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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묶음 《삶의 이야기》 나의 8월

2015년 08월 26일 10:43 주요뉴스
청춘의 땀을 흘리고흘려 몸도 마음도 한층 든든해지는 성장의 여름

청춘의 땀을 흘리고흘려 몸도 마음도 한층 든든해지는 성장의 여름

아오모리동포야유회/권윤희

요란한 매미소리 울려퍼지는 여름철이면 학생들속에서 여름방학을 어떻게 지낼것인가 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학기말시험이랑 소조련습 그리고 합숙 등 가지각색 이야기거리들이 화제에 오르지만 거기에는 힘든 일과 함께 더 이상의 즐거운 일도 반드시 기다리고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동반되여있다.

기숙사생이였던 나에게 있어서는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갈수 있다≫는것만으로도 여름방학은 기쁨이고 즐거움이였을지 모른다.

그렇게 맞이한 초급부시절의 어느 여름방학때에 있은 일이다.

青森에서는 해마다 8월중순에 8.15경축동포야유회가 조직되고있었다. 불고기모임, 소운동회, 하기학교 소개와 같은 범상한 일이라도 당시 총련본부에서 사업하시던 아버지도 녀성동맹위원장이시던 어머니도 이 시기가 다가오면 준비사업과 동원사업에 분주하셨다.

어렴풋하게나마 어렸던 그 시절에도 부모님 사업이 아주 바빠보였다는것과 모여든 동포, 아이들을 보면서 青森에 이렇게 많은 동포들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것을 기억하고있다.

그해 여름방학도 례년대로 8.15모임이 진행되였는데 그날 나는 아침부터 좀 안절부절 못하고 무엇을 기대하고있었다.

어머니는 일찍부터 주먹밥이나 반찬을 싸고 아버지는 먼저 본부회관에 들어가 짐을 싣고 가는데 이것저것 다 챙겼는가, 또 뭘 가져가야 되냐 하고 성급하게 다그치시였다. 모임마당에 가서도 모임이 시작되여도 내 기대를 알아차릴만한 기색은 조금도 안 보였다.

(지금은 바쁘셔서 그렇겠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동포들과 즐겁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부모님들을 보는데 어느새 모임은 끝나고 뒤처리도 다 되고 집으로 돌아가 저녁식사까지 끝나버렸다. 나는 어쩔줄 몰라 가만히 있었는데 문득 ≪오늘 윤희의 생일날이 아닌가?≫고 오빠가 말하는것이였다. 그 순간 아버지도 어머니도 깜짝하며 비로소 알게 된듯 매우 덤비시면서 얼른 케키나 사오자며 간소하게나마 축하모임을 해주었다.

그때로선 원망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지금은 평상시 보지 못한 아버지, 어머니의 일군으로서의 일본새를 8.15광복의 빛이 비쳐준것이나 아닌가 지난날 추억을 그립게 떠올려보군 한다.(東北초중 교원)

꼬마축구대회/리선향

뜨거운 열기가 얼굴에 닿아 조금만 걸어도 땀이 빠질빠질 나와 얼굴이며 몸을 흘러내린다. 올해 여름이 각별히 무덥게 느껴진것은 나뿐이 아닐것이다. 사람의 체온보다 높은 기온이 나를 자꾸자꾸 괴롭힌다.

8월이면 해마다 일본 방방곡곡에서 꼬마들이 집결하여 재일조선초급학교중앙축구대회(꼬마축구)가 열린다. 올해도 大阪 J그린堺에서 꼬마축구대회가 성대히 열렸다.

올해 봄에 고급부생이 된 아들도 고학년시기의 3년간 꼬마축구대회에 참가하여 부모슬하를 떠나 생활하는 3박 4일간에 몸도 마음도 많이 단련된것처럼 느낀다.

우리 아들이 꼬마축구를 졸업한지 몇년이 지나지만 꼬마축구대회는 지금도 우리 가족의 관심사의 하나이다. 우리 집에서도 가족들이 모이며는 모교의 형편에 대하여, 주목선수에 대하여 서로 론하고 상대방에 대하여 인터네트와 페이스북 등에서 얻은 정보를 교환한다. 아들은 이웃에 사는 후배들을 만나면 격려의 말을 건네주고 꼭 우승하라고 고무한다.

아마도 이런 회화가 여러곳에서 벌어지고있을것이다. 그만큼 꼬마축구는 동포사회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일대 행사이다.

나는 일본각지에서 모여온 꼬마들을 응원하자고 경기 3일째에 자동차를 몰고 경기장을 향하였다.

이날도 태양빛이 쨍쨍 내려쪼이는 찜통더위였다.

그러나 날씨이상으로 선수들의 열의와 응원하는 사람들의 열기는 높았다.

경기장에서 축구뽈을 향하여 뛰고 또 뛰는 꼬마들의 모습, 목이 터지게 응원하는 학부모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선수들에게 성원을 보내군 하였다.

우리 아들이 그러했던것처럼 꼬마축구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우승을 목표로 평상시 련습에서 구슬땀을 흘린다. 축구를 통하여 꼬마들은 시합에서 이긴 기쁨, 진 아쉬움과 억울함, 동무들과 함께 뽈을 차는 재미,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심단결하여 나아가는 중요성, 뒤바라지해주시는 선생님과 부모님, 여러사람들에 다한 감사의 마음… 등 많은것을 배우게 된다.

그것을 눈앞에서 보는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 더욱 분발하자는 결심을 다지는것이 아닐가.

京都의 여름은 무덥기 그지없다.

꼬마들을 위하여, 나는 목에다 수건을 맨 《매점아줌마》가 되여서 창립 50돐을 맞는 학교 납량제(納涼祭)를 빛내여볼가 한다.(문예동京都 문학부장)

그날의 《나》/조나미

《사회활동의 일환으로 여름방학간에 중급부 3학년 학생들이 직접 발기하여 독자적으로 운영한 하기학교. 19명의 일교재학생들에게 우리 말과 글,우리 노래와 춤을 가르쳐줌으로써 많은 동포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안겨주었다.》

1994년 8월. 北陸초중 중급부 3학년생들의 이 소행은 당시 큰 파문을 일으켜 《조선신보》에 크게 소개되였다.

세월의 흐름이란 어찌나 빠른지 그날의 주인공들은 현재 36살이 되여 가정에서, 일터에서 자기 몫을 다하고있다.

나도 그속의 한명이다.

2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여름의 일들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동포들을 위해 학교를 위해 내가 할수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가?)

시작은 15살 소녀의 소박하고 순결한 량심과 그에 찬동한 동무들의 지혜와 노력, 정열이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에 몇십호라도 찾아간 동원사업, 꼬마선생이 되여 아글타글 애쓰며 준비한 수업 등 그간에 얻은 경험은 태산과 같았고 받아안은 동포의 정 또한 귀한것이였다.

어린 일군들의 기특하고 살뜰한 정성은 하기학교에 다니는 일교재학생들만이 아니라 선생님들과 지역일군들, 동포들의 마음까지도 움직이게 하였던것이였다.

무엇보다 기뻤던것은 그때 하기학교에 다녀 즐겁게 노래하던 학령전어린이들중 몇명이 다음해 우리 학교에 입학하였던것이다. 그후 그들은 愛知조고에, 조선대학교에 진학하여 현재 동포사회에서 떳떳이 자기 역할을 놀고있다.

해마다 8월이 오면 나는 자기를 돌이켜본다.

나는 지금 20년전의 나만큼 잘하고있을가? 그때 많은 도움을 주신 부모님이랑 선생님들이랑 동포들만큼 후배들에게, 지역 아이들에게 사랑을 돌리고있을가?

그날의 나처럼 성실하게 량심적으로 살고있을가? 아무런 리해타산도 없이 충실하게 오늘을 살고있을가?

그날의 나는 오늘도 나에게 가장 귀중한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西東京 中部지부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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