가? 》

평소에 인권협회일군으로 사업하면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부당하고 심각한 차별의 상황에 맞서온 그는 남다른 심정으로 이 문제를 보고있었고 3명의 아이들을 유치반과 초중급학교에 보내며 키우는 보호자로서도 남의 일이 아니였다.

그해 7월에 조선유치반보호자들의 전국네트워크인 《보호자련락회》가 발족하였다. 오늘까지 유보무상화실현을 위한 투쟁을 견인하고있는 송혜숙씨이지만 그가 련락회의 대표직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는 많이 고민하였다고 한다.

그의 주변동포들만 하여도 일본당국의 계속되는 차별시책에 《아무리 목소리를 올려도 현실은 변하지 않을것》이라는 체념과 실망의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더우기 세대의 교체,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는 감각의 변화에 따라 유치반에 대한 요구성도 다양화되고있었다.

《아무리 보호자들의 단체를 발족해도 기존의 운동방식으로 추진하는것은 힘들지  않을가.》

그런 고민을 안고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있었을 때 그의 생각을 바꾸어놓은것은 조고생들의 존재였다.

《조고생들은 고등학교무상화제도에서 조선고급학교가 제외된다는 불합리한 차별을 당한데 분격하여 운동의 맨 앞장에 섰다. 재판의 원고로도 나섰다. 또한 졸업후에도 이 문제의 당사자로서 후배들을 위해 목소리를 올렸다. 그런 그들의 굴하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니 내가 이번 문제의 당사자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였고 내가 먼저 문제의 본질을 알고 운동을 이끌어나가는 한사람이 되여야겠다고 느꼈다.》

재일조선인, 조선유치반의 보호자, 사회적소수자…그 사람을 둘러싼 조건에 따라 여러가지 해석을 할수 있는 《당사자》라는 말.

그는 조고생들을 보면서 고민하였다. 그리고 어떤 방법과 형태로든 《당사자》가 되여 이번 운동에 참여하는것이 바로 조선유치반의 무상화실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지름길이라는것을 깨닫게 되였다고 한다.

그의 도전

2019년 10월, 《보호자련락회》가 주최하는 원내집회에서 참가자들에게 호소하는 보호자들. 여기에 효고현의 외국인학교 관계자들을 비롯하여 약150명이 참가하였다.

《보호자련락회》의 발족이후 그가 실천해온것들이 바로 그것이였다. 자신이 먼저 《당사자》가 되여 더 많은《당사자》들을 운동에 망라시켜나가는것.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의 련속이였다.

인권협회사업과 육아, 집일…해야할 일은 날마다 산더미처럼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로서 내가  무엇을 할수 있는가.》는 생각으로 잠을 줄여가며 또 다른 《당사자》들을 찾고 또 찾았다.

그러한 그의 노력이 있어 처음에는 소극적이였던 보호자들속에서도 어린이들이 제도에서 제외되는 차별성에 대해 배우며《어린 원아들까지 차별하는가.》하는 분노의 감정이 점차 퍼져갔으며 유치반이 없는 지역의 일본사람들속에서도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고싶다며 그를 학습회의 마당에 부르군 하였다. 련대의 움직임이 착실히 퍼져나가고있었다. 그것은 당시 유보무상화적용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시작된지 반년밖에 안된 시점에서 46만필을 넘는 서명이 모아진 사실만 보아도 여실히 알수 있었다.

관계府省, 国会議員, 地方自治体의 議員 등 유보무상화와 관련된 행동마당에는 《당사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려는 송혜숙씨의 모습이 항상 있었고 어느새 그에게 합세하는 대렬도 늘어났다.

《보호자로서 함께 하겠다.》《조선학교 졸업생으로서 참여하겠다.》 《일본인으로서 조선을 식민지로 한 일본의 가해책임을 느끼니 찬동하겠다.》 …이러한 한사람한사람의 열성과 노력들이 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은것이다.

송혜숙씨는 이에 대해 《고등학교무상화제도에서 조고생들이 제외된 현실에 가슴 아파하고 일본정부의 처사에 분노하는 〈당사자〉들이 모이고 차별시정은커녕 그것이 더욱 악화되는 상황에 대해 더 이상 용납하여서는 안된다고 느끼게 된것이 크게 작용했을것이다.》고 말하였다.

본질 알며 행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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