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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력사학학회, 《을사5조약》날조 110년과 관련한 비망록 발표

2015년 11월 18일 08:54 조국・정세

《일본은 조선에 대한 비법적인 식민지지배의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수 없다》

조선중앙통신에 의하면 조선력사학학회는 17일 《을사5조약》날조 110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비망록을 발표하였다.

국제조약체결력사상 가장 날강도적인 방법으로 날조된 《조약》들중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을사5조약》은 철저히 조선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정책의 산물이였다. 하지만 일본은 패망한지 70년이 되는 오늘까지도 《을사5조약》의 《적법성》을 떠들며 조선에 대한 비법적인 식민지지배의 법적책임에서 벗어나보려고 모지름을 쓰고있다.

일본이 제아무리 《을사5조약》에 《적법》의 모자를 억지로 씌우려고 책동해도 조약아닌 이 《조약》의 불법무효성은 절대로 부정할수도 말살해버릴수도 없다.

1.《을사5조약》은 최고주권자의 비준을 받지 못한 비법문서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날강도적인 방법으로 《을사5조약》을 날조하여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우리 인민에게 치욕스러운 노예살이를 강요하였다.

우리 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아물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을사5조약》은 철저히 아무러한 법적효력도 가지지 못한 비법문서, 협잡문서이다.

《을사5조약》이 비법문서로 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이 조약이 국가대표자에 대한 강요로 조작된 조약이라는데 있다. 국제조약은 본질에 있어서 주권국가들사이의 자원적인 의사합의이다. 이로부터 근대시기의 국제법인 《관습국제법》과 현대국제법인 《조약법에 관한 윈조약》에서는 다같이 국가대표자에 대한 강요로 체결된 조약은 무효이라고 규정하고있다.

하지만 일제는 이러한 국제법적요구를 완전히 무시하고 《을사5조약》을 군사적위협과 무지막지한 강박의 방법으로 날조하였다. 1905년 10월 27일 일본정부가 채택한 《한국보호권확립실행에 관한 각의결정의 건》에서는 조선봉건왕조가 《보호조약》에 거절하는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서 일방적으로 한국에 보호권을 확립한다는것을 통고》한다고 결정하였다.(《일본외교문서》제38권 1책 1958년 526페지-527페지)

또한 1905년 10월 28일 일본외상 고무라 쥬따로는 당시 서울주재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께에게 보낸 《일본의 대한국보호결정을 위한 준비요건의 훈령》에서 조선주둔 일본침략군사령관 하세가와에게도 《필요한 방조》를 주도록 훈령할것이니 하야시는 하세가와와 협의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고 하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 338페지-339페지)

이것은 일제가 처음부터 총과 대포에 의거한 강제적인 방법으로 《을사5조약》을 날조하려고 계획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계획부터가 강제성을 전제로 하였던것만큼 그 날조과정 또한 불법무도한 협박으로 일관되였다는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 학계에서는 이미 《을사5조약》이 《협상》과 《조인》에서 평등의 원리가 적용되지 못하고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고종황제와 조선봉건왕조의 대신들에 대한 공포와 위협을 조장하는 속에서 강제로 날조된것이므로 불법무효하다는데 대하여 명백히 밝혔다.(《일제의 100년죄악사를 고발한다》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7년 52페지-55페지)

일제는 《을사5조약》을 《합법적인 조약》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였으나 고종황제의 반대에 부딪쳐 자기의 더러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기본은 조선봉건왕조의 최고대표자인 고종황제의 비준을 받지 못한것이다.

일반적으로 국가주권을 다른 나라에 넘겨주는것과 같은 중대한 조약은 반드시 전권위임장과 국가대표자의 비준서를 필요로 하는 비준조약형식을 취하여야 한다. 이것은 근대시기 국제조약체결형식에서 보편적인것이였다.

일본 근대초기의 권위있다고 하는 국제법학자들이 발간한 《국제법잡지》(1902년-1911년)에 실린 일본을 포함한 각국의 외교협정형식은 그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이에 의하면 각국의 외교협정 56건중에서 전권위원임명과 그 위임장교환, 비준교환에 관한 조항을 둔것은 36건, 그렇지 않은것은 20건이였다.

위임장 및 비준서조항을 둔 조약들은 통상항해조약, 《보호조약》, 평화조약 등 국권에 직접 관련되는것들외에 국가의 리익과 관련되는 중요한 안건들이였다. 《보호조약》에는 프랑스-튜니지사이의 《보호조약》(1881.5.12.)외 4건의 《보호조약》들이 들어있었다. (일본잡지 《세까이》 1999년 3월호)

이것은 당시 국가의 존망과 리익에 관계되는 중대한 조약들에는 반드시 전권위임장과 비준서가 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의 국제법학자들도 인정하고있었다. 일본의 국제법학의 개척자라고 하는 데라오 도오루는 《조약에 비준을 요하는 리유》에 대하여 《국가존망흥페의 경우는 물론 국민의 휴척(불행이라는 뜻-인용자)에 관한 가장 중대한 리유가 있는 경우에는 이(비준-인용자)를 거부하는것을 막을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비준을 필요로 하는 조약으로서 동맹조약, 담보조약, 《보호조약》 등을 들었다.(《국제법외교잡지》제4권 2호 1905년 10월 2페지)

실지 일본도 청일전쟁이전시기까지 조선봉건왕조에 강요한 불평등조약들인 《강화도조약》(1876.2.), 《제물포조약》(1882.7.), 《조일수호조규속약》(1882.7.), 《한성조약》(1885.1.) 등 6건의 조약들을 비준조약의 형식으로 체결하였다.(일본잡지 《세까이》 1999년 3월호)

이 조약들은 어느것이나 다 조선의 국권과 리익을 엄중히 침해한 중요한 조약들이였다.

비준조약형식은 항상 일본측에 의하여 먼저 제기되였으며 이에 따라 조선봉건왕조는 전권위임장을 발급하고 비준서 또는 이에 대신하는 국서를 발급하였다. 당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이 강화되고있던 상황속에서 일본은 조선에서 저들이 획득한 리권들을 《법》적으로 고수하기 위하여 국제법의 요구대로 비준조약형식을 취하였던것이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독점적지배권을 노리고 1904년 로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그후 파렴치하게도 저들이 지금껏 지켜온 국제법적준칙과 《대한국황제는 각 체약국에 사신을 파송주찰케 하고 선전포고, 강화 및 제반 조약을 체결할 권한을 가진다.》(《고종실록》 권39 광무3년 8월 17일), 《국서, 조약비준, 외국파견위임장, 재류각국령사 인증장은 국왕이 친히 서명하고 국새를 찍어야 한다.》(《고종실록》 권32 갑오 31년 11월 21일)라고 한 조선봉건왕조의 조약체결법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조선의 국권과 관련되는 중요한 조약들을 비준조약이 아니라 전권위임장과 비준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 략식조약형식으로 날조하였다.

우에서 지적한 일본 《국제법잡지》에 실린 20건의 비준조약이 아닌 외교협정문들중 18건은 일본이 체결당사국으로 되여 《조인》한것들이다. 이 협정문들의 대부분은 일제가 조선의 국권강탈과 국토병탄을 노리고 조선봉건왕조와 유미렬강들사이에 체결한것들이며 여기에는 《한일의정서》, 《한일협정서》, 《을사5조약》, 《정미7조약》 등이 들어있다.(일본잡지 《세까이》 1999년 3월호)

일제가 로일전쟁이후 조선문제와 관련한 조약들에 한해서만 국제법적요구를 의도적으로 외면한데 대해 《을사5조약》의 《유효성》을 주장하는 일본학자들까지도 《일본정부가 … 비준조약으로 하지 않았던것은 조인후 비준서교환까지의 사이에 비준을 저지하려고 한 한국내의 저항이나 제3국의 간섭을 위구하였기때문일것이다.》(일본잡지 《세까이》 1999년 10월호)라고 하였다.

당시 일제가 《을사5조약》날조와 관련하여 우려한것은 당연한것이였다. 이 세상에 자기의 국권을 통채로 외세에 순순히 내맡기고 식민지로 굴러떨어질것을 바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겠는가.

국권을 어떻게 하나 지켜내려는 고종황제의 완강한 태도와 조선인민의 격렬한 반일투쟁기세, 조선을 둘러싼 렬강들사이의 모순관계 등을 구체적으로 타산하고 거기서 위구를 느낀 일제는 조선의 국권과 직결된 극히 중대한 조약인 《을사5조약》을 하루속히 날조하기 위해 종당에는 이것을 비렬하게도 《략식조약》이라고 우겨댔던것이다.

저들의 범죄행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던 일제는 그후 조약형식에서의 결점을 늦게나마 메꾸기 위해 1907년 7월 헤그밀사사건을 기회로 친일매국역적 리완용 등을 시켜 고종황제에게 《을사5조약》에 옥새를 누를것(비준서를 념두에 둔것임-인용자)을 강박하였으나 고종황제는 단호히 거절하였다.(《황성신문》 1907년 7월 19일)

이처럼 《을사5조약》은 조선봉건왕조의 최고주권자인 고종황제의 비준을 받지 못한 비법문서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일본학자는 《바꾸어 말하면 일본외무대신이 외교권위양문서에 서명까지 한다면 전쟁전(태평양전쟁을 말함-인용자)의 대일본제국헌법밑에서라면 〈천황〉의 승인에 기초한 비준없이, 현행헌법밑에서라면 국회의 승인에 기초한 비준이 없이 일본의 외교권이 상실된다는 결론으로 된다. 그와 같은것이 국제법상 상식적인 해석일가?》라고 반문하였다.(《류고꾸법학》 42권 3호 316페지)

이것은 정당한 지적이라고 할수 있다. 만약 당시 일본이 《천황》의 비준없이 《을사5조약》과 같은 조약을 강요당하였더라면 일본정부는 자국의 헌법과 국제법을 자대로 하여 그러한 조약은 무효이라고 주장하였을것이다.

2. 조약협상에 대한 고종황제의 《재가》설은 완전한 날조

《을사5조약》에 《적법성》을 부여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는 일본학자들은 《체결되는 조약형식은 그 내용에 따라 규정되는것이 아니라 당사자간의 합의에 따라》정해진다고 하면서 일본은 조선과 《천황》, 황제의 재가로서 체결하는 조약형식으로 《을사5조약을 체결》하였기때문에 전권위임장과 비준서가 없는것이 곧 《을사5조약》의 무효원인으로 될수 없다고 강변하고있다.(일본잡지 《세까이》 1999년 10월호)

그러나 력사적사실은 조선봉건왕조가 일본과 《을사5조약》의 조약형식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론의해본적도 없으며 고종황제가 《을사5조약》에 찬성한다는 재가를 내린적도 없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오히려 일본이 《을사5조약》을 날조한 전대미문의 범죄행위를 은페시키기 위해 고종황제가 마치도 재가한것처럼 사료들을 외곡한 력사의 란폭한 위조자이라는것을 립증해줄뿐이다.

일본학자 하라다 다마끼는 《고종실록》, 《일성록》 등에 실린 1905년 12월 16일부 기록 《5대신상소문》의 내용을 그대로 채용하여 고종황제의 《재가》설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의정부대신서리 리완용,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리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리근택 등 5명이 련명으로 고종황제에게 상소하여 저들이 황제의 재가를 얻지 않고 《을사5조약》을 제멋대로 체결하였다고 하여 《매국노》, 《5적》으로 지탄받고있는데 대하여 《을사5조약》은 황제가 주도하여 그의 재가를 얻어 체결한것이고 5명의 대신이 제멋대로 맺은것은 아니라는것, 조약체결의 책임은 당시의 정부대신 8명 전원에게 있고 5명의 대신에게만 있는것이 아니라고 사실의 경과를 진술하여 저들의 결백성을 밝히려고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기초하여 하라다는 《을사5조약》날조 이후 고종황제가 이 《조약》의 무효성을 주장하며 유미렬강을 대상으로 하여 벌린 비밀외교활동을 비난하면서 그를 앞에서는 조약에 찬성하고 뒤에서는 조약무효를 주장하는 《로련한 궁중정치가》로 묘사하였다.

그렇다면 온 민족의 저주와 규탄을 받던 《을사5적》들이 당시의 력사적사실을 정확히 반영하여 상소하였겠는가 하는 문제를 심중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1905년 12월 22일 일본공사 하야시는 일본수상 겸 외상 가쯔라에게 보낸 비밀전보 《5대신상소문봉정에 관한 건》에서 12월 16일 매국노로 불리우는 5명의 대신들이 협약(《을사5조약》을 말함)당시의 정황을 상술하여 이 협약이 정당한 형식을 밟아 황제의 재가를 거쳐 조인에 이른 전말과 또 각자의 언동을 밝혀 일반사람들의 오해를 푸는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상소를 올리려는 뜻을 몰래 자기에게 알렸다고 하면서 《이 상소문을 보니 5대신의 립장으로부터 다소 수식한것은 면할수 없으나 대체로 요령이 있는것으로 되고있습니다. … 오히려 이에 의하여 신협약이 우리들의 압박에 의하여 나온것이 아니라는것을 일반에게 자세히 알리는데 리익이 있다고 인정하였기때문에 곧 이에 대한 회답을 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을사5적》들이 《상소문》을 고종황제에게 올리기 전에 먼저 하야시에게 보이고 그와 협의하였다는것 그리고 하야시는 그 《상소문》이 《다소 수식》이 있고 일본에 《리익》이 있기때문에 그것을 고종황제에게 올리는것을 승인하였다는것은 《을사5적》들이 주장한 고종황제의 《재가》설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는것을 보여준다.

일제에 의한 《을사5조약》날조의 전과정은 《일본외교문서》 제38권 1책에 수록된 1905년 12월 8일부의 《이또특파대사복명서》에 자세히 기록되여있다. 이 복명서안에 들어있는 《봉사기사적요》(《을사5조약》을 날조하기

위해 일본 《천황》의 특사로 조선에 기여들었던 이또 히로부미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진행한 활동을 개괄적으로 기록한것-인용자)에 의하면 1905년 11월 15일 이또가 고종황제와 회담한 후 《한국황제는 마침내 대체로 이번 제안(외교권강탈안을 말함-인용자)에 동의하지 않을수 없는 리유, 아울러 이에 동의하는 편이 오히려 한국장래의 국시(나라의 기본방침)에 부합한다는것을 깨달았으며 본사(이또를 말함-인용자)에게 약속하기를 당국자에게 명령하여 일본정부의 제안에 기초하여 타협을 이루도록 노력할것이라는 지시》를 내리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 자료를 보면 고종황제가 마치도 처음부터 일제의 제안에 찬성하였으며 이에 따라 협상이 시작된것처럼 되여있다.

이것은 흑백을 완전히 전도한 후안무치한것이였다. 《일본외교문서》에 수록된 자료들의 원본은 일본 외교사료관에 소장되여있는데 《이또특파대사복명서》의 원본은 불에 타 없어진 문서로 취급되고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국회도서관에 소장되여있는 《쯔즈끼 게이로꾸관계문서》속에 복명서초안의 일부가 있다.

《이또 히로부미복명서초안 명치38년 12월 8일》이라는 표제를 단 이 문서는 내용상 《일본외교문서》에 수록된 복명서중의 하나인 《봉사기사적요》문서에 해당된다. 당시 추밀원서기관장인 쯔즈끼 게이로꾸는 이또의 비서격인 역할을 하던 인물로서 《을사5조약》날조당시 이또의 수행원으로 조선에 왔던자이다. 그러므로 《봉사기사적요》의 초안은 그가 썼다고 볼수 있다. 《봉사기사적요》초안에서는 처음 《한국황제는 대체로 이번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으며》라고 씌여지고있으나 동의하지 《않았으며》우에 선을 그어 《동의하지 않을수 없는 리유, 아울러 이에 동의하는 편이 오히려 한국장래의 국시에 부합한다는것을 깨달았으며 본사(이또를 말함-인용자)에게 약속하기를 당국자에게 명령하여 일본정부의 제안에 기초하여 타협을 이루도록 노력할것》이라고 가필하여 초안을 수정하였다고 한다. 이 수정초안내용이 《일본외교문서》에 수록된 《봉사기사적요》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한다.(《을사5조약의 연구》 54페지-55페지)

이것은 일제가 고종황제가 《보호조약》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한것을 동의한것처럼 의도적으로 수정함으로써 《을사5조약》날조를 《합법화》, 《정당화》해보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는것을 여실히 증명하여주고있다. 일제가 을미사변, 조선왕궁습격사건 등 조선침략과 관련하여 엄청난 죄악을 저지를 때마다 그것을 덮어버리기 위해 언제나 사료날조라는 상투적인 수법을 써왔다는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사료를 외곡한다고 하여 력사적사실이 달라지는것은 결코 아니다. 진실은 언제나 진실로 남아있기 마련이다.

고종황제가 《을사5조약》에 찬동하지 않았다는것은 11월 15일 그가 이또와 한 회담내용을 놓고도 잘 알수 있다. 그는 《보호조약》을 강요하는 이또에게 《대외관계위임에 대해서는 구태여 이를 절대로 거부하는것은 아니지만 요는 다만 그 형식을 보전하고 내용과 같은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협정하여도 다른 뜻이 없다.》고 하였다.(《일본외교문서》 제38권 1책 1958년 501페지)

고종황제가 말한 《형식》이란 국교를 맺은 나라와의 사신 즉 공사교환제도를 말하는것이였다. 11월 16일 이또가 대신들을 불러다놓고 《조약》에 찬성할것을 강박하였을 때에도 그들은 고종황제의 뜻대로 《형식》만은 보전시켜줄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또는 이에 대해 《…외교는 형식과 내용의 구별이 없기때문에 … 도저히 희망에 응할수 없다.》고 거절하였다.(《일본외교문서》 제38권 1책 1958년 488페지-491페지)

고종황제가 공사교환제도를 그대로 유지할것을 요구한 사실은 그가 어떻게 하나 나라의 외교권을 지키려고 마지막까지 노력하였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이 모든 사실은 《5대신상소문》에 기초하여 고종황제의 《재가》설을 운운하며 《을사5조약》의 《적법성》을 주장하는 일본학자들의 주장이 전혀 무근거하다는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있다. 고종황제의 《재가》설은 《을사5조약》의 비법무효성을 규정짓는 기본근거의 하나로 되고있는 략식조약형식의 근본적인 결함을 가리우기 위한 방패막이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3. 조약명칭도 없는 조약아닌 《조약》

1905년 11월 17일에 일제가 날조한 《조약》의 정식원본에는 무슨 조약이라는 명칭이 없고 서문과 조항들만 있을뿐이다.

국제관례상 조약명이 밝혀져있지 않으면 조약문이라고 할수 없으며 그러한것을 조약체결상대국과의 협의에 제출할수 없고 거기에 서명할수도 없다.

하지만 일본외무성 조약국이 1934년에 출판한 《구조약휘찬》 제3권(조선, 류뀨)에 실린 《을사5조약》일본어판에서는 《일한협약》, 영문판에서는 《협약》, 조선어판에서는 《일한협상조약》이라는 명칭을 각각 쓰고있다. 이에 대해 일본학자 도쯔까 에쯔로는 《〈1905년 한국보호조약〉은 …대일본제국정부가 조선어판도 〈날조〉하여 공표하였다고 평가되여도 할수 없다. 조선어판원본에 제목이 없는것이 사실이라면 영문번역도 날조이라고 판단된다.

이상과 같다면 〈1905년 한국보호조약〉에는 제목도 없으며 이것은 미완성의 문서에 불과한것이 아닌가. 결국 조약문기초단계의 원안이였다고 고찰하는것이 합리적이다. 대일본제국정부는 미완성의 조약문원안에 제마음대로 제목을 붙여 조약을 날조하고 이것을 내외에 일방적으로 공표하였던것이라고 판단된다.》라고 하였다.(《류고꾸법학》 42권 3호 320페지-321페지)

조약명칭도 없는 《조약》을 날조하고도 모자라 또다시 있지도 않은 조약명칭을 날조하여 세상에 공표한 나라는 오직 교활성과 악랄성을 체질화한 일본밖에 없다.

당시 일제는 국제조약체결사에 류례없는 날강도적인 방법으로 《을사5조약》을 날조하는데 급급하던 나머지 조약명칭을 미처 달지 못하였다. 하지만 한 나라의 국권을 강탈하는 《조약》을 렬강들로부터 인정받자면 그 형식을 차려야 하였던것만큼 일제는 명칭도 없는 《조약》에 처음 제멋대로 《한국외교위탁조약》이라는 명칭을 비법적으로 사용하려고 하였다. 1905년 11월 18일 일본공사 하야시는 일본수상 겸 외상 가쯔라에게 《〈한국외교위탁조약〉은 곤난한 교섭끝에 다소 수정을 가하여 어제 17일부로 오늘 새벽 1시에 궁중에서 외부대신 박제순과의 사이에 조인을 끝냈습니다.》라는 전문을 보내여 《한국외교위탁조약》이 《조인》된 사실에 대하여 보고하였다.(《일본외교문서》 제38권 1책 1958년 264페지)

1905년 11월 19일 하야시는 당시 서울주재 영국, 미국공사들과 만난 후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외교위탁조약》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우와 같은 책 273페지)

그러나 11월 20일부터 그 명칭이 갑자기 《일한협약》으로 바뀌여졌다.

가쯔라는 11월 20일부로 영미 량국정부에 협정문을 제출하는 절차와 관련하여 주영, 주미일본공사들에게 보낸 전문들에서 《을사5조약》을 《협약》이라고 하였고 11월 21일 주미일본공사가 미국무장관에게 《을사5조약문》을 제출한데 대한 내용을 가지고 가쯔라에게 한 보고서에서도 《일한협약》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우와 같은 책 276페지)

그리고 11월 22일 유미각국에 《을사5조약》체결을 정식으로 통보하는 절차에 관한 가쯔라의 지시전문에서는 《일한보호협약》, 《일한협약》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우와 같은 책 280페지)

일제가 처음에 《을사5조약》에 《조약》의 명칭을 붙였다가 후에 《협약》이라는 명칭을 사용한것은 《조약》이라고 하는 경우 비준서가 문제로 나서기때문이였다.

그후 일제는 이 《조약》을 《일한협약》이라고 세상에 공표하는 협잡행위를 꺼리낌없이 감행하였다.

조약명칭도 없는 조약아닌 《조약》을 가지고 한 나라의 국권을 서슴없이 강탈하고 한 민족의 운명을 무참히 롱락한 제국주의는 이 세상에 오직 일제밖에 없다.

참으로 일제가 날조한 《을사5조약》은 어느모로 보나 철저히 법적으로 성립될수 없는 비법문서이다.

비법무효한 《을사5조약》을 날강도적으로 날조한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40여년간 조선인민에게 식민지노예의 비참한 운명을 강요하였다. 일제가 식민지통치기간 우리 인민에게 끼친 인적, 물적, 정신적피해는 실로 막대한것이며 그것은 그 무엇으로써도 보상할수 없는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까지도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는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과거 조선에서 감행한 저들의 극악한 범죄행위들에 대해 인정도 사죄도 배상도 하지 않고있다.

일본이 파렴치하게 행동할수록 우리 인민의 반일감정은 백배, 천배로 더욱 강렬해질것이며 우리 인민은 백년숙적 일본과 반드시 총결산을 하고야 말것이다.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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