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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4.24의 그날을 돌이켜보며/송암우

2018년 05월 19일 09:51 주요뉴스

여기에 한장의 사진이 있다.

《히가시고베조선소학교》(정식명칭 조련 히가시고베초등학원)의 운영을 돕기 위하여 8.15해방기념일이나 음력설, 추석날에 녀성동맹 어머니들이 농악대를 무어 기부금을 모으는 운동을 전통적으로 벌렸는데 이 사진은 4.24교육투쟁시 체포되여 3년 반쯤 옥중생활을 하다 석방된 활동가들을 환영, 격려하기 위하여 농악무를 한 사람들의 집체사진이다. 나의 어머니도 포함되여있다.

활동가들의 출옥을 환영하여 농악무를 한 동포들의 집체사진

1948년 4월 1일 나는 《히가시고베조선소학교》에 희망과 기쁨을 안고 입학하였다.

그 시기는 일본을 통치하고있었던 미제와 일본반동정부가 조선학교를 페쇄하려고 탄압을 강화하고있던 시기였다. 그 배경에는 세계패권을 쥐려는 미제의 음모가 있었다.

《히가시고베조선소학교》는 여러곳에서 운영되고있었던 국어강습소 등을 통합하여 일본학교(二宮小学校)의 일부를 빌려서 재학생 200명이상으로 운영되고있었다.

당시는 해방되여 몇해 안되였기에 지난날 배울래야 배우지 못하였던 동포들은 무엇보다도 자녀들에게 공부시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민족교육에 가장 큰 힘을 바치고있었다. 내가 입학했을 때 신입생이 교실에 가득찬것만 보아도 그러한 동포사회의 분위기를 알수가 있었다.

어린이들뿐아니라 어른들의 눈동자도 반짝거리고있었던것을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있다.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자》가 된 미군정부(GHQ)와 패전국인 일본정부가 《권력》으로 민족교육을 탄압, 말살하려고 해도 우리 동포들은 《민족교육을 지키자.》, 《자녀들을 훌륭한 인재로 키우자.》는 각오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전동포적으로 민족교육사업에 떨쳐나섰다.

그런데 입학하여 한달도 안된 4월 23일 아침에 경찰대가 달려들어 우리 학교의 책상, 걸상, 흑판 등 모든 설비들을 몽땅 강제로 몰수하여 화물자동차에 싣고 가버렸다.

그때 학교 교원들과 학교경비에 나와있었던 민청원들이 맞받아 싸웠으나 압도적으로 많은 무장경찰대에게 얻어맞아 피를 흘리기도 하였다. 또한 손발을 묶이우는 모습, 장갑차에 실려가는 모습을 우리 어린이들이 목격하였다. 말그대로 수라장이였다.

그때 비록 나이는 어리기는 했으나 우리 학교와 교육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누구이며 우리 민족교육을 빼앗으려는 자가 누구인가를 우리 학생들은 깨달았다.

그 다음날인 4월 24일 효고현청에는 현하 각 지역에서 1만명을 넘는 동포들이 모여들었다. 동포대표들과의 면담을 피하려고 온갖 술수를 다하던 현지사(岸田幸雄)와 장시간 담판한 끝에 《조선학교페쇄령》(4월 10일)의 철회 등의 합의를 쟁취하였다. 나는 누나와 함께 아침부터 현장에서 동포들의 투쟁모습을 봤는데 말과 글로써는 도저히 전할수 없는 상황이였다.

이날 일본경찰은 소방차를 동원하여 동포들에게 소방수를 쏘아대였다. 쓰러지는 동포, 온몸이 물에 젖은 동포들도 있었으나 폭력행위를 하지 않고 《스크람》을 짜서 끈질기게, 질서있게 투쟁하는 모습을 나는 목격하였다.

저녁무렵, 현지사와의 담판에 나섰던 녀성동맹대표가 현청사의 창문을 열고 두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승리의 신호를 보내주었을 때 《이겼다.》, 《교육을 지켰다.》, 《만세! 만세!》 하고 웨치는 동포들의 함성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는것만 같았다.

동포대표단이 현청 현관에 내려와 현지사가 수표한 문장을 읽었을 때 《만세!》소리와 박수는 그칠줄 몰랐다.

투쟁에서는 일시 승리하였으나 교사가 없어졌기때문에 우리 어린 학생들은 이리저리 헤매이면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날씨가 좋을 때는 뒤산(布引山)에 올라가 《아오조라(青空)학교》라고 불리우는 방법으로 땅바닥에 앉아 민청원들이 《그림흑판》으로 《가, 갸, 거, 겨》 하면서 배워주고 비오는 날에는 철도밑 창고에서 공부하는 날을 보냈다.

그런 과정에 역시 일본학교에 전학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생활이 곤난한 나머지 일본행정당국의 생활보호금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애들도 있었는데 그 경우 일본행정당국자는 《애를 조선학교에 보내고있으면 보호금을 안준다. 일본학교에 보내라.》고 압력을 가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었다.

결국 조선사람으로서 살아가는것을 가로막고 일본인이 되라는것이다. 일제식민지시기의 《황민화》정책을 조선이 해방된 이후에도 일본정부는 탄압과 회유의 량면전술로 취하고있었던것이다.

그러한 엄혹한 환경속에서도 내가 거주하고있었던 히가시고베지역동포들은 새 교사건설에 떨쳐나섰다. 니시고베지역동포들도 새 교사건설에 떨쳐나서 《히가시고베조선소학교》는 교사가 몰수된 다음해 1949년 3월에 덩실한 새 교사가 건설되였다. 드디여 우리는 새 교사에서 배우게 되였다.

4.24교육투쟁으로부터 1년도 안되는 사이에 자기 땅을 구하고 자기 학교를 건설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이것이 4.24교육투쟁의 정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새 교사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 동포들은 돈있는 사람은 돈을,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을,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여 민족교육을 지켜왔다. 그 화원에서 자라난 내가 총련애국사업에 한생을 바치고 이제는 로령기에 들었으나 4.24교육투쟁의 정신을 더욱 빛내여나가야 한다고 명심하고있다.

4.24교육투쟁으로 지키고 발전시켜온 장장 70년을 넘는 민족교육의 과정에서 새시대의 요구에 맞는 유능한 인재가 수많이 자라나 사회주의조국의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있으며 총련사업의 중요한 모퉁이를 맡아 활동하고있으며 애족애국운동의 계승자로 믿음직하게 준비되여가고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교육을 둘러싼 환경에는 여러가지 새로운 난관들이 조성되고있다.

일본반동들이 공격의 화살을 총련의 생명선인 민족교육에 집중시키고있다.

앞으로도 애로와 난관은 있겠지만 우리 일군들이 김정은원수님을 충정으로 높이 받들어모시고 일심단결하여 동포대중들에게 철저히 의거하여 사업해나간다면 반드시 새로운 혁신과 전진을 이룩할수 있다고 확신한다.

(총련 지바현본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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